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태허공(太虛空)

장백산-1 2015. 1. 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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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허공(太虛空)
“진리 역력하건만 취하고 버림에 가려 보지 못할 뿐”
2014년 02월 19일 (수) 10:14:52혜국 스님 beopbo
  
▲ 중국 3대 계단 중 하나인 마안산 계태사 대웅전. 연계향림이라 써 붙인 현판은 청나라 강희제의 친필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하야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부여(所以不如)라, 둥글기가 태허공(太虛空)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如如)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太虛空은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世界가 아닙니다. 취하고 버림만 없으면 大自由라 이름하여 太虛空이라고 한 겁니다. 둥글다고 하면 우리는 平面에 그려진 圓을 生覺합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는 圓은 存在原理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취하고 버림에 익숙해 있어서 그렇게 生覺되는 겁니다. 그러나 平面의 圓은 둥글지 않습니다. 점이 모여 線이 되고 線이 움직여 圓도 되고 네모꼴도 됩니다. 아무리 둥글다 해도 세밀한 현미경으로 보면 屈曲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이란 完全할 수가 없는 겁니다. 變해가는 過程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모양이든지 모양으로 그린 것은 生覺의 움직임입니다. 生覺이 일어나면 이미 신심명에서 말하는 圓은 아닙니다. 一切 모양은 生覺의 波長이기 때문에 生覺이 일어나기 以前 至極한 道가 完全한 圓입니다. 그 圓은 모양이 없으나 處處에 나타납니다.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一切 걸림이 없고 圓融無碍합니다. 이러한 大自由를 원동태허(圓同太虛)라고 말씀하셨습니다.

信心銘은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宇宙의 大眞理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宇宙의 大眞理, 卽

至極한 道는 圓融하여 마치 시작과 끝이 없는 太虛空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完全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宇宙의 大眞理가 우리 앞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건만 안타깝게도

취하고 버리는 分別하는 마음에 가려서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억울할 일 아닙니까? 취하고 버리는 마음에 대해서 注意 깊게 生覺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兩邊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한다고 强調했더니 “아! 中道를 바로 봐야겠구나”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벌써 取하는데 속고 있는 겁니다. 또 順逆心만 놓아버리면 된다고 하니 순역심을 버려야 한다는 마음의 病에 빠지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의 生覺 마음 意識이 取하고 버리는(捨) 二分法的 生覺에 푹 배어서 익어 있다는 事實을 아셔야 합니다. 몰록 無心하기가 그 程度로 설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 까닭으로 信心銘에서 말씀하시는 諾處는 취하거나 버리는 그 生覺 自體가 空한 줄을 바로 보라는 겁니다. 그 길은 몰록 無心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심(無心)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아 왔습니다. 無心하면 마치 古木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죽은 사람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無心을 한번만이라도 體驗해본 사람은 無心이

完全한 平和, 永遠한 自由라는 事實을 깨닫게 됩니다. 너니 나니하는 是非分別 比較判斷하는

마음인, 分別心 煩惱 妄想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實相을 바로 보는 것이 無心입니다.

여기에 큼직한 물통을 하나 가져다 놓고 물을 가득 채웁시다. 흙찌꺼기가 잔뜩 들어있는 흙탕물을요. 그런 뒤 흙탕물을 계속 휘저으면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渾濁한 흙탕물 밖에요. 이때에 휘젓는 일을 중지하고 그냥 지켜보십시오. 흙탕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입니다. 우리 몸뚱이라는 그릇 속에도 온갖 分別 煩惱 妄想이 가득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安定된

만큼 내안에 煩惱 妄想이 보이기 始作합니다. 마음工夫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흔히 生覺하기를 祈禱나 修行을 하지 않을 때는 이런 煩惱 妄想이 없었는데, 왜 기도나 수행을 시작하면 이런 妄想이 들어오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生覺 역시 取하고 버리는데 속는 겁니다. 生覺해

보십시오. 물통 속에 있는 찌꺼기가 보이는 것이지 없는 찌거기가 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몸통이라는 통속에도 煩惱 妄想이라는 찌꺼기가 안에 있었던 妄想 煩惱가 보이는 것이지

내 안에 없던 妄想 煩惱가 기도나 수행할 때만 내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순역심 놓으면 된다하니
순역심 버려야 한다는 병에

빠지는 게 중생심

취하거나 버리는 생각 자체가 空한 줄 알아야
몰록 無心하라는 의미 


煩惱 妄想이란 내 意識이 만든 내 意識 안에 있는 業입니다. 내 意識 밖에는 그 어디에도 妄想이 煩惱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탕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여야 당연한 겁니다. 내안에 있는 妄想도 마음 意識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떤 妄想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겁니다. 도적을 알아야 잡듯이 내 마음 意識안에 어떤 도적이 있는지 알아야 解決方法도 찾을 것 아닙니까?

煩惱 妄想이 일어나거든 얼른 煩惱妄想인줄 알아차리십시오. 그와 同時에 그냥 그대로 받아 드리면 됩니다. 그 말은 부디 마음 意識이 妄想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意味입니다. 煩惱 妄想이란 것은 本質이 空性이니까요. 그냥 話頭만 參究 하십시오. 이게 바로 妄想이라는 도적을 잡는

方法입니다. 眞正性을 가지고 實답게 參究해보면 스스로 이 말이 眞實로 貴한 가르침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煩惱 妄想이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게 억지로 떠맡긴 것도 아니고 밖에서 들어온 남의 것도 아니라는 事實입니다. 煩惱 妄想은 내 마음 意識이 내 마음 意識 속에 찍어놓은

幻影의 寫眞이요, 내 意識이 걸어온 내 意識 마음의 발자국입니다. 내 潛在意識 속에 내 意識

마음이 貯藏해 둔 내 意識 마음의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責任져야지 그 누구도 代身 責任져 줄 수 없습니다. 내 妄想 煩惱를을 내가 責任진다는 말은 내 自身을 내가 濟度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煩惱 妄想은 關心을 주지 말고 마음 意識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면 저절로 없어집니다. 마치 흙물통을 휘젓지 말고 가만히 놓아두면 찌꺼기가 가라앉아서 물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는 것처럼요. 그러면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때를 이르러 상당수의 修行者들이 물속에 달을 取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 달이구나”하는 瞬間 흙탕물이 다시 흐려지면서 달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이면 取하고 안보이면 버리는 양유취사(良由取捨)하기 때문에 소이불여(所以不如)인 겁니다. 여기에서 제대로 노력하는 수행자라면 물 통속에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노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물통그릇 自體를 깨어버립니다. 本來 모습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거죠. 그 瞬間 천강유수 천강월(千江有水 千江月)이라는 當然한 事實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물 통속에 있는 달을 取하거나 버릴 일이 없어지게 되는 거죠. 물통그릇이 있는 상태에서 물통그릇이 깨어져 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깨달은 世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원동태허(圓同太虛) 가 된 겁니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무흠무여(無欠無餘)인 게지요. 無心三昧인 겁니다.

 

그래서 3조(祖) 승찬 스님께서는 取하고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生死輪廻하는 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막수유연(莫遂有緣)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고 노파심을 이어갑니다. 있는 因緣도 따르지 말고 空함에도 머물지 말라, 世間法에도 머물지 말고 涅槃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因緣이란 모든 世間法을 말합니다. 人間關係는 물론이요, 山河大地 頭頭物物 모양 있는

모든 因緣들입니다. 그러나 因緣이라는 世間의 一切法, 世界도 또한 因緣法에 依해서 變해나가는 過程일 뿐 固定된 實體가 없는 無常한 것들인 겁니다. 부처하면 우리는 바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單語를 分析해 보면 ‘ㅂ 아래 ㅜ’, ‘ㅊ 옆에 ㅓ’라는 글자가 모여서 因緣이 되어 부처라는 單語가 나왔을 뿐입니다. ㅂ에도 ㅊ에도 ㅜ에도 ㅓ에도 그 어디에도 부처라는 主體性, 本性이 없습니다. 그 각각의 글자에는 아무런 自體 性稟이 없는데 그것들이 모인 因緣에 依해서 부처라는 因緣性을 보여주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 世界를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도 합니다. 글자를 그렇게 배열하면 부처라고 하자는 人間들 間의 約束, 부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 意識은 부처하면 바로 取하게 되고 마구니, 惡魔하면 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意識 마음의 病弊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世間法에도 따르지 말고 出世間法에도 머물지 말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取하지도 않고 버림도 없는 공인(空忍), 卽 空함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스승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直接 體驗하여 確實하게 깨닫고 나서 自由自在한 道人이 아니면 이렇게 가르쳐 주시기가 어렵습니다. 幻想인 生死心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當然하지만 涅槃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의 所重함을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語錄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중국의 선사들만 그러신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스승들도 한 결 같이 그렇게 보여주시고 그렇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太陽光明과 같은 가르침이 아무리 우리 앞을 비추고 있어도 등을 돌리고 있으면 生死의 輪廻 속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밤 우리 나라는 캄캄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도 太陽은 밝게 비추고 있었거든요. 太陽은 그 時間에 어디로 숨은 일도 없고 빛을 줄인 일도 없이 환한 대낮인데 캄캄하게 어두운 原因이 무엇입니까?

이 地球가 自轉함으로 太陽에 등을 돌렸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 光明도 등을 돌렸느냐, 아니 돌렸느냐의 差異일 뿐 마음의 光明 自體는 털끝만큼도 變한 일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世間法과 出世間法, 生死와 涅槃, 明暗, 晝夜, 大小, 長短, 美醜, 始終, 去來, 主客, 善惡,

貧富, 高低, 陰陽, 健病, 順逆, 智愚 등등의 二元性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太陽에게는 밝음과

어두움이란 本來 없듯이 이 世上에는 生과 死가 本來 없다는 信心銘 가르침은 人類를 救할 수 있는 보배입니다.

 

그 뒤를 이어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고 나옵니다.

한 가지를 올바로 지니면 저절로 사라져 다하리라는 말입니다. 이 한 가지가 문제입니다.

至極한 道라고 하기도 하고 中道라고 해도 좋지만 信心銘에서 말하는 한 가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인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生覺 일어나기 以前자리

兩邊을 超越한 中道, 무엇이라고 해도 그 한 가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디 요원한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극히 가까운 내 마음, 내가 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世上을 바로 잡게 해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답니다. 몇 년을 열성적으로 기도를 했는데도 이 世上을 바로 잡기는커녕 自己 家族하나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부디 내 家族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달라고 기도가 바뀌었답니다. 다시 몇 년간 열심히 했습니다. 그사이 이 사람이 너무 지쳐버리고 몸은 늙어가고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이제 모든 慾心 다 내려놓고 제발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길들이게 해달라고 기도 방법을 바꾸게 된 겁니다.

 

그때에야 산신령이 앞에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야, 이 사람아. 내 마음 하나만 마음대로 잘 다루면 家族뿐 아니라 이 世上도 모두 뜻대로 되는데 자네는 기도를 거꾸로 했네. 원래 뒤집어진 일이 없는 世上을 바로 잡겠다는 기도나 各者 自己 갈 길이 있는 家族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기도를 했으니 애당초부터 이루어져선 안 되는 기도였네. 자네가 만약 처음부터 내 마음하나

바로 닦겠다고 기도했으면 충분히 성취할 수 있었는데 이제 너무 늦었네.”

늦게 철이 들어서, 철들자 늙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恨스러운 일인가. 事實이 그렇습니다.

일종평회(一種平懷)가 안 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 될 수가 없는 거죠.

 

 

[1233호 / 2014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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