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無意識)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차이점
生命의 太初는 識이 아닌 無意識이다. 냉난자지(冷暖自知)의 根源이 無意識이다. 無意識이 法身이고,
太初이고, 眞理이고, 眞我이고, 佛性이고, 眞佛이고, 如如이고, 여래如來이고, 不生不滅하는 根源이고,
常住不滅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생명의 근본은 識이 아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생명의
본질이 無意識이라고 해서 고정된 불변(不變)하는 무의식은 아니다.
휘발유가 위력을 발휘하는 에너지는 화기(火氣)이지만 불을 일으키는 성냥이라는 연(緣)이 닿아야
화력의 기운이 밖으로 나타나듯이 휘발유에 연(緣)이 닿기 前에는 그 냥그저 잠잠한 부동(不動)이지만
무의식의 영지근원靈知根源에도 연緣이 닿으므로 꿈틀꿈틀 대는 생生을 감지한다.
거듭 말해서, 無意識이 곧 공(空)이다. 텅~빈 공(空)으로서의 無意識이지만 식(識)을 발(發)하는 空이지,
공(空)이라고 해서 식(識을 발(發)할 수 없는 허무적인 空은 아니다. 識을 發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능력
이 空의 위신력이다. 識을 발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초능력으로서의 空, 무의식이기 때문에 空으로서의
無意識을 일컬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말한다. 識을 발할 수 있는 초능력이 없다면 진공묘유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앞에는 연(緣)이 닿아 識을 發한다 했다. 緣이 닿아 識이 發하기도 하지만, 緣이 닿기 전 무의식의 空에서
도 자유자재로 識을 發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무의식의 공空에서도 내가 앉고 싶다는 生覺을 발생시키
면 앉아지고, 눕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누워지고, 서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서지고 하니, 꼭 緣이
닿아야만 識이 發生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緣이 닿기 전 空으로도 식識이 자유자재로 發할 수 있다.
이 無意識으서의 空이 바로 본래지(本來知), 근본지(根本知), 宇宙大自然이다. 空이 또 관자재보살, 관세
음보살이다.
냉난자지冷暖自知가 本來知이다. 냉난자지는 本來부터인 大自然(無爲)이지 작위(作爲)가 아니다. 인위
(人爲, 有爲)가 아니다. 知는 본래부터이지만 識은 본래부터가 아니다. 知는 大自然이지만 識은 大自然이
아니고 어느 때부터 作爲이다. 차다(냉) 따뜻하다(暖) 라고 하는 分別하는 識을 발하기 前 空은 항상 空
그대로 불변(不變)이지만 緣으로 차다 따뜻하다 라고 分別하는 識이 나타난 그 識은 그때부터 흔적이 남
아, 습(習)이 되고, 업(業)이 되고, 앞으로의 歷史가 되어 가는 過程이다. 왜냐하면, 識은 작위(作爲)이기
때문이다.
無意識인 空으로 되돌아가야만 안심입명(安心立命), 영원한 평화이다.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無意識인 空
은 大自然(無爲)이다. 無意識인 空은 연기법(緣起法)이 아니다. 그러나 時間과 空間 사계절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인연에 따라서 모이고(생겨나고) 인연에 따라서 흩어진다(사라진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한 시가 두 시 되고, 두 시가 세 시 되며, 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이 계절이다. 사계절이
다 연기법의 작용이 아닌가.
無意識의 空, 大自然은 緣起가 아니고, 무연기(無緣起)이지만, 봄이면 봄인 줄 알고, 여름이면 여름인 줄
알고, 가을이면 가을인 줄 알고, 겨울이면 겨울인 줄 스스로 아는 법法이 無意識인 空의 묘리(妙理)이다.
無意識인 空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스스로 전부 아는 본래지(本來知), 大自然이다. 無意
識이 本來知이고, 本來知는 虛空이나 大自然과 같다. 虛空으로부터 연기(緣起)된 가지가지 千億 萬億의
구름들은 하나같이 다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오만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虛空은 수만
억 年이 지나가더라도 세월이 흘러지나간 흔적이 없이 항상 그대로 영원하게 텅~비어 있듯이 無意識인
空, 本來知, 大自然의 경지(境地)도 虛空처럼 항상 영원하게 텅~비어 있는 平和, 적멸(寂滅)이다.
經에서 ‘生과 死가 없고(不生不滅), 늙음과 죽음(老死)가 없다’는 말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생긴 색신(色
身)을 말하는 것 아니라 연기(緣起)되기 以前의 根源, 無意識인 空을 말하는 것이다. 空이 우리들의 본분
이지 色身은 아주 잠시 잠깐 동안 드러난 연기(緣起) 작용의 실체가 없는 허망한 꿈, 신기루, 허깨비, 물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無意識인 空의 實體를 꼭 증득해야 함을
구경(究竟)으로 삼는 것이다. 無意識인 空은 배워서 알게되는 知識이 결코 아니다. 배워서 알게되는 것
은 知識에 불과할 뿐이라 知識은 결코 구경(究竟)이 될 수 없다.
無意識, 공空의 실체를 증득함으로서 우리들의 본분인 無意識 공空은 生老病死, 成住壞空, 生住離滅, 生
成消滅이 없다는 眞實에 확신이 확실하게 서게된다. 본인이 직접 증득하지 못하면 부동不動의 信, 지혜
가 없다. 신信이 확고함으로써 生과 死에 대한 공포(恐怖), 두려움이 사라진다. 信이 아니고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無意識, 空을 증득하지 못하면 그저 무의식, 공을 믿으려는 정진精進이지 확고하게 믿는 信者는 못된다.
生과 死에 대한 공포가 없는 信者가 꼭 되어야 한다. 불생불멸에 대한 신信의 부동자不動者는 공포가 없
으며 지혜로운 신信이 서지 못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살게 된다. 인간의 노력으로 살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노력이 부족하면 공포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이다.
중복된 설명이지만 無意識인 空은 識이 아니기 때문에 첩첩 비밀의 베일을 거둘 수 없고, 걷어낼 수 없으
니 그 神秘가 다함이 없다. 앞에 말한 神秘는 ‘나’라는 존재가 태어남으로서 있는 신비가 아니고, ‘나’라는
존재, 우리들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의 존재가 생겨나기 前 本來부터 있는 신비이니 하늘 땅 만물 以前
本來부터 있는 신비이니, 도대체 그 신비가 무엇인지…….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諸佛)도 다
본래부터 있는 신비를 모른다고 했다. 만약 안다고 했다면 큰 망발(妄發)이다.
우주만물의 색신(色身, 모양 모습 형상)이 다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無意識, 空, 大自然의 法(진리)는 항상
영원하게 그대로이지 어떻게 퇴색(退色)되거나 변화(變化)될 수가 없다. 萬里 밖에서 바람이 불어도 山은
항상 움직이지 않고 千年 동안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와도 바다는 무겁지 않다는 말과 같이 無意識, 空,
大自然, 眞理는 영원히, 영원히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그냥 그저 如如하다. 우리들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 색신色身 속의 無意識 공空이 眞理이고, 하늘이고, 神이고, 佛性이다.
無意識, 空은 人間의 行爲와 아무런 관계없이 本來부터 大自然이고, 잠재의식(潛在意識)은 인간의 行爲
와 그에 따른 結果들의 성분이 自己 內面性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들마다 職業이 다르고 生覺과
말과 行動이 다르다. 직업이 다르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른 그 성분과 습관들이 본인들 체내, 본인들
내면세계에 흡인吸引되어 기록되고 저장되어 있음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이다.
운전기사이면 운전기사라는 직업, 농민이면 농업이라는 직업, 상인이면 상업이라는 직업, 기술자면 기술
자라는 직업, 공업인이면 공업이라는 직업, 학자면 학자리는 직업, 정치가이면 정치가라는 직업, 예술가
이면 예술가라는 직업, 목수이면 목수라는 직업, 가지가지 수많은 직업성분들이 밖으로 겉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직업에 배인 습(習)이 자신의 체내에 스며들어 누적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 예를 든다면, 붓글씨를 한 달 연습한 사람보다 열 달 연습한 사람이 붓글씨를 훨씬 더 잘 쓰는 이유는
한 달 쓴 사람보다 열 달 더 연습한 사람의 습(習)이 자기 內面性에 짙게 스며들어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붓글씨에는 더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 아닌가.
술 중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술을 쉽게 끊지 못함은 술을 많이 마셔 술의 독기(毒氣)가 체내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체내에 잠재해 있는 술의 독이 술을 더 흡인하게 해서 자신의 의지
가 약해져 고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無意識이 하나라면 잠재의식(潛在意識)은 자기 직업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 다르니 잠재의식의 종류는
수수만 개가 될 것이다. 수수만 개의 잠재의식 등등을 일컬어서 불교에서는 총괄적으로 업(業)이라 한다.
業에는 악업(惡業)과 선업(善業)이 있게마련이어서 악업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선업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本來부터 無意識, 空은 大自然의 法이기 때문에 항상 영원하게 우리들과 한 몸으로 함께 하고 있지만, 잠
재의식이라는 業은 어느 때부터라는 작위作爲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마음공부를 해서 그 능력
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앞의 글씨가 잘못되면 뒤에 지우개로 지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악업도 강한 수행의 의지로 지울 수 있다.
수행능력이 바로 잘못된 글씨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의 능려과 같다 하겠다. 악업惡業은 지워버려야 한다.
나쁜 習慣이 바로 자기의 재앙이고, 자기의 박복(薄福)이다. 業의 習性은 어디까지나 모두 자기의 책임이
지 다른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無意識, 空, 大自然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영원하게 항상 如如함 그대로이다. 거기에는 어떤 分別도
있을 수가 없다. 대자연, 공, 무의식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밉다 곱다 하는
차별도 없다.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識이 없는 無意識, 空, 大自然에서 識을
일으키면 그 生覺 意識 마음이 곧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되는 것이다. 중생도 되고 부처도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모두는 無意識, 空, 大自然을 반드시 회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生과 死의 輪廻의 고리에서 벗어나느
길이다.
불교에서의 구경락(究竟樂)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平安, 安心立命이다. 공포가 없는 건강이다.
공포가 없는 永遠한 平和이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永遠한 自由다. 識 이전에서야 무엇이 있겠는가!
無意識, 空, 大自然, 宇宙근원에너지정보場이 바로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이다. 空은 識을 發하는 全知
全能한 존재이다. 空이 천백억의 화신(千百億의 化身)의 主人이다.부처(佛)의 구경정법(究竟正法)은 空,
空, 空일세.
잠재의식(潛在意識)은 無意識, 大自然, 空에서부터 출발한다. 識은 연기법(緣起法)이다. 무의식(無意識)
은 緣起法이 아니라 모든 識의 根本이다. 모든 識의 根源, 뿌리가 無意識, 大自然, 空이기에 모든 識과
무의식, 공, 대자연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은 하나도 아니다. 無意識, 空, 大自然이 청정법신
(淸靜法身) 즉, 비로자나佛로 부르는 것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常住不滅, 不生不滅의 존재이다.
金井山人 佛國正觀 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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