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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蘊과 想蘊無我 - 五蘊(5)

장백산-1 2015. 3. 1. 19:42

 

 

 

 

 

 

   想蘊과 想蘊無我 - 五蘊(5)|붓다수업 교리강좌         

 

 

 

 

 

(3) 상온과 상온무아

 

受蘊과 想蘊의 相互 피드백(되먹임질)

 

만약에 이처럼 固定된 實體로써의 ‘느낌’이 定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왜 좋거나 싫은 느낌을 느끼는 것일까?

싫은 느낌을 느끼며 불행해 하고, 좋은 느낌을 느끼며 幸福해 하는 것일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좋은 느낌도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事實을 안다면  그 좋은 느낌에 얽매이고 執着하며 愛着할 必要가 없을 것이고, 싫은 느낌도

固定된 實體가 아님을 안다면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모든 對相에 대해 特定 느낌을 投映시키고 介入시킨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그 對相 自體에 實體的인 ‘싫은’ 어떤 고정된 것이 있어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다른 어떤 對相에 比해서 싫은 것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은 ‘比較’에서

始作된다.

 

연봉 5,000만원은 사람에 따라 싫은 것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5천만 원에 幸福해 하는 사람도 있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1억원의 연봉을 받는다면 반 밖에

못 받는 나의 處地가 나를 괴롭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남들을 다 3천만 원 밖에 못 받는데 나만 5천만 원을 받는

다면 5천만 원으로 인해 幸福한 느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제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들이 다 6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5천만 원 받는 것 보다, 차라리 남들이 다 3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4천만 원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比較하는 마음이 다음에 工夫하게 될 상온(想蘊)의 作用이다. 受蘊과 想蘊은 感性과 理性, 感情과 思惟,

感覺的인 것과 理知的인 것으로써 늘 함께 作用하며 서로가 서로를 피드백하며 堅固하게 만든다. 느낌으로 因해

生覺이 堅固해지고, 特定 方式으로 堅固해진 生覺 見解나 思惟로 因해 그 對相은 더욱 堅固한 느낌을 부여받는다.

 

어떤 사람의 行動에 感動을 받아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生覺과 槪念을

潛在意識에 貯藏해 둘 것이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行한 어떤 特定 行動에 대해 나를

위해서 한 좋은 行動일 것이라고 生覺하기 쉬울 것이다. 反對로 겉으로는 좋은 척하지만 利己的인 行動을

한 사람을 만나 나쁜 느낌을 받았다면, 想蘊은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사람’으로 槪念 지어 潛在意識에 貯藏할 

것이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 그 사람의 行動을 보고 否定的으로 解釋할 여지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想蘊이 槪念化하고 思惟하고 比較, 分別, 判斷하는 것은 受蘊의 感覺的인 情報에 依持한다.

느껴지는 모든 對相에 대해 想蘊이 比較 分別 判斷하고 思惟하며 槪念化하는 것이 아니라, 不苦不樂受처럼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버려지는 느낌들을 除外한 鮮明하고도 强力한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들에

限해 받아들여 槪念化하고 思惟하는 것이다.

 

이처럼 受蘊의 基礎資料에 依해 想蘊을 쌓게 되고, 다시 想蘊의 作用을 通해 더 受蘊이 增輻되고 擴張되면서

相互 피드백하면서 마음의 作用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十八界가 촉할 때 受想思라는 마음의 作用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처럼 受蘊과 想蘊은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따로 일어나기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 되먹임 고리를 連結시키며 受蘊은 想蘊을 돕고, 想蘊은 受蘊을

도우면서 마음의 實體性을 더욱 强化시킨다. 想蘊의 도움을 받아 受蘊이 ‘내 느낌’이라고 여기고, 受蘊의 도움을

받아 想蘊이 ‘내 生覺’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想蘊의 意味

 

위에서 본 것처럼 마음의 重要한 두 가지 機能이 바로 受蘊과 想蘊이다. 受蘊이 感性이라면 想蘊은 理性이고,

受蘊이 感覺的이며 感性的이라면 想蘊은 知性的이고 理知的이다. 쉽게 表現하면 受蘊은 느낌 想蘊은 生覺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五蘊을 工夫할 때는 이렇게 느낌과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하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想蘊은 單純히 生覺이나 思惟, 理性과 知性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런 槪念들을 抱括하고는

있지만 嚴密히 理解한다면, 表象作用이라는 用語가 가장 適節하다. 표상(表象)作用의 사전적 의미는

‘抽象的인 事物이나 槪念에 相對하여 그것을 想起시키거나 聯想시키는 構體的인 事物로 나타내는 일,

드러내어 나타내다’라고 나와 있다. 어떤 對相을 보고 過去에 貯藏되어 있던 經驗과 知識들의 D/B를

記憶해 내 눈앞의 對相에 대해 이름과 特徵, 모습, 槪念 등을 說明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表象作用이다.

 

眼耳鼻舌身意가 色聲香味觸法을 接觸할 때 受想思가 生긴다고 했는데, 눈을 통해 사람을 보고 ‘김 아무개’

라고 아는 것도 表象作用이며, 꽃을 보고 ‘장미꽃’, ‘할미꽃’ 이라고 알 수 있는 것도 표상작용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가수의 어떤 제목의 노래’라고 아는 것도, 코로 냄새를 맡으며 ‘된장찌개

냄새’인지, ‘카레 냄새’인지를 아는 것, 혀로 맛보며 ‘짠맛인지 단맛인지’를 아는 것, 몸으로 촉감을 느끼면서

 ‘거친지 부드러운지’를 아는 것 등이 모두 표상작용이다.

 

理解를 돕기 위해 다른 말로 表現한다면, 生覺을 構想하는 記憶의 聯想作用이라고 할 수도 있다.

生覺이 일어나려면 過去의 모든 記憶들이 組合되고, 聯想되어져야 한다. 그 수많은 記憶들은 時間 順序대로

入力되어 있다가 차레대로 順序대로 生覺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맥락도 없이 마구잡이로 生覺이라는

水面 위로 올라온다. 바로 그렇게 生覺이라는 水面위로 올라오는 過去의 記憶들, 表象들을 構想하고 聯想해내어

이름 붙이고 槪念 짓는 作用을 想蘊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미 過去에 보고 듣고 經驗해 아는 記憶과 知識 등을 가지고 現在 눈앞에 있는 對相으로 드러내서

나타내는 作用이 바로 表象作用이며 想蘊의 作用이다. 表象作用이 일어나려면 過去의 經驗을 通해 槪念을

만들어 놓은 知識과 言語的  槪念들의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수많은 情報와 知識, 槪念들을

比較 分釋하고 總括하여 現在 눈앞에 보이는 對相에 對해 理性的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넓게

보면 比較, 判斷, 抽理, 總括, 槪念化하는 모든 理性的 思惟나 生覺들을 想蘊이라고 할 수 있다.

 

국화꽃은 그 품종이 2,000여 가지가 넘으며, 국화과에는 2만여 종과 940여 속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꽃을 보고 자세히 국화꽃 품종 중에 어느 품종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국화꽃’의 일종이라고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表象作用을 통해서다. 그것이 국화꽃인지를 알려면, 먼저 그 꽃을 다른 꽃들과

비교, 판단, 대조해 봄으로써 국화꽃과 비슷한 부류에 들어 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만약 국화꽃에

대한 槪念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비슷한 꽃을 보더라도 그냥 ‘꽃’이라고만 할 뿐, 국화꽃의 일종인지

조차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의 表象 속에는 국화꽃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比較와 判斷을 通해서 국화꽃이라고 알고 있었던 槪念들을 中心으로 이 꽃이 그 前에 알고 있던

국화꽃과 비슷한지 아닌지를 判斷해 국화꽃과 비슷한 屬性이나 모습들을 추려낸다. 이를 抽象作用이라고

하는데, 抽象이란 ‘個別 事物의 共通된 屬性이나 關係性 따위를 抽出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抽象作用과 함께 抽理作用도 일어난다. 抽理는 ‘알고 있던 事實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事實을 미루어

生覺하는 것’이다. 이렇게 抽象, 抽理作用을 通해 국화꽃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結論的으로 綜合,

總括한다. 過去의 知識이나 表象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構體的으로 국화과 엉겅퀴屬의 큰엉겅퀴라고

總括的인 結論을 導出해 낼 것이다.

 

혹은 그 이름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어서 식물백과를 살펴봄으로써 結局 이 꽃은 국화과의 취나물屬의

각시취라고 밝혀지게 되었다면, 이는 새로운 表象을 槪念化시켜 알게 된 것이다. 이 또한 表象作用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表象作用과 比較, 分別, 判斷의 作用, 抽象과 抽理, 綜合과 總括, 새로운 表象과 槪念化

등이 모두 想蘊의 범주에 포함된다. 比較, 分別, 判斷, 抽理, 總括, 槪念化 등을 通해 現在 내 앞에 있는

對相을 知覺하는 것이기에 想蘊을 知覺作用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知覺作用, 表象作用을 通해 나아가

보다 깊은 理念, 哲學, 科學 등 多樣한 思想을 擴張시켜 硏究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想蘊은 꼭 物質的 對相만을 思惟의 對相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善惡, 미추(美醜), 장단(長短),

행복과 불행, 지혜와 자비, 평화와 자유 등 精神的인 理性的 言語槪念들 또한 想蘊의 對相이 된다. 어떤

行爲를 보고 善行인지 惡行인지를 比較, 對照, 總括, 抽理를 通해 理性的으로 判斷하고 思惟하는 것이다.

 

人間이 動物과 다른 점이 바로 이 想蘊일 것이다. 色蘊, 受蘊은 動物들에게도 있을 수 있지만,

想蘊, 卽 理性的으로 思惟하고 槪念 짓는 活動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能力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너무 복잡하고 오히려 더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이러한 모든 상온의 작용을 통틀어 개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 ‘사유’ 혹은 ‘이성’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표상작용이지만, 개괄적으로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想蘊도 마찬가지로 內部의 想蘊과 外部의 想蘊이 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사유와 생각, 표상작용 등을

五取蘊으로써 內部의 想蘊이라고 하며, 그 想蘊이 일어날 때 外部의 對相에 表象이 實體的으로 存在한다고

여기는 것이 外部의 想蘊이다. 卽, 눈앞의 꽃을 보고 노란색 국화꽃이라고 知覺할 때, 事實은 過去에 배우고

槪念지어 놓았던 노랗다는 言語的 槪念과 국화꽃이라는 知識과 情報들을 끄집어 내어 比較, 抽象해 봄으로써

總括的으로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表象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外部의 꽃을 보고 그런 槪念이 일어난

것을 보고, 外部에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固定된 實體的 存在가 있다고 錯覺하는 것이다.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固定된 想蘊이 내 밖에 實際로 存在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 바깥에 노란색 국화꽃이 實際로 存在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노란색 국화꽃’으로 知覺했다고 믿는 것이다.

 

 

 

 

 

想蘊無我

 

그렇다면 想蘊은 언제나 固定되어 있는 實體的인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表象, 槪念化의 精神作用은

過去 記憶된 情報의 데이터베이스를 比較, 分別, 抽理, 總括함으로써 드러내고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實際 내 안에 ‘生覺하는 나’가 있거나, ‘思惟하는 나’가 있거나, ‘知覺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意識은 눈앞의 對相을 보면 언제나 ‘이것은 국화꽃이고, 저것은 소나무고, 저것은 자동차고, 이 사람은

아무개다’라고 表象지어서 알기 때문에 내 안에 그러한 表象作用, 槪念作用, 知覺作用이 固定되게 實存하는

것으로 錯覺한 것이다.

 

아마도 過去에 알게 된 情報나 知識들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갈 것이다. 똑같이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새롭게 아이보리색이라는 言語的 槪念을 배우게 되었다면,

내 안의 表象 데이터베이스에는 아이보리색이 하나 추가된다. 그 前에는 비슷한 색을 모두 노란색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부터는 노란색과 아이보리색을 區分하게 될 것이다. 過去에는 무슨 色이냐고 했을 때

‘노란색’이라고 말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이보리색’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想蘊은 固定되게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實在가 아니라 因緣 따라 끊임없이 變化해 가는 것이다.

 

理性的으로 思惟 生覺하고 槪念 짓는 能力을 지닌 實體가 내 안에 存在한다고 여기는 錯覺이 바로 想蘊이다.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를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實在라고 여기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生覺한다.

고로 나는 存在한다’라고 말했던 것 또한, 想蘊을 보고 實體的인 ‘나’가 存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想蘊은 無我다. ‘생각하는 나’가 實際로 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想蘊은 단지

十八界가 接觸하는 因緣 따라 생겨난 因緣假合의 緣起的 存在, 現象일 뿐인 것이다.

 

내 안에 想蘊이라는 思惟하고 生覺하는 精神作用이 實際한다고 여기는 錯覺처럼, 내 바깥 世上에도

生覺의 對相, 表象의 對相, 思惟의 對相들이 실질적으로 실존한다고 여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事實은 바깥 世界에 그런 言語的 槪念을 가진 思惟 生覺의 對相들이 實際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精神的인 思惟의 對相도 마찬가지다. 善惡, 正義사랑, 길고 짧음, 굵고 가늠, 아름답고 추함 등이 實在로써

存在한다고 여기지만, 그런 것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낸 槪念的 假說일 뿐, 實體的으로 固定되게 實在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진짜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實體가 미리 定해져

있어서 우리가 단지 그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 문화들, 나라들에서

서로 다르게 判斷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醜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想蘊을 통해 思惟와 生覺, 나아가 思想과 理念과 哲學 등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理念과 思想 등이 實體的 眞實이라고 여기며, 사로잡히고 執着함으로써 나와 다른 生覺을 가진

사람들과 다투고 論爭을 벌인다. 그러나 想蘊無我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思惟와 生覺, 思想과 理念

等은 絶對的인 眞實이 아니다. 내 生覺만이, 내 宗敎와 理念만이 絶對的으로 옳다고 여기며 執着하고,

他人의 生角과 思想, 理念은 絶對的으로 틀렸다고 여김으로써 심지어 理念, 宗敎 戰爭까지 일어나지 않는가.

保守와 進步의 갈등, 宗敎的 갈등, 理念的 갈등, 人種的 갈등, 地域的 갈등 등 이 모든 갈등들은 사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特定된 生覺, 思考, 思想, 理念들만을 ‘絶對的으로 옳다’고 여기는 執着에서 생기는 갈등이다.

그 執着은 想蘊이 固定된 實體가 아니며, 執着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 임을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想蘊이 無我임을 안다면 社會的인 모든 갈등이 解消되고, 對立을 넘어 和合과 調和로써

서로가 서로를 受容하고 容納하며 활짝 열린 精神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平和와 大寂靜의 無爭社會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相을  打破하라

 

이처럼 槪念作用, 表象作用인 想蘊은 固定된 實體가 아닌 非實體的인 것이지만, 實體的인 것으로 錯覺하여

想蘊을 ‘나’라고 生覺함으로써, 많은 執着과 欲望, 煩惱 妄想를 일으킨다. 내 안에는 生覺하고 思惟하는

固定된 實體의 ‘나’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나’에 執着하고, 내 바깥에는 生覺되는 對相이 存在한다고

여김으로써 ‘世界’에 執着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相은 打破해야 할 것으로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다. 想蘊은 말 그대로 虛妄한 相으로써,

우리 意識이 만들어낸 虛構的이고 幻想的인 固定된 實體가 아닌 단지 槪念作用, 表象作用일 뿐이므로,

想蘊, 相 거기에 얽매여 그것이 實在한다고 執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槪念 짓고 表象作用을 일으키며, 比較, 分別, 總括, 思惟하는 作用을 一切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必要할 때는 當然히 表象作用을 일으키고 生覺하고 思惟함으로써 人生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重要한

事實은, 그렇게 生覺과 思惟를 하며 삶을 살아갈지라도, 生覺 思惟  그것이 本質的으로는 實體가 아니고

無我이므로 삶에서 일으켜 쓰는 그 生覺과 思惟 어디에도 전혀 執着할 必要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比較가 必要할 때는 比較하고 對照가 필요할 땐 對照해야 하겠지만, 남들과의 比較와 對照 속에서 劣等感과

優越感이라는 兩 極端의 感情이 생겨나고, 그로 因해 괴로움이 생겨남을 洞察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과

比較했을 때 가난하다고 해서 궁핍한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比較하는

生覺에 執着함으로써 남들보다 가난하다고 生覺되면 괴롭다고 結論짓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相을 打破함으로써, 卽, 想蘊이 無我인 줄 알아  一切 執着하지 않음으로써 남들과의 比較에서 오는

열등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抽象과 抽理도 마찬가지다. 實際 있지도 않은데 있는 것으로 誤認하여 抽測하고 抽理하며 抽象함으로써

우리 머릿 속에서 무수한 괴로운 일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회사 사람 두 명이 모여서 내 辱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어쩌면 단순히 가벼운 마음으로 辱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辱을 들은 사람은 그 狀況에

抽測과 抽象을 가중시킨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모두들 모이면 이렇게 내 뒤에서 나를 辱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를 회사에서

퇴출시키려는 걸지도 몰라. 난 다음 승진에서 분명히 떨어지고 말거야! 그러면 자식과 아내 얼굴은 어떻게

보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이 나이에 나를 받아줄 회사는 아마도 없을거야. 난 失敗한 人生이야.’

 

이런 式으로 生覺은 無數한 抽測과 抽論과 想像의 나래를 펴며, 전혀 現實的이지 않은, 전혀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으며 소모적이기만 한, 더욱이 나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이런 抽測 속에서 生覺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式으로 想蘊을 끊임없이 擴大 再生産해 냄으로써 自身 스스로를 困境에 빠뜨려서, 괴롭힌다.

生覺이라는 것은 이런 式으로 언제나 뜬금없고, 맥락도 없으며, 말도 안 되게 擴大解釋을 하는 特技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虛妄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是非, 分別, 比較, 判斷, 抽象, 抽理, 表象과 槪念化 등을 通해 綜合的으로 現實을 總括하는 生覺 思惟

또한 想蘊의 役割이다. 그러나 比較와 抽象 등이 無常하고 無我인 非實體的인 것들이다 보니 그  情報들을

基礎로 해서 綜合하고 總括하는 思惟作用 또한 ‘있는 그대로의 實在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된 情報를 가지고 잘못된 綜合, 總括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實在가 아닌 思惟的 結論을

實在라고 여기고 錯覺함으로써 마음이 괴로움에 빠진다.

 

이처럼 想蘊은 非實體的인 것으로써, 전혀 執着해서도 안되고, 實在라고 錯覺해서도 안된다.

相을 打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大乘佛敎의 金剛經에서는 打破해야 할 相으로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거론하고 있다. 구마라집의 金剛經에서는 상(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모두 상(想)으로 번역하고 있다. 卽, 結果的으로 ‘生覺하는 나’, ‘思惟하는 나’,

‘槪念 짓고 表象 짓는 나’를 假定함으로써 이 안에 ‘나’가 있다는 我相에 사로잡히게 되고, ‘生覺의 對相’이

내 밖에 있다는 相/想에 사로잡힘으로써 人相, 衆生相, 壽者相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金剛經에서는 相/想의 打破야말로 空의 智慧, 般若 智慧를 깨닫는 매우 중요한 수행임을 일깨우고 있듯이,

想蘊을 實體化하여 그것에 사로잡혀 執着하는 것이야말로 打破해야 할 重要한 工夫의 過程인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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