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
3.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세계
연기론의 세번째 의미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그려지는가 하는 인식 과정에서의 연기에 관한 것이다. 즉, 연기론은 주관이 대상 세계를 어떻게 그려내는가, 즉 객관인 대상이 주관인 우리에게 와서 부딪히면서 객관의 경계가 주관의 인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감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뜰 앞의 잣나무가 움직이는지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자. 이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잣나무의 속도가 얼마인가 하는 문제가 될 터인데, 일반적으로 벡터량은 좌표변환에 의하여 그 값이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물체의 속도라는 물리량은 그 물리량을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 상태가 규정되지 않고서는 정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뜰 앞의 잣나무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구 표면을 그 기준으로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만을 감안하더라도 매 초당 30km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여야 할 잣나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 있는 것으로 단정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그 잣나무와 같이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 나무는 그곳에 절대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연관, 나와의 인연 속에서 오직 상대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이제 오감의 인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시각과 관련하여 무지개가 왜 생기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일반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굴절과 반사,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의 굴절률의 차이라는 물리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무지개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시각 기능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 기능은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조상들까지 그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 상태를 전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너무도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가 우리 눈에 나타나는 이유는 앞에서의 물리학적인 이유에 더하여, 우리가 빨간색에서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빛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7가지 이상의 색으로 보일 것이다. 또 빨간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빨간색만으로 만들어진 원호가 될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하늘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색과 무지개를 구별하지 못하여 무지개라는 현상을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시각에 관한 예가 되지만 다른 종류의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닷물이 왜 짠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바닷물에 오랜 기간동안 무기염류가 농축되고 그 중에서 염화나트륨이라는 성분이 짠맛을 내게 한다는 것만으로는 바닷물이 왜 짠지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에 더하여 우리가 염화나트륨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청각의 경우에도 가청주파수의 음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령 초음파와 같은 파동은 우리 주위에 아무리 많이 있어도 들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세계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세계로 한정되어 있다. 촉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매끄럽다고 느끼는 물질의 표면이라도 그 자체가 매끄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매끄럽게 느껴지는 표면이라도 그 표면의 원자 배열은 설악산의 바위 능선보다도 더 요철이 심하다.
이제 이상에서의 개별 감각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여 보자.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과 태양 광선, 광선의 경로에 대한 물리 법칙만으로 무지개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분석한다 하여도 그로부터 무지개의 본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 물방울은 변하지 않는 무지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방울에는 무지개의 자성이 없지만, 여러 가지 제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조성됨으로써, 즉 모든 인연이 어우러짐으로써 무지개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무지개라는 관념과 무지개라는 명칭이 생겨난다. 어떤 물질의 표면이 매끄럽다는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끄럽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인연의 어우러짐으로 우리는 그 물체를 매끄럽다고 느끼게 되고, 매끄럽다는 관념과 매끄럽다는 명칭을 얻게 된다.
감각 경험은 그 대상이 그러한 감각 경험의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 경험이 나타날 수 있게끔 우리의 신체와 그 대상, 그리고 물리법칙과 같은 그 외의 모든 요소(세계의 존재 방식)가 화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세계는 객관 세계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주관에 와서 부딪쳐 상호연관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기술하는 객관 세계의 운동 상태가 나의 운동 상태에 의하여 규정되듯이,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내 마음이 그려내는 객관의 세계 또한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나의 마음속에 그려지게 된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였다. 색도 소리도 향도 맛도 감촉도 그리고 모든 대상도 거기에 우리가 아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색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대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주관과 대상이라는 객관의 끝없는 무한한 어우러짐에 의하여 색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대상이 나에게 나타난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이러한 어우러짐, 주관과 객관 사이의 이 영원한 율동이 바로 인식 세계에서의 연기이다.
우리의 오감에 대한 과학 교과서에서의 설명은 인식 주관에 대한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건 철저히 객관주의의 입장이다. 이와 반대로 사유하는 정신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보는 버클리는 관념론의 입장에 선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지개를 보는 정신과 무지개라는 관념만이 실재한다. 이와 달리 우리의 인식에 나타나는 일체의 모든 것이 주관과 객관의 인연의 화합이라는 중도적 입장이 연기론적 시각이다. 대상으로서의 6경(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 주관으로서의 6근(根)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6근과 6경의 화합에 의하여 6식(識)이 나타난다는 것이 인식에 대한 연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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