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4. 연기와 공, 화엄

장백산-1 2013. 6. 18. 18:04

4. 연기와 공, 화엄


인과성과 상의성의 의미를 지니는 연기론은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성질 즉, 자성을 가지고 남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의 끝없는 어우러짐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물리 세계의 경우 소립자들이 모여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원자를 이루며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이 모여 생명체를 포함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 또 그런 것들이 모여 천체를 이루고 그 천체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한다. 이렇듯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양성자라도 어떤 때는 수소 원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산소 원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다 무아’, 즉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여기서 ‘아’는 범어 ‘아트만(Atman)’을 음역한 것으로서 곧 불멸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이렇듯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특수한 자성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본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無我)이다.


이렇게 무아이고 무실체적인 것들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인연의 모아짐에 의하여 나타났다가 그 인연의 흩어짐에 의하여 사라지니, 우리 우주에 변하지 않고 항상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없으므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는 공간적으로 무아요 시간적으로 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연기론의 관점이다.


이렇듯 일체의 현상과 사물이 본래 그 자리에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 요소가 화합하는 인연에 의하여 나타나므로, 거기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 본성이 공하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공(空)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며 공(空)이다.


여기서 존재자, 즉 색이 공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공이란 무아·무실체적인 것들의 인연의 어우러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란 색이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색인 것으로 보이는 무엇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적멸의 의미가 아니다. 또, 지금은 여기에 색으로서 존재하는 듯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은 무화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색이라는 현실 세계가 있고 이와 동떨어진 어떤 다른 세계를 상정하여 이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색이 공하다는 것은 모든 색이 오직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색성공(色性空)이라 한다. 무지개가 공하다는 것은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무지개가 결국은 사라지리라는 것도 아니다. 무지개가 나에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직 인연의 어우러짐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고 따라서 색 그 자체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한다. 색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이고 공의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라는 등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를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는 현실의 세계를 떠나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나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원한 본체, 상주하는 개체적 자아, 불멸의 영혼, 창조자 등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직 끝없이 전개되는 연기의 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아 본 연기와 공의 세계관 안에는 화엄의 세계관의 모든 것이 이미 다 들어 있다. 법계의 모든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다른 갈대의 도움 없이 하나의 갈대가 서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도움, 다른 존재와의 인연으로 비로소 성립되고 유지된다. 이것은 저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저것에게 빛과 생명을 주며, 저것은 이것에게 또한 빛과 생명을 준다. 무한히 중첩되는 연기의 (생명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화엄에서는 화장세계라고 부른다. 무진한 연기의 망이 펼쳐져 있음으로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준다는 것은 그 세계의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이 공하여 연기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연기가 아니라면 공도 화엄도 없고, 화엄이 아니라면 연기도 공도 없다. 그래서 연기는 곧 공이고, 연기는 곧 화엄이며, 공은 곧 화엄이다.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는 무실체적인 존재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화엄에서는 상입(相入, mutual penetration)이라고 한다. 이는 흔히 사면이 거울로 둘러 쌓여 있는 방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횃불의 모습에 비유된다. 그러면 한 거울 속에 다른 거울의 상이 들어오게 되어 무수히 많은 횃불의 상이 거울에 비추어지게 된다. 이때 한 거울에 다른 모든 거울의 상이 들어와 서로 합쳐져서 그 모든 상들이 서로 교차하지만 하나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거울에 나타나는 무수한 상들이 서로 합쳐지듯이 우리 세계의 모든 존재자가 서로 영향을 주지만,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듯이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있음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입의 예로서 뉴턴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천장에 달려 있는 하나의 전등에 적용하여 보자. 이 전등에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이 전등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등을 천장이 들어올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장이 전등을 들어올려 주고 있는 만큼 전등은 천장을 끌어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천장을 집의 벽면과 기둥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천장이 집의 벽면과 기둥을 천장이 끌어내리고 있지만 벽면과 기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 이와 같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무한히 계속하여 적용하면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걸려 있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동시에 이 사건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전 우주적 상호 참여, 전 우주적 상호 투영을 상입이라 한다.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붙어 있다는 이 간단하게 보이는 사건도 상입이라는 끝없는 연기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여기서는 작용과 반작용의 예로 상입을 살펴보았지만, 이 우주의 어느 것도 상입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상입의 예는 우주의 입자 수보다 많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있게 하는 세계는 참으로 평등한 세계이다. 이를 화엄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아보자. 불교에서 경전의 명칭은 보통 그 경전의 내용을 암시하는데,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칭으로서 ‘잡화경(雜華經)’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원래 경의 이름이 ‘대 방광 불타 잡화 엄식 경(maha?vaipulya buddha ganda vyuha sutra)’이기 때문이다. 잡화 엄식이란 여러 가지 꽃이 섞여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이다. 이때의 꽃은 물론 부처의 꽃이다. 부처의 출현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성취되니, 한량없는 부처의 마음과 한량없는 부처의 몸이 온 세상에 두루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에 두루 있으니 사실은 부처라고 특별히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이름에 그리 집착할 필요는 없다. 특히 한량없는 몸으로 온 세계에 두루하니 부처의 꽃은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래야만 비로소 장엄하게 된다는 것이 화엄의 세계 이해방식이다. 잡화 엄식이라고 해서 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이름 없는 꽃이라도 이 세상의 모든 다른 것을 있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기 때문이다. 장미나 백합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결코 장엄한 세계가 아니다. 장미와 백합에 수많은 이름 모를 꽃과 풀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비로소 장엄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잡화 엄식이고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평등이다.


천동설에서처럼 지구가 물질 세계의 기하학적 중심에 위치하여야 지구가 역사 전개의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야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은 지구와 태양만이 아니라 우리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 때문에 우주의 어느 곳에도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심이 있어야 한다면 우주의 모든 부분이 다 중심이다.


그들이 모두 중심이고 그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나는 너를 있게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며 너는 나를 있게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다.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 우주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화엄의 세계 이해 방식이다. 그것이 참으로 평등한 잡화 엄식이다.

이러한 평등의 세계를 화엄에서는 인다라망으로 상징한다. 인다라망이란 제석천궁에 걸려 있는 그물인데, 하나 하나의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 구슬의 각각은 서로 서로 빛을 비추어 각각의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첩첩이 나타난다고 한다. 무한한 수의 보배 구슬이 서로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니, 그것은 무한한 연기의 그물 속에서 어느 하나만이 빛나는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빛나는 세계, 모두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세계, 그러므로 모두가 중심이고 모두가 주인공인 세계를 상징한다.


출처 : 석가모니불
글쓴이 : 영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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