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를「누님」으로 표현한 이 절묘한 은유
모든 풀들이 시드는 가을철, 서리속에서도 국화는 홀로 향기롭게 핀다. 그 고고한 품격 때문에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중양절에는 불로장생의 꽃이라하여 술에 담그고 전으로 부쳐 먹는 풍습도 있었다. 은군자의 유교적 이념이든 혹은 신선을 나타낸 도교적 상징이든, 국화는 워낙 우리 의식 깊숙이 배어있는 꽃이어서 잘못 노래하다가는 그야말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국화빵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서양에는「맨 처음 장미를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 지만 그 말을 두번 다시 쓴 사람은 바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제일 먼저 국화를 군자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번째로 그와 똑 같은 말을 한사람은 바보」가 되고 만다.
만약 시인의「국화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 고절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그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의「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의 성(젠다)을 바꿔버렸다.「군자=국화」가「누님=국화」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원리가 감각적인 미와 애정의 여성원리로 바뀌게 된다는점이다.「거울앞에선 누님」의 모습은 췌언할 필요없이「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은일자」혹은「책 앞에 앉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군자라고 할 때의 도덕적 가치규범과는 달리「누님」이라고 하면 아무리 나이 든 여성이라도 심미성이나 애정과 관련된 세계를 연상하게 된다.「거울앞에 선」이라는「거울」은 용모를 가꾸고 다듬는 도구로 책-선비에 대응하는 거울-여성의 환유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시의 평자들은 누님의 모습을 흔히「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성숙한 인간의 인고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해 왔다. 그렇게 되면 국화 역시 군자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윤리적인 원숙이 아니라 미의 원숙성,「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관능적인 애욕이나 유혹에 들떠 있던 젊음의 미가 아니라 실연의 고통이나 삶의 환멸과 좌절같은 것을 다 겪고 난 뒤에 비로소 얻어지는 중년 이후의 여인에게 맛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봄에 피는 붉은 도화와 가을꽃인 노란 국화의 의미론적 차이를 결정짓는 서정주의 시적 전략이다.「머언 먼 젊음」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거울 앞에선 누님은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철로 접어든, 적어도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다. 그 얼굴의 화장밑에는 처연하면서도 침잠된 미-젊음의 미와는 또다른 진짜 여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두번째의 지향점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나의」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 군자는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 우리와는 먼 존재로 느껴진다. 은자는 세속과 단절된 것으로 그 품격은 오상고절처럼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다.
미당의 국화가 다른 국화와 차이성을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그점이다.「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지나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라의 전통적인 그 국화는「네 홀로」「너뿐인가 하노라」로 강조되어 있듯이 홀로 있는 절개(고절)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미당의 국화는 정반대이다.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 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 시간의 단위로 볼때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이 하나의 고리쇠로 지속하고, 사물의 층위에서 보면 모든 사물이 무생, 유생의 담쟁이를 넘어 일체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화는 봄의 소쩍새, 여름의 천둥과 인과관계를 맺고있으며, 자연과 대응되는 인생의 경우에서는「누 님」과「나」와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너뿐인가 하노라」의 초절성이 아니라 모든 것과 결합된 친연성으로 새롭게 태어난 미당의 국화는 봄의 소쩍새 소리와 여름의 천둥소리와 인과관계를 갖게 된다.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그것은 봄철에 우는 소쩍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나는 식물이고 하나는 동물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향기를 지닌 것과 날개를 지닌 것, 땅에서 사는 것과 공중에서 사는 것, 국화꽃과 소쩍새는 어느모로 보나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설과 시의 상상적 세계라고 해도 소쩍새는 지금까지 국화가 아니라 같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 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시속에서는「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 새는 밤마다 운」것으로 되어있고,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울었다고 되어 있다.「봄부터」란 말에서 우리는 금시 국화꽃의 시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간적 인과관계만이 아니다. 꽃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시각과 후각의 대상물이다. 그런데도 미당의 국화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먹구름뒤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의 청각물과 어울려서 감각적 세계에 있어서도 통합관계를 이루고 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 라고 하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에 슬픔이라는 인과성을 부여할때 비로소 소설의 플롯은 형성된다. 이 유명한 정의처럼 미당은 관계없이 흩어져 있는 사물이나 그 현상속에서 어떤 인과율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의 구성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봄-소쩍새-국화」,「여름-천둥소리-국화」에서「가을-서리-국화」에 도달한다. 그리고 서리는 직접적으로 노란 꽃잎을 피운다. 그리고 동시에 거울앞에선 나의 누님과 국화의 관계 역시「나」와 국화의 관계로 옮겨지면서「노란 네 꽃잎이 필라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의 마지막 시행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한송이「국화꽃」이라고 부르던 것이 마지막에 오면 「네 꽃잎」으로 그 인칭이 바뀐다. 너라고 직접 불린 국화는 이미 밖에 있는 꽃이 아니라 은유의 거리마저 소멸한 나-국화의 동일성으로 변한다. 봄과 여름의 계절, 그리고 누님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 나에게 오면「간밤」이라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 되고, 가슴 조이는 그 의미 역시 무서리와 직접 연결된다.
시가 진행되어 갈수록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넓은데서 좁은 데로 국화는 우리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국화옆에서」의 그「옆」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국화속에서는 모든 생명을 죽이는 서리가 오히려 꽃을 피우는 초월의 힘으로 작용한다. 누님도 나도 이 서리의 역반응에 의해서 비로소 삶의「노란꽃잎」은 그 아름다움을 얻는다. 누님의 그 노란 꽃잎이 여성으로서의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도달점이라고 한다면, 잠 오지 않은 간밤의 무서리속에서 피어나는「나」의 그 노란 꽃잎은 시인이 고통속에서 얻어낸 아름다운 몇줄의 시일 것이다.
신라의 스님 월명이 밤길을 가며 피리를 불면 가던 달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천체의 운행이 멈추는 순간,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 하는 그 순간에 시가 태어난다. 가을에 피는 국화꽃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거울앞에 선 누님, 그리고 밤에 잠 못이루는 나(시인)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행복한 은유는 서리 내린 이 현실세계를 교감과 조응으로 가득채우는 시적공간이 되는 것이다. (인용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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