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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몽땅 허용할 때 가슴이 열린다

장백산-1 2016. 7. 14. 15:45

이 세상을 몽땅 허용할 때 가슴이 열린다


이 세상, 이 현실, 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시비 분별하지 않고 허용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그렇게 허용하기만 하는 동안은 계속해서 내가 고요해집

니다. 내가 圓融自在해 지고 諸法이 不動해서 내가 本來寂이 됩니다. 누구와도 싸우고 시비 걸려고 하지 

않는 내가 됩니다.


諸法 즉,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本來부터 고요합니다. 어느 누가 나한테 욕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諸法은 언제나 不動해서 고요합니다 寂寂합니다.. 相對가 내게 욕을 했지만, 그 사람이 욕

을 한 行爲에 내가 是非 分別하는 생각 마음 의식 卽,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意識으로써 反應하니까 고

정된 실체가 없는 幻想 妄想으로 괴로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상대가 내게 한 욕에 대해 幻想으로 反應하고 

幻想으로 괴로워 하는 것 뿐입니다. 幻想으로 괴로움이라고 해석하고 幻想으로 괴로움 속에 빠져서 幻想으

로 괴로워하는 것 뿐입니다. 내 妄念, 내 分別心 속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幻想 속에 스스로 빠진거죠.


그런데 사실 욕을 얻어 먹은 순간에도 本性은 본래부터 어떤 움직임도 없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본성은 

래 아무 일도 없어요. 실제 남들이 내게 욕을 했지만 아무 일 없는 듯이 아무 反應을 하지 않을 수도 있

니다. 바로 그 때가 둘로 나뉘지 않는 本來부터 고요한 本然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相對가 나한테 욕을 했어도 事實은 욕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그가 한 욕에 反應했을 뿐

이지, 그 사람이 내게 욕한 게 아니에요. 인간들이 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마음, 分別心만 없으면 언제나 

그 자리가 不動해서 本來寂입니다. 움직이는 바도 없고 그 자리가 이미 적적하고 고요하여, 단 한 번도 

고요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삶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나 어떤 

일에 反應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分別하지 않고, 그것에 對應할 수 있다면,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면, 意味를 부여해서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分別心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다 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法性 즉, 本然의 자리에 서 있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冥想이고 參禪입니다.


이처럼 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한 번 허용해보세요. 내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걸 허용해보

겠다 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걸 허용해보는 거예요. 그럼 우린 한 시간 동안, 깊은 冥想에 잠기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허용의 힘이 커지면 이 세상, 이 삶에서 벌어지는 世上萬事를 족족 다 허용

하게 됩니다. 이 세상, 이 삶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힘이 커집니다. 

삶을 향해 완전하게 가슴을 확 열게 되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도 닫아놓지 않고 몽땅 다 받아들이게 되

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立處皆眞, 諸法實相의 眞實의 世界에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니까 眞理가 分別心에 장애받지 않고 고스란히 통째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事實은 

眞理가 언제나 나를 향해 노크하고 있는데, 내가  取捨 選擇 分別해서 이것만 받아들이고 저 건 밀쳐내는 

習慣을 계속 키우고 있다보니 眞理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세상 모든 것

을 허용하는 순간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해석, 분별에 막히지 않

고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순간 갑자기 닫혔던 가슴이 활짝 확 열리면서 眞理 그 自體가 그냥 확! 確認이 될 수 있단 말이죠. 

見性이라는 표현이 바로 眞理를 確認하는 이러한 經驗을 표현하는 方便의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공부나 참선이라는 것은 不二法으로 分別없이 이 세상 모든 것을 無分別心으로 허용하는 

순간 일어나는 것이지, 뭐 수십년 동안 가부좌 틀고 오래 앉아 있어야지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이 習慣的인 分別心을 어느 순간 탁! 내려놓아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어떤 

分別도 없이 온전히 허용이 되느냐? 이게 重要한 겁니다. 許容한다는 말은 分別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分別도 하지 않는 그런 意識에 딱! 一致가 되느냐? 거기에 따라 眞理가 일순간 드러나는 

거지 眞理란 어떤 特別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허용, 수용은 거부에 반대되는 의미로써의 수용이 아닙니다. 거부와 수용 중 수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無分別心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말합니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