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체벌하는 것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도대체 학생들이 무얼 잘못했다고 저렇게 때리시나, 학생들이 이런저런 잘못을 하는 것은 그 전에 부모나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그러니 그런 잘못은 학생들 탓이 아니라 어른들 잘못이고, 따라서 학생들을 때리는 것은 잘못이다’하는 식으로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잘못하도록 결정한 것이 부모나 선생님의 탓이라면, 앞으로 학생들이 나은 행동을 하도록 결정하기 위해서 매를 드는 것을 탓할 수 없지 않나, 기계를 고치듯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 매를 드는 것이다, 기계가 기계주인한테 무슨 반발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어린 중학생의 이런 생각은 기계론적인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져 왔다.
고등학교 시절 국민윤리시간에 비록 유치한 수준이지만 여러 철학사조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있었다. 윤리선생님은 예정론을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라고 가르치셨는데, 나는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애써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나. 결정지어진 대로 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천당과 지옥으로 상벌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무엄하게도 ‘천주교회에서 예정론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성당을 다니지 않겠다’고 불경스런 다짐을 했다. 다행히 필자의 고민어린 질문을 받은 신부님은 ‘예정론은 틀린 것이고, 천주교회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믿고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예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마음에 품고 지내던 어느 날, 하느님의 계시처럼 보이는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원리 50주년’이라는 제목 아래 양자물리학이 소개되어 있었다. 총을 똑같은 조건으로 두 번 쏘면, 뉴턴의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똑같은 위치에 맞지만, 양자물리학에 의하면 다른 곳에 맞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양자물리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절로부터 벌써 수 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런 문제의 언저리에서 양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필자는 행복하다. 양자물리학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완전히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주는 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퍼뜨린 고전물리학에 비하면 이것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양자물리학에 의해 결정론적이 아닌 확률론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자유의지와는 거리가 있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비평가 마틴 가드너가 쓴 책 중에 ‘왜-철학 쓰기(The WHYS of a philosophical scrivener)’가 있다. 마틴 가드너는 사이비과학에 대해 예리하고 분석적인 비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의외의 주제들에 대해 의외의 생각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신앙’이라는 주제 하에 ‘왜 나는 무신론자가 아닌가’, ‘기도’라는 주제 아래 ‘왜 나는 기도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영생’에 대해 ‘왜 나는 영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틴가드너는 ‘자유의지(Free Will)’항목에서 ‘왜 나는 결정론자도 아니고 우연론자도 아닌가 (Why I Am Not a Determinist or Haphazardist)’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서 결정론은 고전물리학적인 세계관, 유물론적인 세계관, 예정론적인 세계관을 대변한다. 우연론은 확률론적인 양자물리학의 측정과 관련이 있다.
어떤 물리량을 측정한다고 할 때에, 고전물리학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물리량의 값을 변화시키지 않고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양자물리학에서는 물리량의 값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때에야 정해지고, 이것도 여러 가능한 값들 중에서 확률적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고전물리학의 측정은 정답이 있는 시험문제와 같다. 1 더하기 2가 뭐냐고 물으면, 주관식을 해도 답이 3이고, 사지선다형으로 해도 선택지 중에서 3을 골라야 한다. 양자물리학의 측정은 선거와 비슷하다. 어느 사람이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이 될지 정해져 있지 않으나, 일단 후보 등록을 마치고 나면 후보자들은 누구라도 각각 당선될 확률이 있다. 선거를 마치면 여러 후보들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당선된다. 이렇게 양자물리학의 확률론적인 측면은 ‘자유의지’에서 ‘자유’적인 부분은 도와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의지’적인 부분은 여태까지 양자물리학과 별로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유의지’의 의지적인 부분이 최근 양자제논효과(Quantum Zeno Effect)를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제논의 역설은 ‘날으는 화살은 과녁을 맞출 수 없다’고 보임으로써 운동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역설인데, 그 자체가 논리적인 오류이다. 이와 달리 양자제논효과는, 끊임없이 측정을 하면 움직이려는 물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현상인데, 실험적으로 관측 증명된 사실이다. 이 양자제논효과를 조금 다르게 응용하여, 측정장치를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끊임없이 측정을 하면, 관측되는 물리량은 측정장치를 따라가며 변하게 됨으로써, 어떤 대상을 의지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과학을 과학 바깥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적용하는 데에는 항상 오류의 위험이 있고, 자유의지를 양자물리학이나 과학으로 증명한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을 보이고, 자유의지에 대해 비유적인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자물리학의 도움 없이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요즘은 자유의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쓴 글이나 책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사람들이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첫 번째 습관으로 ‘주도적인 삶(Be Proactive)’을 권하면서,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결정론을 들고 있다. 첫째, 생물학적인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으로, 우리의 운명이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심리학적인 결정론(Psychological Determinism)으로, 어릴 때 형성된 성격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셋째, 환경적 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은 내가 이렇게 잘못된 것은 내 배우자, 내 동료, 내 이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결정론을 쉬운 말로 옮기면 바로 ‘조상탓’, ‘부모탓’, ‘남탓’이 된다.
자유의지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는 것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잘못이지만,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행위 자체를 무시하는 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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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유의지는 그래서 중요하고, 그에 따른 책임은 자신에게 귀속된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존엄성의 핵심요소임이 과학으로도 종교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참 소중한 당신' 2004년 11월호) 글쓴이: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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