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예수보살

장백산-1 2015. 7. 2. 15:07

 

 

 

돈황에서 발견된 예수보살상


베트남 평화 운동과 내면의 평화를 동시에 추구했던 틱냑한 스님은 
불교와 기독교는 이 지상에 핀 가장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석가모니도 유대 사회에 태어났더라면 예수처럼 행동했을 것이지만,

단지 문화와 생활 양식의 차이 때문에 겉보기에는 다른 길을 갔을 뿐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 길이란 어떤 길일까?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이웃에게 몸소 보여주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살도의 길이다.

 

 

오늘날 예수 역시 보살의 삶을 살다갔다는 것이 신학자나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작고하신 감리교신학대 학장 변선환 박사의 제자 김승철 교수는 나에게 하나의 菩薩象을 보여준

적이 있다. 스타인이 돈황에서 발굴한 이 그림은 일반적인 보살상과 거의 유사한데 왼손으로는 내영인

(來迎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흡사 지장보살로 착각할 정도이다.

다만 보관과 지팡이 맨 위의 十字架 형태나 수염이 나 있는 西洋人 비슷한 얼굴이라는데서 일반 菩薩象

과 차이가 났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상이었다. 그 예수의 모습을 지장보살의 양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문물의 교환은 급기야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마니교, 이슬람교 등을 중국땅

당나라에 전파시킨다. 특이 경교(景敎)라 불리는 그리스도교 네스토리우스파는

하나님을 불(佛), 천존(天尊) 등으로, 예수를 세존(世尊), 대사(大師)라고 부르면서

중국땅에 뿌리를 내리려 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를 이렇게 菩薩t像으로 表現했던 것이다.

부처님 像을 그리이스 양식에 맞추어 만들어낸 간다라 佛像에서 싹튼 그 불상의 모습이 예수님 상을

중국땅에 토착화시켜 그려낸 예수보살像으로까지 變化를 거듭한 것이다.

 

오늘날 이와 유사하게 토착화된 예수의 모델로서 그것은 바로 菩薩이라는 주장을 논문으로 발표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길희성 교수이다. 다분히 상징적 표현에 가까운 당나라 시절의 예수보살상이

오늘날 韓國땅에서 예수菩薩論으로 具體的인 論理와 설득력 살과 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길희성 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다른 문헌을 참고해 가면서 예수보살론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왜 예수는 菩薩인가?  길교수는 「예수, 보살, 자비의 하느님」『포스트 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一切의 差別과 대립(相)을 떠난 菩薩은 모든 宗敎的 偏見이나 獨線

으로부터 自由롭다. 肯定에도 머무르지 않고 否定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世間과 出世間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菩薩의 自由이다. 예수는 유대의 律法主義로부터 自由로운 存在이다.

聖과 俗, 경건과 불경건, 의인과 죄인, 정과 부정의 對立的 構造에 사로잡혀 人間을 보고 判斷하는

바리새人的 律法主義的 偏見과 束縛을 예수는 과감하게 拒否했다.'

 

예수의 律法主義에 대한 距否는 모세의 十戒銘에 대한 反大 명제에 잘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山上 수훈으로 유명한 『마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그대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대들을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惡한 사람에게나 善한 사람에게나 똑같

이 햇볕을 주시고, 올바른 자에게나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마태복음』

5:43 - 46)

 

이것은 분명 모세의 十戒銘에 反旗를 드는 원친평등(怨親平等)의 思想이다.

利己的이며 打算的인 計算을 떠나 이렇게 相對方을 無差別的으로 사랑하려면 自身을 철저히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自己를 完全히 비운 자리에 어떠한 先入見과 價値 判斷이 머물 餘地가 없다. 그 무사(無私)한 상태

에서 義로운 자와 義롭지 않은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는 無差別的 平等한 사랑이 可能한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自己 否定, 自己 拒否의 行爲를 전문 용어로 케노시스(Kenosis)라 한다.

 예수는 이렇게 自己를 비움으로써(ekkenosis)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本性은 本래 自己 비움〔케노시스〕이다. 예수는 그것을 具體的으로 보여준 자이다.

예수가 神의 모습에서 自身을 낮추어 人間의 모습으로 태어난데서 그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基督敎를 조그마한 유대땅에서 끄집어내어 普遍的인 世界 宗敎로 變化게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을 품으시오.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나님과 같음을 노획물인양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從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의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빌립보서 2:5-8) 여기에는 예수의 完全한 自己 否定이

보인다. 완전히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기란 불가능하다.

 

사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바로 보살의 행위나 다름 없다. 보살, 그는 자신을 철저히 무(無)로 부정하고 중생들

의 구원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 번뇌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살의 행위는

『금강경(金剛經)』의 즉비(卽非)~~是名의 論理에서 確固히 理論的 基盤을 다진다.

거기서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A라는, 즉 자신을 완전히 죽임으로서

진정한 자기로 다시 태어나는 절대 부정 즉 절대 긍정의 논리가 숨쉬고 있다.

사실 한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완전히 썩어 문들어지지 않고는 더 많은 수확을 거두기란 불가능하다.

菩薩은 菩薩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完全한 菩薩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종교철학자 아베마사오(阿部正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자기 부정적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바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본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구원적 비움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로서 役使하므로)'

이러한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無我로서의 삶은 바로 끝없는 이웃 사랑으로 펼쳐지는데,

그 단적인 예를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잘 읽어낼 수 있다.

 

길가에 유대인 한 사람이 도적들의 습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그때 유대인과 원수지간이던 착한

사마리아인 그를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포도주를 먹인 뒤 나귀에 태어 여관에

옮겨주고 치료를 부탁한다. 원수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無差別的 사랑을 베푼 것이다.

 

사랑은 공(空)에서 나온다. 이렇게 本質的으로 完全히 自身을 비우는 예수의 行爲의 根據는 事實

하나님 自體에 있다. 하나님은 텅~비움 그 自體요 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베 마사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總體的 케노시스 속에서만 不義한 자들과 죄인,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容恕받고 俱足되고 滿足되며 하나님의 사랑이 完全히 成就된다.'

결국 하나님은 無이며 空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이다.

空은 사랑의 存在論的 槪念이며 사랑은 空의 人格的 言語이다.

이러한 空과 사랑은 누가 人爲的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 世界에 이미 存在하고 있는 事物의 實相이므로

空과 사랑 그것은 하나님의 恩寵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空은 恩寵이다.

事物의 本來 모습이 空으로서 實在한다는 것은 恩寵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이다.

 

예수와 菩薩은 이렇게 空에 根據해서 自身을 비우기 때문에 이웃을 無差別的으로 사랑한다.

 '주리고 목마른자, 監獄에 갇히고 病든 자, 억눌리고 핍박당하는 자, 소외되고 외로운 자,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 예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보살의 자비를 보며, 生死의 迷路에서 방황하는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地獄의 苦痛을 마다않고 찾아가는 菩薩의 慈悲속에서 우리는 .... ...

예수의 사랑을 본다.' 그렇다면 예수에게도 과연 보살의 또하나의 側面인 깨달음, 卽 그 菩提를 求하는

마음이 있는가. 사실 그리스도교는 깨달음보다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가.

 

길희성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수는 믿음보다는 깨달음을, 그 眞理를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믿느냐 안믿느냐 보다는 宇宙와 人生, 存在의 根本的 事實을 아느냐 모르느냐, 혹은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가 예수에게는 重要한 일이었다. 絶對 無上의 恩寵인 하느님은 예수에게 믿음의 對相이기

以前에 앎의 對相이며 發見의 對相이다. 길 교수의 말이다. 옳은 얘기다.

 

그 恩寵의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自身을 종의 모습으로까지 낮추기란 불가능하다.

깨닫고 느낄 때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벅찬 行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냐' 하는 예수의 물음에

베드로는 '主,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당신은 우리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그토록 오래 사로 잡아온 菩薩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분이시며 지금도 고통 받는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고 계시는 慈悲로우신 菩薩입니다'라고 고백해도 좋

을 것이다.

 

끝으로 한 일본의 신학자의 인용하면서 이 항목을 마치겠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살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의 이미지를 구미(歐美) 基督敎의 틀로부터 解放시켜서

길가에 있는 지장보살이나 오랜된 작은 방안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처럼 東洋의(그리고 나 자신의)

풍경 속에 融和시켜서 그리운 예수의 이미지를 묘사해 보고 싶다.'  (岡野守也, 아름다운 보살, 예수)

 

 

 

 

p/s ; [법화경 유통회] 카페에 초대합니다.

       [http://cafe.daum.net/4096osos/XJdI/130]클릭하세요!

        법화경 유통회는 법화경을 무료로 배우고 유통하는 도량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글쓴이 : 태일(太一)| 원글보기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空 - 下  (0) 2015.07.04
“밤마다 부처와 안고 잔다”  (0) 2015.07.04
본성을 보는 방법  (0) 2015.07.01
윤회를 끊을 힘 지닌 사람이 요지경 세상 두려우랴  (0) 2015.06.30
一乘思想이란?  (0) 201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