수준 좀 높여라, 천박한 것들아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03-01)
화제를 낳고 있는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이 무엇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는지는 평범한 상식과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알 수 있다.
직접 감상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한 장면, 촌로와 그의 올드 파트너인 늙은 소를 찍은 사진 한 컷만 보더라도 그게 읽힌다.
분명 영화는 느리게 움직이면서, 대박을 향한 속도전이 판치는 세상을 조용히 꾸짖는다. 제작 스튜디오 이름부터가 ‘느림보’ 아니던가. 이 영화가, 오로지 돈을 위한 미친 질주 속에서 숱한 철거민들이 죽어나가는 2009년 지금 개봉되었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상을 느긋이 바라보는 이 영화는, 가볍게 만들어 쉽게 돈 버는 충무로의 주류 조폭-막장 영화들을 제치고 입소문으로만, 그것도 ‘새벽별 보기 돌격!’을 외치는 시대에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은, 이명박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쾌한 ‘테러’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를 각하께서 유인촌을 대동하고 친히 감상하셨다니 눈물 나는 감동이 따로 읎다. 얼리버드에다 단 한 푼이라도 손해 보고는 살지 못하는 체질에, 78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을 용케도 견디셨다! 영화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해지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뜨끔했거나 했을 텐데 참으로 대단하시다. 더욱이 갱제 살리기에도 바쁘신 몸인데.
영화 감상하는 이명박들의 자못 진지한 얼굴을 떠올려보라. 쉽게 상상되지 않으면, 부시가 이란의 독립영화를 ‘심각’하게 감상한다고 가정해보자. 부시가 심각해지는 이유도 그 머리로는 도저히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악랄한 인권탄압 국가’인 이란 영화가 잘난 할리우드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것을 알고 쇼크 먹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게다.
각하께서 영화를 볼 예정이니 동석해 달라는 유인촌의 말을 들었을 때 이충렬이 어떤 심정이었을까는 각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다만, “청와대가 하도 졸라대기에, 독립영화 진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보자기에 승낙했다.”라는 제작팀의 말만 덧붙여둔다.
이명박들은 ‘독립영화 진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했을까? 과연 저들은 독립영화 내지 다큐 영화의 정신이 뭔지나 알고 있을까? <워낭소리>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 이해했을까? 이명박들이 영화를 보러 온 진짜 이유는 뭘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각하께서 영화감상 후 했다는 두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잘 봤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관객이 얼마나 들어왔나?”
이명박들은, 스토리텔러인 할머니 말대로, ‘고물’들(늙은 ‘서방’과 소 그리고 라디오)의 이야기뿐인 이 영화에 어찌하여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몰리는가, 좀 더 섹시하게 말하면, 어떻게-얼마만큼 돈이 벌리고 있는가, 그것만이 진짜로 궁금했던 것이다. 돈 되는 것에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이명박들이 아니다. 흥행 안 되었으면, 각하께서 <워낭소리>에 관심이나 가졌겠는가.
근데, 막상 감상을 해봐도, 오랜 우정이라는 흔한 주제를 다룬 이 영화가 어찌하여 이리 히트를 치게 되었는지, 그 천박한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관객이 왜 그리 많이 왔나?’라며 놀라는 한편으로, 평을 하긴 해야 하겠는데 영화를 이해하지는 못하니, 그저 식탐이 시키는 대로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던 것이다.
천박, 그렇다. 비할 데 없이 천박하다. 대체 '격'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명박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전두환을 쫓아낸 우리가 그 삼류 아류에 불과한 이명박들을 무서워하겠는가. 다만, 그 천박-경박함에 민주공화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쪽팔릴 뿐이다. 애써 쌓아온 위대한 역사가 참을 수 없이 경박스러워졌다는 것,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부류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저리 활개친다는 것에 절망할 뿐이다.
이명박에 렬렬히 표를 몰아준 사람들은, 아마도 각하께서 갱제를 살려 줄 것이라고 믿었을 게다. 그들은 이명박들이 위법, 탈법, 편법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여 돈을 긁어모으는 것을 지켜봤고, 그것을 부러워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명박들에 몰표를 줌으로써 자기들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뉴타운으로, 강남으로 들어가는 것이 노무현이 ‘깽판 친’ 갱제가 살아나는 길인 줄 알았었다.
김수행 교수가 용산의 비극, 다시 말하면 재개발과 대박의 탐욕이 부른 재앙, 그리고 이명박들에 대해 한마디 했다.
“강부자 내각을 만든 이유는, 이명박이 볼 때는, 돈들을 많이 벌었으니 경제를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근데 그들이 돈을 번 것은 땅 투기하고 아파트 투기해서 얻은 것 아닌가.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는 것에는 생각이 없어. 개인은 남의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국민들 전체로서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지.”
즉, 이명박들은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과, 국민 경제를 살리는 것을 전혀 구별할 줄 모른다. 땅 투기로 돈을 버는 것이, 이명박들이 아는 갱제의 전부다.
이거다! 이 정권이 탄생하게 된 유일무이한 이유는, 자기 재산 불리는 것이 곧 경제 살리는 것이라고 (이명박-조중동들이) 구라를 쳤고 그것이, 통재라,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 이 현상을 칭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천민자본주의’뿐이다.
남들은 망루 속에서 불타 죽든 말든, 사기를 치든 공갈을 치든, 돈 안 되는 거추장스런 도덕, 절차 따위는 걷어치우고 오직 부자가 되기 위한 조급증에서 이명박들을 대놓고 찍었고 지금도 빨아주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천민자본주의다.
“헬기 타고 서울 근교 상공을 한번 둘러보라…. 그린벨트에 비닐하우스만 가득 차 있다. 신도시를… 이런 곳에 개발하면…” 이명박이 최근에 했다는 말이다.
거짓말 한마디 안 보태고, 이게 각하가 생각할 수 있는 갱제의 전부다. 각하의 말마따나 그런 곳에 신도시를 개발하면, 살아나는 것은 국민경제인가, 아니면 투기꾼들인가. 이명박들은 국민경제에 속하나, 투기꾼들에 속하나.
자칭 ‘민주주의’한다는 어느 정권이 국민들과의 소통이 귀찮다고 컨테이너 쌓고 촛불을 ‘폭력’이라며 찍어 내리던가. 절박한 생존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대테러’ 경찰특공대씩이나 투입시키던가. 비판적인 글 쓴다고 네티즌을 잡아들이고, 자기 얼짱 각도 안 잡아 준다고 권력기관들 총동원하여 공영을 어용으로 만들었던가. 각하밖에 없다.
어느 국가원수가 별장에 초대받아 카트 한번 몰았다는 기쁨에 자기 나라 국민들의 건강주권, 검역주권을 통째로 갖다 바치던가. 어느 국군통수권자가 안보와 전투기 조종사들의 목숨을 일개 놀이시설과 맞바꾸던가. 이명박들 밖에 없다.
어느 나라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지사를 ‘테러리스트’, 식민지 시절을 ‘좋았던 때’라고 부를 것인가.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랄 해방 투쟁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들은, 지구 상에 오직 천박한 조중동들 밖에 없다.
대체 무신 생각으로 흉악범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한단 말인가. 하긴, 이명박들의 취임 때 우리는 그 천박함의 징조를 생생히 봐둔 게 있으니 뭐 새삼스러울 것도, 입 아프게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거창한 게 아니다. 취임식 날, 기념품인지 목도린지 하나 서로 차지하겠다고 처절한 난투, 난리를 피웠던 거 기억나는가. 나름대로 엄숙하게 표정관리 할 자리인데도, 그 각하의 취임식에 참으로 어울리게도 그새를 참지 못하고 천박함을 드러냈던 그 사건 말이다.
근래, 경상북도가 아주 깜찍한 관광 상품을 내놨다고 한다. <워낭소리>가 촬영된 봉화군의 할아버지와 소(의 무덤)를 관광 명소로 개발하시겠다는 것. 조용한 생활에 익숙한 노부부를 위해 ‘포토존’까지 따로 만들겠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참으로 가관이다.
아무리,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각하의 천박함을 별 생각 없이 따라한 것뿐이라고 해도, 이명박들이 사실 보여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다는 애끓는 사정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백번 양보하여 설사 그게 갱제 살리기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 이하로는, “절대로 안 팔아!”를 외친 저 <워낭소리>의 늙은 주인공과 같은, 그 자존심 말이다. 그것은 타인보다는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더 철저히 존중받아야 하고, 그 누가 아닌 바로 자신이 앞장서 지켜내고 대접받아야 할 바로 그런 가치다.
이 나라도 당연히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3.1 만세운동이 그랬고 4.19 혁명, 6월 항쟁이 그랬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는 - 지금에사 새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지만 - 그 가치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역사의 총합을 보여줬었다.
근데, 지금 이 천박한 나라가 저 위대한 그 나라와 같은 나라인가? 노무현 때 ‘국격을 높여라’고 게거품 물었던 찌라시들, 어때? 지금 각하가 보여주고 있는 격은 만족스러워?
천박한 것들아. 수준 좀 높여라. 쪽팔려서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 초모룽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