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기론에서의 인과와 상의성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부처
님 교설의 기초인 연기는 대략 시간적 인과성, 시공간적 상호 연관성, 인식 주관과 객관의 상호 작용에
의한 세계 인식이라는 세 가지의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연기는 ‘피연생과(彼緣生果)’ 즉 인연(因緣)에 의하여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원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씨앗이라는 직접적 원인은 인(因)이 되고 흙, 물, 기후 등
의 제반 조건인 간접적 원인은 연(緣)이 된다. 이러한 연기설은 모두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
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생성와
소멸의 인과 관계를 기본 형식으로 한다. 씨앗과 싹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 연기론에서의 시간적 인과성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전
후 사건의 인과적 연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이 결과를 앞지를 수 없다는 과학이나 철학 일반에
서의 인과율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일반적 인과론과 다른 점은 연(緣)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이다. 인(因)만에 의하여 과(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연이 인과 화합하였을 때 과가 생긴다
는 것이다. 인만에 의하여 과가 생긴다거나 인 없이 과가 생긴다는 것은 모두 외도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인과성이라는 연기론의 첫번째 의미에서도 다음에 살피고자 하는 상호의존성의 개념이 이미 들
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수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하여 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연기론을
다른 인과론과 구분짓는 특성이다.
연기론의 두번째 의미는 상호 의존성 줄여서 상의성(相依性)인데, 이는 연기론의 핵심적 의미로서 원시
불교에서 중관 사상을 거쳐 화엄종과 천태종, 선종 등의 대승 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사상의 중핵을 이
루는 것이다. 보통의 인과론이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는 시간적 인과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비해, 상의성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을 때 또한 저것이 있으
며, 따라서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또한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서
로 의지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통의 인과론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시간적 선후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비대칭적으로 다루는 데 비해, 연기론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성에 의한 대칭적
관계까지 포함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노경》에서의 갈대 묶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세 개의 갈대가 땅에 서
려고 할 때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또한 둘
을 버려도 하나는 서지 못하듯이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된다”고 하였다. 물 분자가 물의 성질을 가
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자
연 세계에서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이 꾸려 나가는 사회 안에서도 그렇다.
내가 선생인 것은 학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들과의 인연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어서 그러한 여러
요소에 의지하여 있다. 내가 제자인 것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내가 자식인 것은 어버이에 의지하
는 것이고, 내가 남편인 것은 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며, 내가 어버이인 것은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이든 인간 세계이든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존재는 그러한 상호연관성으로 비로소 성립한
다는 것이 연기론의 상의성의 내용이다.
상의성이라는 개념에서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세 개의 갈대가 서로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갈대’ 셋이 단순히 모인 것 이상의 어떤 존재라는 점이다. ‘
하나의 갈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하나 하나를 아무리 따로 분석해 보아도 그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되는 물분자가 그 자체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물’이라는 존재나 ‘물’이라는 관념이
나 ‘물’이라는 명칭은 개개의 원자가 서로 의지한다는 인연의 성립에 의해서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존
재이고 관념이며 명칭이다.
경에서는 이를 ‘바퀴’ 등의 부분이 모여 ‘수레’를 이루게 되는 경우로 설명하고 있다. ‘바퀴’ 등의 부분이
모이는 인연과 ‘바퀴’ 등의 부분이 서로 의지하는 인연에 의하여 ‘수레’라는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수
레’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며 ‘수레’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호 의존의 관계는
생명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되는데 이른바 심장, 혈관 등이 모여 순환기관을 이루고 다시
뇌신경기관, 순환기관, 호흡기관, 소화기관 등이 모여 개체 생명을 이루는 경우는 좋은 보기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한 제 요소가 화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인연이 성립함으로써 ‘나’라는 신체와 명칭과 관념이 생겨
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개체생명은 다시 그들 사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연에 의해서만 생명현상
을 유지할 수 있으니, 개체생명이 없는 생체기관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전체 생명(온생명)이 없는 개체생명
도 또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연기론의 두번째 의미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연관성이다. |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4. 연기와 공, 화엄 (0) | 2013.06.18 |
---|---|
3.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세계 (0) | 2013.06.18 |
1, 과학 시대의 불교 (0) | 2013.06.18 |
마음공부 / 에세이 금강경 (34) (0) | 2013.06.18 |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것? (0) | 2013.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