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空 - 下

장백산-1 2015. 7. 4. 02:03

 

 

 

 

 

 

23. 空 - 下

               이진경  |  solaris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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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1  1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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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어떤 소리도 될 수 있는 潛在性이기에 어떤 소리도 아닌 ‘소리 自體’와,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울리며 오는 모든 소리들 全切, 여기서 眞諦와 俗體의 둘 아닌 世界를 發見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하나의 체(體)와 수많은 상(相)들을, 그 相들의 다종다양한 용(用)을 대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槪念에 익숙한 이라면 실체의 한 속성과 수없이 많은 양태들의 세계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 무엇으로 規定되는 순간 本體 아닌 一部만 드러나
潛在된 可能性까지 볼 때 하나의 本體 이해하게 돼


 그런데 空性이 모든 것의 體를 이룬다고 한다면, 어떤 하나의 사물이나 한 사람에 대해서도 空性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소리들의 體를 이루는 空性을 보는 것이야 振動의 周波數로서 소리 自體의 潛在性을 보는 것이라 해도, 어떤 한 사람이나 하나의 사물에서 空性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이든 이런 저런 規定을 갖고 있으며, 交替되기도 하고 重疊되기도 하는 수많은 規定性들 속에서 산다. ‘프란츠 파농’이란 이름을 갖는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이다. 즉 그런 規定을 갖는다. 그리고 한 때 식민모국이었던 프랑스에서 지원병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의과대학에 유학을 해 醫士가 되었다. 정신의학을 공부했고 알제리에서 임상을 하며, 알제리 해방운동에 관여했다. 이 모두가 그 사람에 대한 規定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찾아보는 프로필, 혹은 그가 거쳐간 삶의 연대기는 그런 規定들의 集合이다. 그런 規定들을 모두 안다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파농은 어느 기차 칸에서 “어머, 黑人이야!”라는, 한 소녀가 조그맣게 흘린 감탄사로 인해 自身이 누구인가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된 얘기를 쓴 적이 있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그때 ‘흑인’이라는 規定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만, 事實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規定 속에서 그는 단지 한 사람의 黑人, 그것도 白人들이 부여한, 결코 편하지 않은 位置나 意味들에 포위된 黑人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그는 ‘흑인’이란 規定에 가려 보이지 않는 自身의 存在를, 自身의 참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런 規定 앞에서 그는 상처받고 절망한다. ‘흑인’이란 그 規定을 벗어날 수 없는 한, 그것에 의해 가려진 自身의 存在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절감한다. 그저 한 사람의 黑人일 뿐이다. 흑인이라는 規定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기보단 알 수 없게 해주는 要因인 것이다. 흑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면 크게 달라질까? 부호만 바뀐 어떤 하나의 대상에 머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가 흑인이란 規定 대신 의사라는 잘난 規定을 들이밀고 싶었던 것을 아닐 게다. 의사라는 規定은 ‘흑인’이란 말에 절망하면서 흑인들의 정신세계에 다가가고자 했던 젊은 날의 그에 대해 별로 알려주는 것이 없다. 醫士라는 잘 나가는 職業, 좋은 입학성적으로 추론되는 브라이트한 知能, 혹은 돈을 벌어 출세할 可能性이나 知的 才能 같은 것을 짐작하는 것으로 그의 精神世界에 다가갈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흑인’이란 規定만큼이나 그 사람의 ‘本體’에 다가갈 수 없으며, 다가가는 걸 抵害하는 規定일 뿐이다.

정신의학자나 알제리해방운동의 전사 같은 規定 또한 이와 根本的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規定도 파농이란 사람의 ‘本體’를 드러내주지 않는다. 드러내는 것 以上으로 가린다. 그 規定들을 모두 合하면 그의 ‘本體’를 볼 수 있을까? 그것이 右往左往하며 구불구불 나아가야 했던 行蹟에 대해 알려주는 한, 그렇게 남다른 궤적을 그려야 했던 條件에 대해 알려주는 한 조금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가면서도 아주 다른 生覺을 하고 아주 다른 方式으로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길의 끝에서 失敗라고 절망하는 이도 있지만, 그 失敗에도 다시 시작하려는 이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은 파농이란 사람의 겉에 드러난 一部分만을 드러내줄 것이다. 그가 쓴 책을 본다면, 우리는 그의 思惟, 그의 存在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規定性에 가린 채 그가 生覺하고 살아간 方式을 보여줄 테니까. 그러나 그는 末年에 쓴 ‘大地의 저주받은 자들’이란 책에 대해 當時 最高의 知性人이었던 장-폴 사르트르가 好意를 갖고 써준 序文을 보고, 그가 自身을 크게 誤解했다고 안타까워해야 했다.

물론 파농이란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規定性들이나 그가 쓴 책과 다른 어떤 숨은 本質을 끝내 감추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規定들이란 그의 一部를 드러내고 表現한다. 黑人이고 醫士고 解放運動의 戰士고 하는 것 모두 그의 一部를 表現한다. 그러나 그것은 一部일 뿐이며, 그 一部를 規定性을 표시하는 말로 ‘평균화’해버리기에, 드러내는 것만큼 가리는 것이다. 그때 가려지는 것은 그런 規定性의 어둠 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았고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그의 潛在性일 것이다. 그 規定들과 소통하지만, 하나의 規定이 드러나는 순간 그 規定의 뒤로 밀려나며 숨겨지는 潛在性.

파농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얻었던 수많은 規定性을 살았고 또한 살아야 했던 사람이며, 그와 다른 많은 規定可能性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많은 規定性을 갖고 있었으면서, 그 規定性들 뒤로 물러나 있는 無規定的 潛在性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規定들을 可能하게 해주지만 어떤 것으로도 規定할 수 없는 規定不可能性,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潛在性, 그것이 파농이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本體가 갖는 空性을 본다 함은 이런 것 아닐까? 그 모든 規定性을 通해 存在하지만, 어떤 規定性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規定不可能한 潛在性을 보는 것.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한 복제인간이라는 이중의 規定에 갇혀 경찰에 쫓기는 이들을 따라가며 펼쳐진다. 유전자복제로 눈을 만드는 노인은 자신을 찾아온 로이를 알아보고 “네 눈은 내가 만들었어”라고 말하지만, 그에 대해 로이가 응수한다. “영감, 내가 이 눈으로 무얼 봤는지 알아?” 그의 이 한 마디는, 그 노인이, 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경찰이 “상상도 못할”, 그들의 모든 規定을 벗어난 어떤 체험들을, 그것을 거치며 形成된 巨大한 潛在性을 암시한다. 그것은 로이 자신의 입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일 게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일 게다. 책까지 써서 말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었던 파농의 그것처럼.

하나의 動物이나 事物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고기’라는 運命的 規定에 갇혀 움직일 수도 없는 畜舍에서 그저 사료를 먹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소나 돼지라면, ‘고기’라는 規定만큼 自身의 ‘本體’를 가리는 게 없을 거라며 치를 떨 것이다. 땅을 가는 일을 하며 농부의 ‘친구’라는 規定을 얻는다고 해도, 그 規定이 소의 本體를 드러내줄 거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는 인간에게 고기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存在로서 그의 ‘本體’는 그런 規定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潛在性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事物의 경우에는 더욱더 난감하다. 動物들처럼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인간이 부여한 用度나 目的性이, 그런 規定性이 本質이요 本體라는 幻想이 깨기 어렵게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 용도(규정)가 다하면 존재할 이유를 잃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들로선 그 規定性이 다하지 않도록 악착같이 매달려야만 할 것 같다. 버려진 주전자와 시계, 그 옆의 행주치마…. 누구도 視線을 주지 않는 그것들의 潛在性, 그것 또한 버려지기 전이나 후나, 規定性을 유지하거나 잃거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용도적 규정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규정성 뒤에 숨어서.

空性을 본다는 것은 用度의 規定 속에서 그것을 可能하게 하지만 그런 規定으론 포착할 수 없는 潛在性을 보는 것이다. 詩人들이 그러하듯이, 쓸모없음을, 거기 숨은 많은 潛在性을, 그 검은 땅 속에서 새로 피어나는 다른 存在 可能性을 보는 것이다.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자비로운 기계/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아무도 펼치지 않는/양피지 책…”(진은영, ‘쓸모없는 이야기’)

이처럼 용도의 規定 바깥에 있는 ‘쓸모없음’을 보고 그것을 통해 事物들에 부과된 운명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여는 것을 블랑쇼는 ‘사물의 구원’이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事物의 空性을 보는 것, 그것은 事物의 救援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의 規定性에서 벗어나 소나 돼지의 潛在性을 보는 것이, 그에게 하나의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말은 더욱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이란 規定에서 벗어나 어떤 한 사람의 潛在性을 보는 것이, 흑인이란 規定性을 피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작은 구원이 될 수 있음 또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더 重要한 眞實은, 그럼으로써 진정 구원받는 것은 그런 ‘구원’의 행위를 통해 사물이나 사람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구원하는 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기이한 ‘구원’의 시도를 통해 닫힌 듯 보이는 삶의 어떤 출구를 찾게 될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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