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단기 연호 (檀記年號)를 부활하자

장백산-1 2011. 7. 5. 16:43

숨겨진 위대한 우리역사 - 왜곡 된 우리역사 바로 세우기


단기연호를 부활하자!


5.16군사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1년 12월 2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법률 제775호를 공포하여 단기연호를 폐지했다. 이후 모든 공문서와 출판물 등에서 단기 연호는 사라지고 서기연호가 공용연호로 자리잡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단기연호가 공식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919년(4252년) 3월 1일 기미독립 선언서 부터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선포할 때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이라고 밝힘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큰 뜻을 지닌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우리 민족은 반만년에 이루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고,

둘째 단군이래 정통성이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셋째 비록 이민족의 압제 하에서 고통받고 있으나 민족의 기상과 혼을 잃지 않고 있음을 내외에 널리 천명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일반화되었고 4281년(1948년) 정부가 수립되던 해 9월8일에 법률 제4호로 공포되고 그로부터 공용연호로서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4294년(1961년)에 이르러 단가연호는 폐지되고 이듬해 1월1일을 기해 모든 공문서, 출판물, 화폐, 달력 등에서 추방되기에 이른다. 추방 당시의 내각수반 송요찬의 설명에 따르면 단기연호 폐지의 이유는 이렇다.
첫째, 단기연호는 신화적 연혁에 근거한 것으로 독립선언서에서 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전통을 따랐던 것뿐이고,
둘째, 단기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제반분야에 걸쳐 많은 불편과 혼란이 야기됨에 따라 이를 근본적으로 시정할 필요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는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단기연호 폐지의 첫째 이유가 된 '신화적 연혁'부터 보자.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만든 장본인은 일본이다. 그들은 조선을 아예 그들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조선역사가 일본역사를 앞지를 수 없다'는 가설을 세워 놓고 어떻게 하든 이를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일제는 1910년 합방이 되자마자 11월부터 12월까지 일본헌병을 총동원하여 각종 역사서적 20여만 권을 수거해서 불태워 버렸고, 바로 역사 왜곡작업에 착수해 일본보다 오래된 상고사부분을 집중적으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위 식민사관의 이식작업이다. 특히 그들은 단군 역사가운데 개국부분만 남기고 모두 말살함으로써 시조 단군을 한 분이 1천년을 통치한 것처럼 꾸며 신화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단군이란 고대국가의 군장에 대한 칭호로 단군왕검부터 47대 단군고열가까지 치세의 역사가 분명히 나와 있다. 일본학자들은 또 삼국사기에 단군 기록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나 김부식은 철저한 사대주의자로 그가 지은 삼국사기 곳곳에 사실의 왜곡이 분명히 드러나 있어 그가 단군을 기록치 않은게 신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로 거론된 '불편과 혼란'도 이유가 되기 어렵다. 만약 그것이 그토록 혼란스럽고 불편한 일이라면 독자적 연호를 쓰고 있는 선진국들은 불편과 혼란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가까운 일본의 예만 보아도 그들의 왕이 죽고 새로 대를 이으면 불편과 혼란을 시정할 기회를 맞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연호를 작명하여 시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연호는 우리의 단기연호처럼 개국이래 계속되는 게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건원(建元)한 것이기 때문에 불편 혼란하기로 말하면 단기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단기연호를 폐지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 연호의 폐지란 흔치 않은 일이다. 예로부터 건원(建元)은 곧 자주독립의 표상 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북벌을 주장한 사람들이 먼저 들고 나온 주장도 칭제건원(황제라 칭하고 독자연호를 쓰자)이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光武)연호가 폐지되고 일본 연호인 대정(大正)으로 바뀐 것도 연호가 갖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 나와 청태조에 굴복하고 11조항의 맹서를 했는데 그 때 두 번째 조항이 바로 연호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이후부터는 명나라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청의 연호를 쓴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연호의 개폐는 새로운 주종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기연호를 없애고 서기연호만 쓴다는 뜻은 자주성을 포기하고 종속을 자처하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5.16군사정부는 서둘러 단기연호를 폐지했다. 광복을 맞아 어렵게 되찾은 연호를 13년만에 폐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의 빈약한 이유만으로 쉽게 설명되진 않는다.

하나의 시나리오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오로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1년 11월 11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방미 길에 오른 박의장은 11월 13일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상회의에서 케네디는 박정희 국가최고회의의장에게 단기연호의 폐지, 즉 서기연호만을 사용할 것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모로 궁지에 몰려있던 박의장은 케네디의 골치 아픈 부탁들을 거절하기만 할 수 없어 인사치례겸 이를 수락했다는 얘기다. 이 얘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박의장이 귀국한지 불과 보름 남짓에 단기연호가 폐지된 것을 보면 낭설은 아닌 듯 하다.

왜냐하면 당시 군사정부는 안팎의 도전과 산적한 과제 때문에 연호문제를 서둘러 손대야 할 만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군사정부의 핵심인사 가운데 이 문제를 오래도록 검토해온 인사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연호문제를 꺼낼 게재가 못되었다. 또 연호폐지의 이유를 보아도 그 문제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갖고 있었던 인사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케네디의 압력과 박의장의 무지가 연호폐지라는 치욕적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을 갖는다. 1953년에 군작전권 이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 하다.

여하튼 1961년 12월2일에 단기연호 폐지법령 선포로 하여 1962년도 1월1일부터는 공식적인 모든 인쇄물에서 단기연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물론이지만 장년의 나이에 든 사람들도 이제 단기연호는 까마득히 잊고 있다. 단군의 역사가 신화든 아니든 우리민족 뿌리의 역사는 이렇듯 우리 국민들 머릿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서력기원은 뚜렷한데 단군기원은 갈수록 잊혀지고 있다.

 

그나마도 얼마 안가선 아예 거론조차 않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왕의 연호를 여보란듯이 쓰고있는 일본인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자신들이 그토록 애써 말살하려 했던 일 가운데 하나를 한국인 스스로 하고 있는걸 보고 뭐라고 할까?

스스로 비하하면서 다른 민족의 대접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아가 민족통일과 정신문명지도국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단기연호를 부활하자. 그래서 세계 각국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알리자.

특히 작년 월드컵에서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붉은악마로 부활되지 않았는가?

이제 단기연호부터 복본하는 운동부터 시작하자! 단기연호의 부활은 국수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仙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며, 민족혼의 부활이며, 자긍심의 회복이다.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여는 첫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