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의 생존와 인지능력
정글 숲 속. 나무 아래 떨어진 과일들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 원숭이 한 무리. 이들과 약간 비껴난 숲의 그늘 깊은 곳, 조심스레 빛나는 표범의 허기진 눈. 표범의 몸은 멈추어 있으나 그 머리 속 두개골이 단단히 감싸고 있는 뇌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처리가 일어난다.
표범의 눈, 귀, 코, 피부 등 온갖 감각 기관은 숲의 환경과 원숭이로부터 시시각각 도착하는 물리적 입력을 뇌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의 부호(신경흥분)로 번역하여 온라인으로 뇌로 전송한다. 전송된 신경활동을 바탕으로 뇌는 온갖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냄새가 원숭이 무리에 미치지 않게 바람과 마주하도록 위치를 잡는 일. 원숭이는 몇 마리이며 어떤 원숭이가 가장 약하고 느려서 먼저 공격할 대상으로 삼을지 선택하는 일. 그리고 원숭이 무리에 얼마나 더 가까이 접근해서 언제 공격할 것인지 판단하는 일.
드디어 표범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원숭이의 뇌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표상, 처리, 분석한다. 바스락, 점점 커져오는 발자욱 소리. 불길한 포식자의 냄새. 바람에 일렁이고 부산스런 동료 원숭이들의 달음질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와 잎들 사이로 파편으로 흩어지며 움직이는 표범의 애매한 윤곽들. 몇 초의 시간에 주어진 파편적 윤곽들의 움직임에서 표범이 어디로 움직일지 짐작하여 그것과 어긋난 공간상의 좌표로 원숭이는 자신의 몸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 긴박한 생존게임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원숭이와 표범의 뇌에서 벌어지는 정보처리 능력이다. 이 게임의 승자는 자신이 보존해온 또 하나의 정보인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송할 확률게임의 승자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로 전송된 유전자 정보에 각인된 정보처리 능력은 다시 한 번 개체의 생존게임에 개입할 것이다.
뇌는 어떻게 인지능력을 구현하는가?
여기서 등장한 표범과 원숭이의 마음과 행동에 비춰진 정보의 표상, 처리 등의 사건들을 현대 과학자들은 ‘인지(cognition)’라 부른다. 개체의 환경에서 수집된 물리적 사건들을 정보처리가 가능한 형태로 번역, 표상하는 감각정보처리 능력. 그러한 정보의 표상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적절히 불러내어 현재 정보처리에 사용하는 기억과 학습의 능력. 현재 입력되는 감각정보와 기억에 저장된 정보에 바탕하여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추론하는 지각적 의사결정 능력. 그리고 그러한 지각적 의사결정에 기초하여 가장 개체의 생존과 이익에 긍정적인, 즉 보상을 최대화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결정하는 경제적 의사결정의 능력. 다른 개체와 정보를 교환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사회인지 능력. 이렇듯 인지능력의 외연은 매우 넓다.
‘뇌인지과학(Brain and Cognitive Sciences)’, 혹은 ‘인지신경과학 (Cognitive Neuroscience)’은 바로 뇌가 생명체의 다양한 인지능력들을 어떻게 구현(implementation)하는지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그 동안 인문학(철학, 종교학, 언어학, 문학, 예술)이나 사회과학(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의 틀에서만 제한적으로 탐구되거나 추론되던 인지능력들은 이제 뇌에서 벌어지는 신경적 사건이란 틀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인지신경과학, 선배과학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 선 젊은 융합과학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토머스 쿤이 정의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지위에 인지신경과학이 도달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으로서 인지신경과학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키워드는 ‘연결 (linking)’이다. 마음, 행동이란 심리적 공간(psychological or behavioral domain)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뇌라는 물리적, 생물학적 공간 (physical or biological domain)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수준에서의 뇌의 사건들에 연결하는 것. 마음과 뇌를 연결하는 이 새로운 과학적 엔터프라이즈는 선배 자연과학들이 고단하게 이루어 놓은 지식, 발견의 축적과 관찰 및 분석 도구들의 발달 없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정량화하며 마음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실험실에 끌어들인 인지심리학, 신경계의 해부적, 기능적 특성을 탐구하는 분자신경생물학, 개별 뉴런들의 신경적 활동을 측정하는 전기생리학, 집단으로서 뉴런들의 거시적 활동을 측정하는 뇌영상학, 마음과 신경적 사건의 두 도메인에서 벌어지는 정보처리를 수리적 모델로 시뮬레이트하고 연결해주는 수학. 인지능력 탄생의 비밀을 쥐고 있는 유전학. 마음과 뇌의 연결은 다학문적 협력활동 그 자체이고 이러한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뇌인지과학자 자신은 축구나 배구경기의 리베로처럼 멀티플레이어가 되거나 적어도 여러 학문들 사이에서 언어장벽을 느껴선 안 된다. 참고로 필자 자신도, 철학과 심리학으로 학부전공을 한 후, 수학, 공학, 생물학 등을 주로 배우며 신경과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수리적 신경과학 및 뉴로이미징의 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연수하였다. 현재 필자 실험실도, 생물학, 심리학, 전기공학, 전산학, 수학, 물리학, 생명공학 등을 전공한 대학원생들 및 박사후과정 연구원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연구 문제를 선택하고 풀어가는 그야 말로 멜팅 팟이다.
아래에서 마음과 뇌활동을 연결하려는 인지신경과학의 대표적인 질문들 두가지를 중심으로 현재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퍼즐 하나: 마음의 실재(reality)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의 이름으로 답을 쫒던 거대한 물음들.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 실재(exist)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인간은 실재를 알아차릴 능력이 있는가? 선배 철학자들의 말에 기대지 않고 대뜸 답해보자. 아마 실재란 우리 눈에 보여지는 것 그 자체라 하지 않을까. 실재를 알아차릴 능력, 당연히 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실재는 내 앞에 펼쳐지고 그 변화는 시시각각 온라인으로 내 마음에 접수된다. 현란한 전광판에서 추락하는 내 주식가격. 생일을 놓친 나를 노려보는 화난 여자 친구의 표정. 이런 것들이 ‘실재함’을 철학수업시간이 아닌 다음에야 일상에서 누가 의심할까. 이 단단한 실재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지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오는 물리적 입력을 재료로 ‘실재’를 만드는 공장이며, 그러한 ‘뇌가 만들어 낸 실재’를 ‘객관적 실재’로 믿게 하는 것도 뇌의 작용일 뿐이다. 몹시 어려운 얘기다. ‘마음의 실재’와 ‘객관적 실재’의 연결에 대한 확신을 배반하는 인지신경과학적 장난감을 하나 소개하겠다. MIT 뇌인지과학과의 테드 에이들슨 교수가 만든 위 그림을 보자. ‘마음의 실재’는 얘기한다, “A와 B로 표시된 격자들 중 하나는 검고 다른 하나는 하얗다” 라고. 그러나 ‘객관적 실재’, 즉 두 격자의 물리적 밝기는 동일하다 (의심스러우면 백지에 격자 크기의 구멍을 내어 주변을 가린 채 A와 B를 보라).
의식, 즉 ‘마음의 실재’를 생산하는 뇌 작용을 이해하려는 것은 인지신경과학자들의 호기심만을 만족시키는 건 아니다. 이 분야의 과학적 도전이 이룰 성취는 장애로 인해 눈을 떠도, 귀 기울여도, 손으로 만져도 실재와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동료들의 실재를 찾아주고 또한 우리의 실재 또한 확장해 줄 것이다. 물론 마음의 실재를 구성하는 뇌 활동의 까다로운 퍼즐을 푸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며 재능 있고 패기 찬 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퍼즐 둘: 결정(decision)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앞선 문제가 외부 환경에서 주어진 감각정보를 뇌의 언어로 부호화(encoding)하는 과정에 관한 퍼즐이라면, 그렇게 뇌활동으로 부호화된 감각정보를 이미 기억으로 저장되거나 학습된 맥락 정보 (contextual information)에 바탕하여 평가하고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인경신경과학자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이다. 즉, 최근까지만 해도 인지신경과학 활동의 대부분은 뇌에 주어지는 입력과 가까운 쪽이나 뇌의 출력과 가까운 쪽의 뉴런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최근에는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매우 복잡한 문제해결이나 의사결정 과정의 신경적 기초를 이해하는데서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
뇌과학자들은 경제적 의사결정의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하며 해묵은 경제학의 딜레마에 새로운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뉴욕 대학의 글림셔(Paul Glicher)는 원숭이들의 뇌에서 특정 뉴런들이 경제적 투자행동과 관련된 의사판단과 상관된 활동을 보인다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의 실험에서 목마른 원숭이들은 매 번 도박-이것의 점잖은 혹은 합법적 표현은 주식투자이다-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예컨대 A란 선택지는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쥬스 1000cc를 마실 수 있고, 뒷면이 나오면 쥬스를 아예 마시지 못하는 반면, B란 선택지는 동전 던지기 결과와 상관없이 500cc의 쥬스를 보장받는다. 경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두 선택지는 ‘기대값’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기대효용’은 B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글림셔가 관찰한 뉴런의 활동수준은 도박에 열중한 원숭이들의 선택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며 기대효용의 수준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 복잡한 수학으로 유도된 하나의 추상적 경제학 방정식의 해가 원숭이 뇌의 한 세포의 활동으로 번역된 것이다.
최근에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이라 불리는 뇌영상 기술을 통해 인간들의 뇌활동을 직접 측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fMRI는 뉴런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며 시공간의 해상도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뇌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뉴런들의 활동을 모니터할 수 있으며, 원숭이와 인간의 뇌 활동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과거 동물모델을 통해 축적된 단세포 측정법의 결과들을 인간의 뇌에 적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인간에게 특징적인 여러 고위 인지기능 및 정서, 사회적 적응기능의 신경적 기초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뇌과학 연구에 획을 긋는 연구결과들이 최근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주된 흐름은 전통적으로 뇌과학 영역의 바깥이라 여겨져 왔던 분야들이 하나 둘씩 뇌과학의 손길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비활동에서 ‘상표 가치’의 신경적 기초를 밝히는 작업들을 중심으로 뉴로마케팅 (Neuromarketing), 혹은 넓은 의미로 뉴로이코노믹스 (Neuroeconomics)란 분야가 생겼는가 하면, 두 사람 이상이 fMRI 스캐너에 동시에 들어가 인터넷으로 상호작용을 할 때의 뇌활동을 측정함으로써 사회적 능력의 신경적 기반을 탐구하는 소셜 뉴로사이언스 (Social Neuroscience)등의 분야도 생겼다.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인문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들이 인지신경과학 학회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인지신경과학자들의 발견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와서 자신들이 축적해온 개념들의 외연도 넓히고 또한 미래 인지신경과학 연구에 적절한 지침을 주기도 하여 매우 생산적인 학제간 상호작용이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맺음말
인지신경과학은 젊은 학문이다. 그리고 인지신경과학이 마주한 엄청난 난이도와 방대한 양을 지닌 숙제들은 많은 과학자들의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과학자들을. 필자는 각 분야의 젊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연구활동이 뇌과학의 질문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여기길 바란다. 우리 인지신경과학자들에겐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고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들이 산적해있지만, 참 재미있는 숙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 월간 <과학과 기술>, <동아일보> 및 서울대에서 발간되는 <자연대 이야기> 등에 기고하였던 글들을 함께 묶고 새로운 생각을 첨가하고 다듬어 인지신경과학을 중심으로 조합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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