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대상을 객관화 하는 것

장백산-1 2013. 9. 29. 15:44

 

 

 

<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 >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마무리 지어 말하였다.


"큰 스승은 마음을 보라고 하면서 늘 가슴을 가르켰다. 이에 따라 늘 가슴을 보는 수행을 하였는데 하루는 스승에게 '가슴에 돌이 있다'고 말하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그 후 마음으로 가슴을 보기 시작하니 잘 되었다. 어느 듯 呼吸을 보는 가운데 마음의 窓이 뜨고 客觀化가 잘 되었다. 몸이 客觀化되고 마음도 便해졌다. 이렇게 集中이 잘 되면 몸과 마음이 分離되고 客觀化가 된다.


 그러고 보니 가슴에 돌이 있는 것 같이 답답했던 것은 마음을 보기 위하여 人爲的으로 가슴에 集中하였던

때문이었다. 原因을 알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呼吸을 볼 때에도 마음으로 보면 呼吸의 自然的 性稟을 본다.

空氣의 壓力 卽, 風大, 空氣 에너지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質問이 있었다.


"이 狀態가 平常心의 狀態인가."


"이 상태를 얻기는 쉽다. 그러나 그 마음을 오래 붙잡을 수는 없다. 瞬間的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느낌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선생님의 유도를 받으며 좌선에 들어갔는데 이날도 선생님은 이마에서부터 얼굴, 어깨 순으로 몸을 이완시키고 마음의 자세를 보게 한 다음 편안한 상태에서 호흡을 보라고 하였다. 이 단계에서 선생님은 呼吸의 느낌을 보라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그냥 호흡을 보라고만 하였는데 이 날 느낌으로 보라고 하는 순간 무척 수월하게 호흡이 客觀化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날은 風大보다 느낌으로 보는 것이 더 잘 되었다.  



"마음의 움직임은 빤냐띠(모양)다. 그러나 그 核心인 性稟을 보는 것이 빠라마타다. 움직임 가운데 地水火風 4大를 보기 시작하면 變化를 보는 것이고 變化를 보면 眞理를 보는 것이다. 性稟이 變하는 것을 보고 이 變化에 어떻게 反應하는 가를 보면 움직임에서 性稟으로, 빤야띠에서 빠라마타로 轉換하는 것이다.


  對相을 客觀化시키면 화가 나는 경우에도 그대로 보게 되고 흥분하지 않고 對할 수 있다.

적절하고 알맞게 相對를 이해하게 되고 自身도 生覺을 맞추게 된다."


 그러자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性質을 낸다."


"그래서 평소에 修行이 필요하다. 마음의 불길은 制禦하려 하면 더 거세진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억누르려하면 더 일어난다. 부처님의 경우에도 제바달다가 던진 바위가 와서 발에 부딪쳤을 때, 아프고 쑤시고

괴롭고 짜증이 났으나 알아차림으로 깨어 있어서 이 苦痛을 이겨냈다고 하셨다. 


  이런 것을 보면 부처님은 恒常 사띠를 챙기는 분이였고 우리는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는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데 두려움이 없네. 나는 煩惱가 없어 밤낮으로 괴로울 바 없네.....'라고 하셨다. 恒常 사띠를 챙기고 있으므로 煩惱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화의 불길을 아주 消滅시키기가 어렵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커지는 것이 宇宙의 法則이다. 없애려 할수록 거세어진다. 있는 그대로 認定하고 알아차리는 方法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를 억누르거나 없애려는 방법만 해왔기 때문에 보는 힘이 弱하다. 없애려 하거나 思惟하지 말고 바라지도 말며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밖의 境界에 빠지지 말고 얼른

自身이 이에 어떻게 反應하는가 만을 바라본다."


"반응하지 않으면 남들이 바보로 알 것이다."


"남들은 神經 쓰지 말라. 이것만이 確實하고 賢明한 解決策이다. 아는 사람 하나가 말썽꾸러기 子息을 두었는데 하루는 죽는다고 窓門 밖으로 뛰어내리려 하였다. 이 때 그는 子息의 行動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은 채 自身의 뛰는 가슴을 보았다고 한다."


 이 소리에 한 수행자가 말하였다.


"그러다가 정말 아이가 뛰어내리면 어떻게 하려고."


"相對가 흥분했을 때는 自身의 사띠를 챙기는 것이 最高의 도움을 주는 일이다. 같이 흥분하지 말고 便安한 波長을 보내는 것이 解決策이다. 언젠가 말했지만 世上을 떠난 故人에게도 가장 바람직한 行爲는 自身의 사띠를 챙기고 平常心을 維持하는 것이다. 이것이 最高의 慈悲行爲다. 같이 흥분하거나 슬퍼해 보아야 들뜬 마음만 傳達될 뿐이다. 내가 便安해야 相對에게 가는 利益이 더 크다. 慈悲의 波長이 가기 때문이다. 주려는 마음은 오히려 欲望의 波長이다. 平常心을 갖고 있을 때만 오직 慈悲와 사랑의 波長이 간다. 아마 이 경우 부모가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챙기고 있으면 아이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