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廻光返照에 숩겨져 있는 秘密

장백산-1 2014. 7. 10. 16:18

 

 

 

 

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반조(廻光返照)



옛말에 회광반조란 말이 있다고 한다.
빛을 돌이켜 안으로 비춘다 정도로 문자해석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더 나아가면 자기를 반성한다. 혹은 성찰한다 정도로 해석하지만
정확한것도 아니고 스스로 적용이 안되어 나하고는 무관한 문자에 머물고 만다.

모든 物質의 빛(光)은 자기자신은 비추지 못하고 자신 이외의 밖을 비춘다....


그래서 등잔밑이 어둡다고 한다.
우리 몸에 있는  肉眼의 눈도 밖을 向해서만 비추지

정작 自己 內面을 向해서는  비추지 못한다.
그래서 知覺해야 할 方向은 밖이 아니라 안쪽인 나의 몸이요 나의 내면이다.
그래서 회광(回光)은 밖을 보고 비추는 빛을 안으로 돌려 비추어 

내 몸과 나의 내면을 비추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등잔이 등잔밑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밖을 向해서 보는 시선을 안을 향해서 보는 시선으로 돌림이 廻光이다.
이것이 物性의 눈 육안(肉眼)의 눈을 영안(靈眼)으로 次元 變更하는 始作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方向을 안으로 돌림은 걸음마에 불과하다.
이제 힘을 길러야 한다. 返照를 해야 한다.
처음에는 返照가 잘 되어지지 않는다. 그동안의 習慣 固定觀念 때문이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한다. 自己의 生覺 ,말, 行動을 觀察하기 始作해야 한다.

우선 行動을 觀察해야 한다.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줄 대중잡고
안움직이면 안움직이는 줄 대중잡아야 한다.
크게는 목,팔,허리,다리등 좌우상하앞뒤로
몸의 움직임을 깨어 있는 意識으로 觀察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觀察이며 返照의 始作이다.
몸이 움직이나 안움직이나 恒常하게 봄 觀察함이 있다면
한눈이 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自己가 하는 자기 말소리를 自己 귀로 듣기 시작해야 한다.
하는 瞬間만이라도 깨어있는 意識으로 觀察하고 들어야 한다.
내 하는 말소리이지만 내 말소리도 남이 하는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말이 나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말에 主體性이 생겨 主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하고 안하려면 안하게 된다.
말이 산만함에서 나옴이 아니고 고요와 안정에서 나오게 된다.
이것이 返照 觀察의 功德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해야 한다.
더 깊은 觀察 더 깊은 返照의 始作이다.
生覺의 중얼거림, 마음의 중얼거림, 感情의 중얼거림, 느낌의 중얼거림등

모든 깊은 내면의 중얼거림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차츰 고요함(寂靜)이 찾아온다. 沈默이 찾아온다.
이 고요는 마음의 安正感이다.마음의 安樂이요 安息이다.
아무 걱정도 없고 싸움도 없고 두려움이 없는 平安한 마음이다.

이 때 비로소 진정한 返照가 可能해진다.
觀察者가 觀察者 스스로를 觀察할 수 있게 된다.
觀察者가 對相을 觀察함이 아니라
보는 자가 보이는 자이고 보이는 자가 보는 자이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虛空을 항상 보게 된다.
항상 無限한 하늘을 보게 된다.
항상 고요(寂靜)를 보게 된다.
항상 沈默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 各者에게 本來부터 깃들어 있는 內面의 하늘이다.
이 내면의 하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내면의 하늘은 無心의 하늘이다.
이 내면의 빛은 있다 없다 하는 빛이 아니다.
이 빛은 이미지가 아니다. 이 빛은 覺性의 빛이다.
깨어 있는 意識의 빛이다.
覺性이 覺性을 覺性하는 것이다.

外部로 向하는 意識의 빛의 方向을 나의 몸과  내면으로 되돌림이 廻光이요.
自己의 生覺, 말, 行動을 觀察者가 되어 觀察하다가
窮極에는 觀察하는 觀察者 自身을 보게 됨이 返照다.
봄이 봄을 보는 것이다.
보는 者와 보이는 者  보는 行爲가 다르지 않은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理論도 性理도 아니다. 實在이고 眞實이다.
이것이 合一의 눈이고 한눈의 복원이다.

廻光返照에는 이런 秘密이 숨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