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들에게 어째서 금식이 그토록 중요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성(性)을 초월한 존재, 독신생활 등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 되었는가? 인생은 두 가지 문제에 결정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바로 음식과 성이다. 따라서 삶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음식과 성에 반대한다. 왜나하면 그 두 가지는 삶의 가장 근본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통해 이 세대가 살아가고 성을 통해 다음 세대가 생명을 얻는다. 음식을 끊으면 그대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성을 끊으면 미래의 세대로 연결되는 통로가 끊어질 것이다. 음식과 성을 끊는 일이 극에 달하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삶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금식하는 일을 수단으로, 성을 끊는 일을 목적으로 여겨 신성시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상대적이다.
"요한의 제자인 우리들은 종종 금식을 행합니다. 랍비들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으니 왠일이죠?"
나한테 오는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한다.
"어째서 당신은 제자들에게 금식이나 단식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나는 늘 놀랄 뿐이다. 사람들은 왜 음식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읽어 보라. 그의 전 생애는 음식에 관련된 일들, 음식과 소화에 관한 일들로 가득차 있다. 먹는 일과 배설하는 일,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기본 문제로 등장한다. 어째서 그는 음식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걸까? 음식을 대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 두려움은 바로 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음식을 잘 먹으면 성 에너지가 왕성해진다. 이 성 에너지를 존재의 위쪽으로 상승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에너지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불처럼 위로 올라가게 하지 못하면 물처럼 아래로 내려간다. 따라서 음식을 대하면 성에 대한 두려움이 이는 것이다.
가서 직접 한번 보라. 인도에는 많은 성자들, 특히 자이나교의 성자들이 많이 있다. 자이나교는 끊임없이 금식을 행하는 성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이 금식을 행하는 이유는 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음식을 잘 먹으면 에너지가 생기는데 이 에너지를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래를 부를 수도, 춤을 출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에너지는 무거운 짐만 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에너지가 안 생기게 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금식은 에너지가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들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따라서 최소한의 에너지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그 최소한의 에너지를 갖고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남아도는 에너지가 있을 리 없다. 큰 소리로 웃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춤을 추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의 에너지만 유지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최대로 되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충분한 물을 주지 않아 보라. 충분한 비료와 거름을 주지 않으면 나무는 죽지는 않을 것이지만 꽃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나무에 에너지가 넘치고 남아돌 때에만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꽃은 남아도는 여분의 에너지로 피어난다. 에너지가 넘쳐 흐를 때 나무는 그것을 나누어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꽃이 나오고 향기가 널리 퍼져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가 자기의 에너지를 즐기는 방법이다. 너무 많이 가졌을 때 나무는 그 넘치는 에너지를 세상 모두와 나누어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충분히 갖지 못했다면 나누어 가질 게 어디 있겠는가? 그때 나무는 겨우겨우 생존해 나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본래의 싱싱함을 잃기 시작하고 말라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허덕일 것이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그런 요령을 터득했다. 즉 금식을 행하면 최소한의 에너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요령을 배웠다. 그렇게 되면 위험성이 훨씬 덜한 것이다. 화를 내는 일도 적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화를 내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열에 휘말릴 위험성도 없어질 것이다. 사랑 역시 에너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웃음 역시 에너지의 표현이기 때문에 웃음도 적어질 것이다. 삶은 에너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최소한의 에너지만 갖고 살아간다면 최소한의 목숨만을 유지하게 될 것이고 늘 죽음의 문턱에서 맴돌 것이다.
기억하라. 하느님의 나라는 그대가 최대한의 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 최적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대가 최정상에 도달해 있을 때 그대 곁으로 내려온다. 오직 그때라야 하늘나라는 그대의 것이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하려고 폼만 잡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그만한 용기도 없다. 용기가 있다면 단칼에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들은 겁장이들이기 때문에 서서히 자살을 꾀한다. 아주 천천히 독약을 먹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지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삶을 살았다. 예수의 동료제자들, 예수 역시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니까, 예수의 동료제자들은 예수를 배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걸어나갔기 때문에 결국 스승을 배반한 셈이 되었다. 그는 살아 있는 종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삶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된 예수의 모습은 기독교 신학이라는 똥통에 빠져 참모습을 잃어 버렸다. 참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기독교 신학이라는 쓰레기차에서 끝없는 양의 복음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참된 복음은 다 사라지고 잊혀졌다. 그 사람의 메시지는 삶의 기쁨이었다. 삶의 기쁨이 흘러넘쳐야만 하느님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 아닌가? 삶은 금식이 아니라 잔치여야 한다.
예수는 거듭거듭 말한다. "기뻐하라!"
그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지 절대로 삶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뻐할 때 세상은 그대의 것이다. 행복할 때 온 세계가 그대의 것이다. 이런 속담도 있지 않은가?
"웃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세상에서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어라. 그러면 갑자기 나무와 새들과 짐승들, 그리고 하늘과 대지가 그대와 함께 웃기 시작할 것이다. 웃음은 하나의 초대이며 개방이다. 그러나 눈물짓고 슬퍼할 때 그대는 폐쇄된다. 그때 그대는 바다와 모래들과 접촉할 수 없고 모래와 바다 역시 그대와 접촉할 수 없다. 그대는 단세포 동물처럼 되어서 창문도 없고 대문도 없이 모든 것이 닫혀 버린다. 슬퍼하는 사람은 폐쇄적으로 되어 버린다. 그 자신 속에 닫혀 버린다. 그의 존재는 확장되지 못한다. 그의 존재는 결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물처럼 되지 못한다. 삶의 흐름과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어 버린다.
예수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많이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 적게 가진 자는 그 적은 것마저 잃으리라."
아무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예수만이 그렇게 말했다.
"네가 조금 갖고 있다면 너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진정으로 많이 갖고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너는 받게 될 것이다."
매우 불공평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행복할 때 그대는 더 많은 행복을 손에 넣게 되고, 불행할 때 더 많은 불행이 그대를 찾아온다. 행복할 때 그대는 더 많이 얻게 된다. 문이 활짝 열리고 신의 자비가 그대에게로 밀려온다. 신은 춤추는 사람, 노래 부르면서 자기한테로 오는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불평하면서 슬픈 얼굴로 피를 흘리며 다가오는 사람은 사랑받을 수가 없다. 그들 자신도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신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자신들도 사랑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신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남들 역시 그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신은 둘째치고라도 평범한 사람들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대 자신부터가 그대를 사랑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남들도 그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대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사랑할 때, 자신에 대한 미움이 단 한점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만이 그대는 신의 자비와 사랑을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 신은 연인들의 연인이다. 그대가 춤추고 있을 때, 전혀 순교자의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 때, 신의 자비는 그대에게로 내려온다. 순교자 같은 태도야말로 가장 추한 태도이다. 절대 순교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보라 - 예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인데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순교자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을 매질해 오고 있다.
러시아에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대단히 큰 기독교 집단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희생의 상징으로 자신들의 성기(性器)를 자르곤 했다. 도대체 이 무슨 희생이란 말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려는 게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시오, 하느님! 우리는 희생의 상징으로서 우리들의 성기를 잘랐소. 우리는 이만큼 세상의 사랑과 행복에는 관심이 없소. 쾌락 따위는 단호히 물리쳤소."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단식 기도를 행하곤 했다.
신은 삶을 사랑한다. 그는 매순간 삶과 생명을 창조하고 있다. 하느님은 절대로 삶과 생명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삶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약간 바꾸고 싶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사랑하라.
끝까지 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단히 빈곤한 생각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사랑하라. 불꽃이 되어 끝까지 불타라. 단 한순간만이라도 끝까지 불타오를 때,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사랑 속에 흘러갈 때 그대는 그 즉시 신성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것을 영적인 쾌락주의라고 부른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영적 쾌락주의자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를 읽었는가? 안 읽었다면 꼭 읽어라! 예수는 틀림없이 희랍인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한히 삶을 즐기고 무한히 삶을 신뢰하며 늘 지금 이 순간에 젖어 사는 사람, 그것이 바로 희랍인 조르바이고 또 예수였을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 속에는 예수의 속성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그대의 행동을 항상 주의깊게 관찰하라. 그대 내면 속에 금욕주의자와 고행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행동을 항상 관찰하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깨어있을 때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고통과 번민 속에 슬퍼한다면 동정은 아무 쉽게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동정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이 행복하고 즐거움에 넘쳐 있다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상대방이 행복해 하는데 동정을 느낄 수는 없다. 그때 그대는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 사람이 복권에라도 당첨되었다면 그대는 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도둑까지 맞고 행운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대는 그 사람에 대해 큰 동정심을 느낀다. 왜 그런가? 어째서 슬픈 사람에 대해서는 그토록 동정적인가? 그것은 그대가 그러한 동정으로부터 모종의 쾌락을 얻기 때문이다. 그대는 폭력적이다. 그대는 상대방의 행복에 대해서 동정적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상대방의 불행에 대해서만 동정적이다. 그대는 틀림없이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얻는다.
누군가 불행에 빠졌을 때 그대는 은근히 좋아한다. 그런 일이 자신한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동정을 베풀 수가 있다. 돈 안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행복해졌을 때 그대는 춤추며 좋아해 본 일이 있는가? 지금까지 수차례 그대는 남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해주었다. 그런데 남이 행복할 때도 진정으로 함께 행복해 한 일이 있는가? 물론 흉내는 내었다. 그러나 자신은 잘 안다. 그대는 미소를 지으면서 "정말 축하해! 하늘이 도왔어!" 하고 말을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심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
그대 자신이 행복해지는 법을 알 때만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동정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그대 역시 불행한 인간이다. 그것도 형편없이 불행한 처지에 있다. 그래서 그대는 상대방이 자신보다 비교적 더 큰 불행 속에 처해 있으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가 그대보다 더 깊은 골짜기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기분이 좋아진다. 최소한 그대는 그 사람보다는 행복한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행복해 할 때 그대는 이번에는 자신이 골짜기에 있고 그 사람이 산등성이에 올라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때 그대는 질투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진실로 행복해지기 전에는 그러한 질투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의 동정심은 죄다 가짜이며 위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내면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의 불행에 대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라.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이 너무나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남의 행복에 대해 질투를 느끼는 법이 없다. 그는 그만큼 행복하고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질투를 느끼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에 그 이상이란 불가능하다.그러니 내가 어떻게 질투를 하겠는가?
사람들은 질투를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행복해져라, 그러면 질투심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행복해져라, 그러면 욕심이 사라질 것이다. 행복해져라, 그러면 아집이 사라질 것이다. 아집과 에고는 불행한 상태에서만 존재한다. 가서 그대의 삶을 살펴보라. 그대가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혹은 '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저 푸른 나무들과 붉은 꽃들말고 또 다른 신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또한 하늘을 떠가는 구름들, 잔잔한 햇살, 중천에 떠오른 달과 말없는 별들... 이것말고 또 다른 신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대의 가슴과 다른 이들의 가슴말고 또 다른 신이 있는가? 이 세상 전체, 이 삶 전체가 바로 신이며, 유일한 신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은 삶에 반대되는 신을 창조해 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삶을 포기하라. 그래야만 너희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예수는 말한다. "기도하는 것처럼 삶을 살아라!"
신을 사랑하듯이 삶을 사랑하라. 삶을 사랑하라! 삶 속으로 더욱더 깊숙이 들어가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그대는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신을 발견할 것이다. 신은 모든 심장 속에서 맥박치고 있고 모든 꽃 속에서 꽃피고 있으며 모든 돌 속에 숨어 있다. 세상의 종교들은 실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들은 가공할만큼 큰 덩치를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둘러엎어 놓았다. 모든 교회들은 지금 머리를 아래로 하고 거꾸로 서 있다. 소위 종교라 하는 모든 것도 거꾸로 서 있다. 그곳에 신은 불가능하다. 만일 신이 삶에 반대하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신은 하나의 개념, 일종의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텅 빈 낱말일 뿐이다. 그 속에는 살과 뼈가 없다. 그 속에는 피가 없다. 그 속에는 온기가 없다. 그것은 싸늘하고 추상적인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의 가장 위대한 철학가로 추대받는 파스칼이 어느날 꿈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 그 꿈이 너무나 특이했기 때문에 그는 자다 말고 일어나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수첩에 적어 놓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는 그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예 그 메시지를 자신의 코트에다 실로 박아넣었다. 평생 동안 그는 그 메시지를 코트에 박아 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길을 걸어갈 때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나 그는 자기의 코트에 박힌 그 메시지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문장이었다.
"나는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원치 않는다. 나는 다윗과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느님을 원한다."
즉 철학의 신이 아니라 생활의 신, 금식한 이기주의자들의 신이 아니라 평범함 사람들의 신을 원한다는 것이다. 야곱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하느님, 다시 말해 삶을 사랑하고 삶을 사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바로 진정한 하느님이다. 삶에 반대하는 하느님, 삶에 반대하는 사원들은 죄다 가짜다. 이 점을 명심하라. 삶 자체를 신으로 모신 사원이야말로 진정한 사원이다. 바로 그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크리슈나를 통해 붓다를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바로 그 하느님이 크리슈나를 통해 춤을 추고, 피리를 불었다. 때로 그 하느님은 시장판에도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가짜 하느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남자가 할머니를 모시고 걸작 미술 전시회를 구경갔다.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빈센트 반 고호의 진짜 그림을 본 할머니는 그림을 보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물었다.
"왜 웃으세요, 할머니? 그림이 마음에 드세요?"
"웃기지 않니? 이 복사판 그림 좀 봐라. 내가 20년 동안이나 갖고 있어 온 달력 그림을 똑같이 베꼈지 뭐니?"
실제로는 그 달력이 이 그림을 베낀 것이고 이것이 진짜배기 그림인데 할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그림의 진짜는 내 방에 이십 년 동안이나 걸려 있었단다."
가짜에 감염될 때 그대는 진짜를 놓치고 만다. 그대의 눈이 가짜로 가득차 있으면 진짜와 만났을 때 그대는 그 진짜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은 곧 삶이며 그 외의 다른 신은 없다. 신은 그대 속에, 내 속에, 우리 모두의 속안에 있으며 그것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 이 세상 만물 속에 신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라. 조약돌마다 이파리마다 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대가 목마를 때 그대 안에 있는 하느님도 목말라한다. 그리고 그대가 시원한 물을 마실 때 하느님이 그대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대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 역시 하느님인 것이다. 목말라하는 자도 하느님이고 갈증을 풀어주는 자도 하느님이며 갈증을 푸는 물도 하느님인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이다. 무엇을 포기하란 말인가? 무슨 이유 때문에 금식을 해야만 하는가? 찬양하고 춤추어라! 참된 종교는 찬양이고 축복이며, 거짓된 종교가 포기를 요구한다.
'삶의 향기 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미국 정신과 의사가 최면치료 중 알게 된 인류의 미래 (0) | 2011.06.25 |
---|---|
[스크랩] 제 2장 의식의 진화(2) (0) | 2011.06.24 |
[스크랩] 11. 열 하나 : 남의 말 안하기. (0) | 2011.06.24 |
[스크랩] `길 위의 학교` (0) | 2011.06.23 |
불성 신성의 준비물 (0) | 2011.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