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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고 나를 확장하는 방법

장백산-1 2015. 3. 4. 03:38

 

 

 

 


마음을 열고 나를 확장하는 방법 [법문 녹취록]

강의듣기/ 녹취록 2014/09/09 12:03 Posted by 법상
 

 

반갑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中點的으로 法을 說해 주셨던 가르침이 無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나라는 存在는 이 몸, 肉身에 限定된 存在라고 錯覺을 하고  이 마음, 이 生覺에 限定된

存在라고 錯覺을 하면서 이 世上을 삽니다. 그래서 自己能力을 限定 짓고 있어요.

 

나는 요 정도의 能力만 있는 사람이다. 내 能力은 이 限度고 나는 이 限度의 實力만을 가지고 있고

이 程度의 富와 才能과  能力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相對方은 어떻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산단 말이죠. 그래서 누구나 自己 自身을 이렇게 縮小시켜서 限定 짓고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데 無我라는 立場에서 본다면 無我란 '本來 나'라는 自我에 固定 不變하는 實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 정도뿐이야, 뭐 이 정도만을 갖춘 사람이 나야, 이 肉身이 나야,  내 IQ, EQ 이런 것들이 나야' 라고

生覺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本來 나'의 實體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 大乘佛敎에 오면 '야, 그렇다면 無我인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이 無我를 어떤 用語로 사용해야 좋지 않을까? 그래야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方便으로 이 無我를 大我다, 참나다, 本來面目이다 뭐 이런 用語로 說明을 합니다.
 

大我 참나 本來面目 그 말이 뭐냐하면, 大我라는게 뭐냐하면 이 몸에 갇혀있는 이 '小我的인 나'를 넘어서는

無限히 擴張된 '本來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宇宙法界와 둘이 아닌 그야말로 뭐라고 말로 表現할 수도 없는

그런 '本來 나'의 無限한 可能性, 法身부처가 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 이런 '本來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本來 나'의 無限한 可能性 그것을  2,500年 前에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런 可能性이 있었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겠지 막연하게 이렇게 生覺만 하고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無我를 實踐하고, 내가 어떻게 나라는 어떤 狹小한, 縮小된

小我的인 나라는 것에서 놓여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構體的으로 現實 속에서 實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現實속 實踐的인 側面에서 몇가지 科學에서 證明한 내용을 잠깐 먼저 말씀드리면

世界的인 精神醫學者라는 스텐리블록이라는 博士는 나를 넓히면 넓힐 수록 苦痛이 저절로

줄어드는 現象을 發見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頭痛이 왔어요.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 그런 頭痛이 있는 사람에게 頭痛을 가만히 觀察하라고 한 다음에

 '지금 네 머리가 요만한 머리가 아니라 지름 1미터로 擴張됐다고 想像을 해봐라.' 그렇게 想像을 시키는

거에요.그랬더니 조금  두통이 減少해요. ' 네 머리가 이제는 이 法堂만큼 커졌다고 想像을 해봐라.'

그 다음에 이 學校만큼 커졌다고 想像을 해보고 이제 점점 더 머리가 커졌다라고 擴張되었다고 想像을

시키는 겁니다.그렇게 想像을 한 것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頭痛이 깨끗하게 사라진다라는 事實을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됐다는 겁니다. 즉 내 腦는 내 머리는  지금 이 몸 여기에 限定되었다라고

生覺할 때는 여기가 아팠는데 '나는 이 肉身 여기에 限定된 存在가 아니야. 나는 無限히 擴張되는 存在야'

라고 生覺을 바꿨을 뿐인데 그 頭痛이 깨끗하게 사라지게 되었다는 事實을 發見한 겁니다. 
 

또 러시아 심리학자 블라디미르 라이코프라는 博士는  렘브란트라는 유럽의 유명한 미술가가 있었는데요.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다음에 이 사람은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이죠. 이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나는 렘블란트라고 想像을 하도록 시켰더니 그 사람이 렘브란트 뺨치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죠.

 

卽, 우리는 그런 美術 才能이 없는 보통사람이라고 一般的으로 生覺을 하고 삽니다.

어쨋든 최면을 걸었든  想像을 했든 '나는 그러한 能力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生覺하고 사는데

이렇게 최면을 걸었더니 그 사람이 나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이 結果는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어떤 原理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내 몸과 마음에 制限되고 限定되어 있는 意識과 마음, 能力만을 가지고 世上을 산다고 여기지만

우리라는 존재는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더 큰 힘과 可能性과 能力과 智慧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렇게 비좁은 나, 내 肉身과 마음에 갇혀있다라는 生覺만 탁~터서 擴張해 버리면,

내려놓아 버리면 또 다른 無限한 可能性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죠.

 

라이코프 效果라고 해서 自身이 이미 오래 前에 죽은 天才美術家라고 想像을 하면, 想像만을 했을 뿐인데

죽은 그 천재가 가지고 있던 天才的인 能力이 나에게도 온다고 그럽니다. 이것을 라이코프 效果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大學生들이 試驗보기 前에 '나는 대학교수다' 이렇게 想像만 해도 성적이 오른다는 거죠.
 

또 어떤 대학교에서는 東洋人  西洋人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교수님이 시험보기 前에

오늘 볼 이 시험은 傳統的으로는 동양사람들이 성적을 월등하게 잘 받는다 서양인들에 비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시험을 봤더니 실제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양인 학생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다라고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 想像이 내 現實 삶으로

드러난다.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生覺과 想像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도

이러한 想像들이 現實 삶으로 일어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무얼 의미하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槪念에, 나라는 어떤 몸과 마음이라는 觀念, 生覺, 妄想속에 나를 制限하고 限定해

놓았을 때는 그 限度밖에 能力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나라는 틀, 굴레를 깨고 탁~터버렸을 때

無限한 可能性과 能力이 내 現實 삶으로 드러날 수가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無我라는 槪念 自體를 '내가 없다' 이렇게만 우리가 理解할 것이 아니라, 無我는 나를 肉身과 마음에

限定시켜서 가두지 않았을 때 나를 활짝 열었을 때 無限히 擴張되는 겁니다. 사실은 자신의 能力이라는

말도 일종의 自己 規定입니다.自己 限定입니다 自己 스스로 내 能力을 制限시키는 대로 限定되는 겁니다.
 

모든 건 三界唯心이고 萬法唯識이라고 이 世上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서 내 能力이 어떻다라고 스스로 規定하는 대로 그런 制限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러한 可能性에 도전하지 않을 거야. 나는 요 정도 밖에 안되니까 요 정도만 하면 돼.

'라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 정도의 經驗에 經驗値로만 가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두게되면 우리는

그런 程度뿐인 能力의 사람밖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라는 存在를 활짝 열어서 宇宙法界 全切에 있는 大我라고하는 佛性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둘이 아니게 바뀔 수 있느냐. 卽, 無限한 可能性의 나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게 중요한

관건이겠죠? 나를 肉身과 마음에 가두지 않고 나를 擴張하고 활짝 열어놓는 方法. 몇 가지 方法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우선 自然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自然과 交感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즉, 우리는 평소에 일상적일 때는 自然이 變化되는 모습을 가슴에 제대로 잘 못 담고 살아요.

왜냐하면 할 일이 많고 바쁘고 精神없고 하니까 내 눈앞에 自然인 꽃 한송이가 아름답게 있다 할지라도

그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지 못 할 만큼 가슴을 열지 못하고 사는 거지요.

가슴이 열려있으면 그 꽃이 보일 텐데 보질 못하고 사는 겁니다.

 

호국사 법당 앞에 저 꽃잔디가 작년에 비해 올해 더 많이 퍼져서 자라고 있더라구요.

또 이 숲이 지난 달과 지금은 놀랍게 다름니다. 지금의 山을 보면 완전 초록도 아닌 아주 연초록의,

어떤 초록의 生命들이 막 올라와서 그 어릴 때 보다도 아주 그 山의 빛깔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침 나절이나 저녁 나절에 그 山을  숲을 바라보면요 정말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햇볕에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어떤 놀라운 빛깔들을 가슴 속에 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自然을 가슴에 담기 시작할 때 우리 가슴이 無限히 擴張되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콘크리트 建物 속에서 일하다가 직장상사 밑에 사람, 또 아파트 안에서  갖혀 있을 때는

자식들에게 화도 많이 내고 직장 사람들에게도 막 짜증도 내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에 가서 登山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내는 거 쉽게 보셨습니까? 짜증 잘 안내죠?

登山하는 사람들은 그냥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단 말이죠.

특히나 저 地利山을 가면 더 그래요. 왜냐하면 거기는 2박3일, 3박 4일 종주를 하다보니까

아예 世俗의 生覺을 탁 내려놓고 난 어차피 2,3일 동안 山에 있을 거야.

그래서 나라는 生覺을 탁 내려놓고 있다보니까 가슴이 활짝 열립니다.

 

自然과 하나가 되면 가슴이 열려 있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너도 나도, 너다 나다라는 分別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친구같이 반갑게 느껴지고 그냥 인사하고 싶고 누가 시켜서 그러지 않아도

아마 여기서는 시켜도 잘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自然속에 가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가슴이 열린다.

우리가 가슴이 닫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나라는 거에 縮小가 되면 우리는 항상 가슴이 열렸다 닫혔다

하지 않습니까?가슴이 딱 닫힐 때는 부하직원이나, 자식 중에 누가 막 떠들고 말을 할 때 그것조차 듣기

싫어가지고 좀 조용히 못하냐고 소리지르고 자식들에게도 소리 지르고 그렇지만 가슴이 확 열려서 뭔가

기쁨에 넘치고 이럴 때는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이 열린단 말이죠.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미국에서 어떤 초등학교가 그 주 전체에서 성적이 꼴지였는데
불과 한 일년만에 그 주 전체에서 일등이 되었고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 점수가 20% 이상 상승을 했다.

그래 이것이 뭔가 싶어서 調査를 했더니 다른 거는 하나 바뀐게 없어서 도저히 성적이 올라가는 개연성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自細히 알고 봤더니 한가지 바뀐게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뭔가 봤더니 그전에 있던, 이사하기

전에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이 안나왔다가 이사하고 성적이 잘나왔는데 다른 점이 뭔가 봤더니

이사하기 전에 학교는 窓門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조그만 창문만 있더랍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간  學校는 눈만 돌리면 넓은 窓門으로 바깥의 自然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學校였더랍니다.

 
그런데다가 이사하기 前에는 그 조그만 窓門에 빛이 들어오니까 커튼을 치고 불을 켜고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窓門을 활짝 열고 수업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窓밖으로

드넓은 自然을 보다 많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설마 그거 가지고 성적이

그렇게 좋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캐나다에 있는  엘버타 교육청에서 5개 학교에서 똑같은 實驗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同一한 結果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結果가 나왔답니다.성적만 좋아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키도 더 커지고요. 충치 발생율도 그렇지 않은 학교에 비해서  더 줄었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한 學校가 캘리포니아 포커스라는 初等學校라 그러구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高等學生들도

과연 可能한가 해서 백한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을 얻었으면서 그 結論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럽니다. 아이들이 窓밖으로 自然을 바라봤을 때 窓밖에 植物들이 나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리고 자주자주 내다보면 내다볼수록, 그리고 窓門이 크면 클수록 大學 進學率도 높아지고,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 性格도 좋아지고 健康도 더 좋아지고 마음이 더 드넓은 아이로 성장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自然의 어떤 작은 부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 할지라도 自然을 자주자주 많이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 가슴은 더욱 더 넓어지고 작은 것에

집중하는, 작은 것에도 가슴을 여는 그런 것들이 演習이 되는 것이죠. 
 


서울에서 보니까 어느 아파트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면 한강을  조망하는데 1억이 더 비싸고

같은 아파트라도 또 이쪽에서 남산이 보이면 또 1억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파트 하나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창이 있고 숲이 보이고, 자연이 보이고, 드넓은 이런 곳에서,

드넓은 것을 굽어 볼 수 있을 때 그럴 때 아이들도 더, 뭐랄까 意識도 擴張이 되고 가슴이 더 넓게 바뀌고

집안에서 싸움도 좀 덜 일어나고 이러지 않을까요?

 

제가 옛날부터 이런 얘기를 했었을 텐데 내가 이 걸 보고 '아,  내가 이래서 이런 느낌이 들었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저는 어릴 적 부터 항상 自然을 너무 좋아하던 것이 이제 언덕위를 좋아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언덕을 좋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가면 한상 그 윗자락에 올라가면

항상 그 자리에 자릴 펴고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뭐가 있어도 窓門이 넓은 곳을 좋아하고 우리 보살님

들하고 밥을 먹으러 가도 될 수 있으면 窓 넓은 대로 가자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왠지 모르게 뭔가 그런게

좋은데 그것이 우리 누구나 根源에서는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自然을 바라보고 그런 것 만으로도  우리의 어떤 靈感이 깨어나고 나에게 도저히 없는 能力이라고

生覺했던 어떤 創意性 이런 것들이 속속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칸트도 보면 매일 3시 반쯤 되면 항상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그러고요.  그 산책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루소나 에머슨이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도 恒常 산책 속에서 創意性이나 靈感 같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산책을 할 때마다 메모지를 들고 다녔다 그러지요.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意識을 制限시켜

놓았을 때 비좁은 空間에 制限시켜 놓았을 때 우리도 意識도 작은 사람이 되지만, 넓은 것을 보았을 때

意識도 擴張을 하는데요. 이런 比喩를 들 수가 있습니다. 금붕어들을 작은 어항에 가두어 두면 덩치가

5센치 이상으로 잘 안 큰답니다.그런데 이 금붕어들을 湖水에다가 풀어 놓으면 덩치가 25센까지

커진답니다. 江에다가 탁 풀어놓지 않습니까? 길게는 1미터까지 크기도 한답니다. 이를테면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旅行을 보내거나, 외국 배낭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 나도 모르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이런 것들도 하나의 이런 것일 겁니다.  

 

내가 비좁은 곳에서 비좁은 것을 보기 보다는 보다 드넓은 自然을 보고 드넓은 세상을 보고 했을 때

뭔가 모를 어떤 나라는 것의 制限이 풀리고 擴張되는 그런 어떤 結果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런 生覺이

듭니다.  이것처럼 내가 조금 더 自然과 가까이 하고 自然을 많이 바라보고 自然의 소리를 듣고 그랬을

내가 擴張되고, 그런 것을 떠나서도 마음이 너무나도 고요해지고 平和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두 번째로는 나를 열고 나를 擴張하는 方法은 뭐냐하면 주변에 나눔과 베품,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내 것만 알고 남에게 주지 않고 꽉 쥐려고 하는 마음 自體가 나를 내꺼 안에다가

限定하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자하는  마음 아니겠어요? 근데 내 것을 남들에게

나누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나를 擴張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좁은 내가 아니다.

이 世上 全切와 내가 도움을 주는 모든 存在들과 나는 둘이 아니다. 擴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좁은 自己 틀에 갖혀있는 사람은 결코 남를 위해 나를 犧牲해서 도울 수 없습니다. 물질도 베풀 수 없고

마음도 베풀 수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擴張되는 것과 같다. 나라는 自我에 나를 가두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보다

더 사랑해 주고 더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었을 때 내가 擴張되는 것을 우리는 經驗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無限한 能力이 늘어날 수 밖에 없겠죠. 내 것만 알겠다고 가두는 사람은 더큰 富者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점점 더 富者가 될 수 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라는 틀에 갇힌 

내 福만 받는 것이 아니라 宇宙法界의 無量大福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요. 조금 비슷한데 執着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執着은 바로 我執이라고 해서 내 것으로 갖겠다는 執着아니겠어요? 내것, 所有欲 같은  이런것들을

執着이라고 한단 말이죠. 집착하는 사람들은 곧 내 것만이 내꺼다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나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더 많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執着을 하게 되면 無限한 可能性과 創意力 같은 것도 喪失이 되어버립니다.

성적을 잘 받아야겠다라고 執着하는 사람은 성적을 더 잘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돈에 대한 執着을 과도하게 하는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 수가 없게 되고,

사람에 대한 執着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을 내가 반듯이 사귀어야 되겠다 .

이런 執着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執着의 크기는 相對方을 두렵게 만들거든요. 마음이 멀어지게 만들 수 밖에 없는거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데, 나를 執着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없어집니다.
 


物質도 다 마찬가지다. 이게 삶의 理致입니다. 執着하는 것은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執着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그것이 나에게로 더 다가올 수 가 있다. 그 理由가 執着하게 됐을 때

나라는 小我的인 自己 槪念의 틀속에 갇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執着을 내려 놓게 되었을 때

나라는 틀. 나다 너다 하는 틀이 놓여지고 그랬을 때 宇宙法界의 無限한 可能性이 나에게 波動쳐

들어오는 겁니다. 더욱 큰 無量大福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또 네 번째는요.  이 또한 아주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중요한 얘기인데요 뭐냐하면 내가 世上을 살아간다.

내가 잘 살겠다. 내가 뭔가를 해내겠다 이런 내가라는 마음을 탁 내려 놓는 겁니다.

그럼  내가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말로 어떻게 表現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佛性이라고도 하고 大我라고도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本來面目, 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하고

無限한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 딱 定해서 이름 할 수 없는 그 主人公, 한 마음, 一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나 그것은 實體인 것은 아닌, 아트만과 같은 어떤 實體的인 것을 얘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부처가 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無限한 어떤 可能性에 그 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뭐 있다 그래도 어긋나고 없다 그래도 어긋나겠지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있단 말입니다.

 

즉, 아까 우리는 나를 制限 했을 때는 이 정도 能力밖에 없지만  나를 制限하는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無限한 能力과 創意性과 直觀과 靈感이 끊임없이 파도쳐 들어오는 것처럼 그러한 나라는 存在에 갇혔을 때

펼 수 있는 나의 能力을 넘어서는 無限하게 擴張할 수 있는 그 어떤 可能性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 佛性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佛性을 써 먹을수 있느냐 . 우리가 나로서 살지 않고 佛性, 主人公, 참나, 本來面目을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탁 附合해야지만 佛性을 써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 스스로 나라는 것을 턱하니 根源 자리에 내려 놓고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根源의 자리에

그 자리를 佛性이든 한마음이든 主人公이라고 이름하던지  그 根源 자리에 나를 내 맡기는 겁니다.

完全히 내 맡기고 사는 거에요. 내가 산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돈을 벌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잘나도 내가 잘난게 아니고 못나도 내가 못난게 아니고 그냥  그 자리가 하는 것이다.

난 이 生에  잠깐 이 껍데기 이 肉身이라는 껍질을 입고 百年도 안 되는 歲月동안 잠깐 와서

이 生을 經驗하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꿈을 꾸는 者에 불과한데 좋은 꿈을 꾼들 惡夢을 꾼들

그 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 겠습니까? 좋은 꿈을 꾼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錯覺  해서도

안돼고 나쁜 꿈을 꿨다고 해서 내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나약해져서도 안된다. 또한 優越感도

부처님께 내 맡기고 劣等感도 부처님께 탁 내 맡기고 나는 그저 지금 이 瞬間瞬間 未來에 대한 걱정도

맡기고 그 어떤 고민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근심걱정을 하는 原因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自我, 我相에 갇혀있기 때문에.내가 있으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긴다. 사실 나라는 存在가 할 수 있는게, 나라는 에고와 我相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制限돼있죠.
 


나라는 存在는 事實 뭐하나 제대로 아는게 없습니다. 어떻게 分明히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生覺하지만  이것처럼 어리석은 驕慢한 마음이 없죠,

불교에서 下心하라고 하는 理由가 사실은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살아있는 3대 生佛이라고 불렸던 달라이라마, 틱낫한, 우리나라의 숭산 큰 스님이 계시는데

숭산 큰 스님의 가르침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수행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이 生을 사는 데 있어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안다고 生覺하면 어긋난다.
 
우리가 아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오늘 法會 끝나고 집에 갈 때 A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B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어디 들렸다 가는 게 좋은지 바로 집에 가는 게 좋은지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바로 A라는 길로 갔는데 그 길로 가다가 교통 사고가 날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뒤로 돌아가는 게 나은 거 일 수도 있는데 그 사실을 알 수 없죠. 根源에 그냥 맡기고 가는 것이지.

내가 計算하고 머리 굴려서 갈 必要가 없다. 根源 자리에 맡기고 가면 宇宙法界가 알아서 나를 이끌고 간단

말입니다. 어떤 큰 重要한 決定 앞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事業을 擴張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擴張하는 게 좋은 지 안 하는 게 좋은 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擴張했다가 亡할 수도 있고 안했다가 오히려 더 成功할 수도 있는데,

 

자식을 A라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은지, B라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저마다 自己의 다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自己 삶의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라는 길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B라는 길이 틀린 것도 아니고 저마다 自身의 삶이 오는

겁니다. 自身에게는 自己의 삶이 오는 거에요. 그래서 自己답게 사는 것이 삶의 目的입니다.
 
自己답게 살아야 되는데 어디 正確한 옳은 正答이 있겠습니까?  공무원이 옳다거나 大學校 卒業한

학생이 공무원 하는 게 옳다거나 아니면 事業을 시작하는 게 옳다거나 어떻게 兩端의 結論을  내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그 사소한 하나도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모르는 存在입니다.

오직 모를 뿐인 存在들이다.

 

그런니까 안다고 生覺하고 驕慢心을 필 수가 없다는 것이죠.그래서 나는 모른다. 오직 모를 뿐 하고

나는 모르니까 나라는 작은 小我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부처님께 내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法華經에서 諸法實相이라고 했단 말이죠. 지금 이 瞬間에 펼쳐지는 모든 法은 다 實相이다. 참된 모습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부처님께 내맡기고 그저 우리는 그 瞬間瞬間 사는 겁니다. 卽, 한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秒사리도 그 瞬間瞬間을 最善을 다해 사는 거에요. 未來에 대한 걱정도 我相에서 오는거니까  내려 놓고

根源 자리에 다 내맡기고  그냥 旬間旬間을 살면 됩니다. 배고플 때는 그냥 밥을 먹고 배 부르면 안먹고

맨날 하듯이 심심하다고 티비 켜고 스마트폰 보고 맨날 똑같은 삶만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냥

瞬間에 내가 어떤 것을 해야 될 것인지 내 根源에서, 내 한마음에서 진정 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이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過去나 未來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죠.

 

저는 일년 後에 어떻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으니까, 일년 後에 내가 다른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아니면  일 년 後에 내가 退社를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부터 고민, 걱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준비는 해야 되겠죠 . 필요할 때 마음을 意圖的으로 써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生覺을 할 때는 生覺을 가져다 쓰는 것이 잠깐 가져다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일년 後에 있을 그 두려움 때문에 일년 내내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알겠어요.

우리는 일년 後에 '내가 이렇게 됩니다. 안 좋아집니다.'라고 生覺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일년 後에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는. 더 좋아질 수 도 있단 말이죠. 모든 可能性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내가 制限하지 않는다면 無限한 可能性이 내 앞에 있어요. 制限되고 固定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나는 언제나 이 生에서 意識을 擴張하겠다. 卽 三歸依 부처라는 根源의 眞理로

向해 가겠다.卽, 점점 더 나는 깨달음을 얻어 가겠다라는 自己 中心만 있다면 깨달음으로 얻어가는 方式이

經驗을 통해서 있지 않겠습니까? 多樣한 經驗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 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無限한

多樣한 經驗을 내가 막진 않겠다.그 可能性을 열어두겠다. 내 앞에 있는 나라는 存在가 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에 내 마음을 열어 두겠다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宇宙法界에서 더 놀라운 일들을 나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내 스스로 내 根源 자리를 制限만하지 않으면....


'나는 요 정도 밖에는 진급을 못 할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를 制限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죠. 그러나

더 많은 어떤 방식이든 좋다. 이게 진급의 방식도 좋고 다른 일을 하는 방식도 좋고 그 무엇도 좋다.
하다못해 보살님들이 '왜 제가 오십 육십 칠십이 되었는데 그때 새롭게 영어나 제2외국어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공부해보고 이것도 아름다운 방법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장군분이 전역하면서 중국어를 공부 시작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 분이 전역하면서 저 나이에 중국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게 조금 의아했는데

몇 년 있다가 뵈었는데 중국분하고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동안 나는 이 나이에 뭐했나하고..여러분 보시기에 우스울 그런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는데

저 분은 저 연세에 시작해서 똑같이 몇 년 지났는데 저렇게 놀랍게 하고 계시는구나.


새로운 것을 試圖하게 되면 老化도 안온다고 하죠. 腦가 녹슬지 않는다 그럽니다 뇌가 녹슨다는 觀念이

있을 뿐이지 實際  腦는 죽을 때 까지 成長한다고 그럽니다.요즘 腦科學에서 발힌 事實입니다. 내 스스로

나는 이제 成長이 멈춘다. 깨달음이 멈춘다라고 가둬놓지만 않으면 나는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라고

가둬 놓지만 않으면 나는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둬놓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再生됩니다.

몸의 細胞도, 腦도. 칠십 팔십 되셔서도  히말라야 올라가는 분도 계십니다.그 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集團的으로 全 地球的으로 人類 모든 사람의 共通된 意識에서'한 백살 쯤 넘으면 누구나 죽어'라는

觀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사람들의 나이도 그 程度로 制限 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깨게 되기

始作하면, 그 깨는 어떤 瞬間을 맞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이 人類의  壽命이 갑작이 더 늘어날 수도 實際

있습니다.


어떤 큰 病이 있으신 분들, 예를 들어 不治病이라고 알려진 病이 있는데 그 病을 治癒할 수 있는 놀라운

新物質을 開發했다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만 했을 뿐인데 實際 活用化 되지는 않았는데, 기사만 났을

뿐인데 그 후 전 세계적으로 그 病이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 好轉되기 시작했다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스스로를 制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는 작은 小我 속에 갇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擴張할 때 나를 制限하는 모든 것들을 根源 자리에 내려 놓을 때, 自然의 소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이고, 이웃 사람들과 보다 더 나누고 베풀고, 내 것에 대해서 執着하지 않고 所有欲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나를 내려 놓고 모든 것을 根源 자리,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삶을 살 때 그래서

근심 걱정없이 뭐든지 부처님께서 이끌어 가는 데 무슨 걱정이냐 하고 탁 내맡기고 살 때  우리가

얼마나 無限하게 擴張되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可能하게 하는 마지막 한 가지 方法이 바로 冥想을 하고 坐禪을 하고 參禪을 하고

修行을 하게 될 때 우리는 修行하고 있는 그 瞬間 나라는 生覺을 잊게 된단 말이죠. 無我를 느끼게 된다.

나라는 것을 탁 잊게 되는 瞬間을 直接 느끼고 體驗하게 되면 그 瞬間에 나라는 生覺이 탁 내려놓아 진다.


前에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사격선수들이 사격을  할 때 10점 滿点에 탁 하고 꽂히는 瞬間에 보면

언제나 명중 直前에 예외없이 頭腦가 번쩍 하는 瞬間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주파수가 腦의 周波數가

알파파로 순간 탁 變했을 때는 어김없이 10점 만점을 맞혔다는 거에요. 그야말로 알파파라는 自體가

모든 雜念이나 이런 것들을 完全히 탁 놓여진 瞬間 깊은 冥想의 상태, 無我의 샹태 그런 겁니다.

 

또 音樂家가 됐든 醫士가 됐든 經營者나 調從士가 됐든 自身이 할 수있는 최고의 能力을 발휘하는

瞬間에는 언제나 마음이 턱 놓이는, 텅~비어버리는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雜念이 놓여지는 어떤

無我의 그런 瞬間을  탁 經驗한다고 그래요.


노벨상 수상자의 90%는 꿈꾸는 상태였거나 혹은 冥想하는 중에 놀라운 힌트와 靈感을 얻어서

그 놀라운 노벨상이 될만한 것을 發見했다고 합니다. 生覺으로 可能한 것이 아니다. 生覺을 넘어서는

無限한 可能性, 根源 자리, 無我에 接觸했을 때 얻게 되는 더 놀라운 것이 있다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내 스스로 限定하고 制限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無限한 나를 擴張할 수 있는,

나를 制限된 時空間 속에 가두지 않을 수 있는 無限한 資源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디에서는 內面에 있다, 佛性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宇宙法界에

가득히 있는데, 우리 腦는 안테나와 같아서 宇宙 法界에 있는 無限한 資源을 언제든지 受信해서 쓸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너와 내가 事實은 둘이 아닌 것이죠. 내 內面에 있는  느낌 感情 妄想 煩惱

生覺, 밖에 있는 對相, 世上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얘깁니다.


自性佛과 法身佛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안팎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宇宙法界 全切에 遍滿해 있다라는 것이고, 나라는 存在가 바로 깊은 어떤 冥想의 狀態로서 宇宙法界

全切에 遍滿해 있고, 科學에서도 나라는 存在가 振動을 할 때 그 振動이 끝나는 골에서 마루로 바뀌는

그 瞬間의 地點에서는 모든 振動은 宇宙法界  全切에 遍滿하다라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내 몸도 마음도 한 生覺 일으킬 때 美國에도 가 있을 수도 있고 안드로메다에도 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本來 宇宙法界에 遍滿한 存在라는 얘깁니다. 遍滿한 瞬間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홀로그램(hologram)이라고, 과학자 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손톱 밑 때 속에 있는 振動을 읽을

수만 있다면 이 振動이 時間과 空間을 超越해서 宇宙法界에 遍滿하기 때문에, 손톱 밑의 때 속에서

안드로메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즉각 알 수 있고, 2500년 전에, 3000년 전, 수만 년 전에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振動하는 에너지情報體로써 時空을 超越해 宇宙法界에 充滿한 그런 存在이기 때문에.

一念卽是無量劫이고 九世十世互相卽이라고 하고 또, 한 티끌 속에 全切를 머금었다고 하고

一卽一切 多卽一이라고 하는 법성게 가르침처럼 우리는 여기 이 몸안에 갇힌 이런 어떤 存在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기만 해도 瞬間瞬間 無限한 可能性의 그 能力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중요한 발표가 있다, 試驗이 있다 할 때 試驗 直前에 내가 하는 게 아니다.

試驗을 根源 자리,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탁 내 맡겼을 때,

제가 이자리에 잠시 앉아서 坐禪을 하고 이 法床에 올라오지 않습니까? 잠깐 앉아서 언제나처럼.

언젠가 부터 그런 習慣이 생겼는데 언제나처럼 잠시 앉아서 제 自身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부처님 法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法을 저는 어떻게 傳하는지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내 안에 있는 根源, 부처님께서 알아서 法을 傳하십시오.

저를 빌어서 알아서 宇宙法界의 眞理가 흘러 나오도록 저 自身을 許容합니다.

저 自身을 宇宙法界에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 했을 때 說法을 하고 나서 내려 왔는데 어느 날은 내가 내 머리속에서는 그런 生覺이 한 번도

힌트를 얻어 본 적이 없던 말들을 이야기하고 내려오는 그런 때를 발견하거든요. 그 말들은 제 머리속에서

나온 說法이라고 生覺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속을 뛰어 넘을 수 있는 無限한 次元의 어떤 것들과 언제나

連結되어 있고 接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뭐 대단한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고 보통 사람 누구나 日常的으로

修行者로 無限 次元과 連結되고 接觸하면서 사는 것이 可能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自身을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習慣, 삶의 方式대로 나라는  存在를 비좁은 肉身과 마음에

限定시켜서 가두어 두지 마시고, 지금까지 가두어 놓았던 모든 것을 完全히 열어 놓고, 나라는 存在를 활짝

열어서 無限한 擴張이 可能하게 宇宙法界에 나를 完全하게 許容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