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마음>이란? ② - 지유 스님[知有哲柱] 감로법문
2014.12.25. 07:39 복사http://blog.naver.com/mcrane/220196209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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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히 아는 눈앞에 이것을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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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본심本性은 순수무구淸淨無垢하여 아무 꾸밈
<조작>이 없고, 거짓이 없는 천진天眞이다. 이 본래마음 자리<本地>는 말이나 모양
으로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말로서 알려 하고, 머리를 굴려 생각으로 이해하고 알려고 하면, 마치
동그란 구멍에 네모기둥을 맞추려는 것과 같다. 일체 사량이 끊어진 곳<非思量處>
에 사량분별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되지 않는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일체 생각을 놓아야放 비로소 비사량처에 계합契合될 것이다.
비사량非思量이라 하니 아무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목석木石같이 생각하여 멍하게
있어서도 안 된다. 사량이 아닌 곳非思量處에 뚜렷이 영지靈知가 있는 것이다.
⇨ 좌선 중에 벽을 보고 앉아 있으면 벽을 보고 있는 놈이 ‘자기’이고, 소리가 나면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자기이다. 망상妄相에 끌려 다니면 벽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속에서 알고 있는 ‘이놈’이 마음인데, 마음속에 장애물<환상>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못보고 있다. 생각으로 들으니 좋고 나쁜 것이 있지, 마음으로 들으
면 기쁘고 우울한 것이 없다. 가린 것이 없을 때 무심無心<淸淨心>이라 한다.
무심은 마음에 티끌<妄相>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임제선사臨濟禪師는 몸이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알겠느냐? 눈앞에 모양 없는 요놈이
찬 것이 오면 찬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알고 소리가 나는 줄 알고 냄새
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聽法底人> 귀가 듣고 눈이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득불 이름을 붙이자니 무일물<無一物>이라고 했다.
밖으로 찾지 마라 이미 되고 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성불하겠다, 깨달아 보겠다는
생각속에서 고민하지 말라. 당장 소리 나면 소린 줄 알고 눈앞을 보고 있지 않느냐?
대관절 무엇이 더 부족한고?<欠少個甚麼> 자기가 도道인데 어디로 찾느냐?
깨달아보겠다는 생각을 내려라. 본래성불이다.<本自具足>
<밖으로>도道를 깨닫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곳저곳 좋은 도량을 찾아 밤새도록
공부한다고 육신을 고생시키며 애를 쓰는데 꼭 그런다고 알아지겠느냐? <直指人心>
당장<當下> 애를 쓰는 자체自體가 그 자리인데..
백의관음무설설 남순동자불문문
白衣觀音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말하지 않고 말했고 듣지 않고 들었다.
생각으로 알려고 하고 말로 알려고 하면 근처에도 못간다.<心行處滅> 이 자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不立文字 言語道斷> 연야달다가 자기 얼굴을 찾는다고
사방으로 찾아 다녔는데 그러면 머리가 둘이 라는 말이 됩니다.
어떤 것이 ‘자기自己‘입니까?<무엇이 부처입니까 如何是佛> 이러니 방방이棒로
내리쳐 가르쳐줍니다. 아야!..하는 이놈!.. 이것이 자기自己가 아니고 누굽니까?
생각을 해도 자기自己이고 생각을 털어버려도 자기이다. 일체 방하착放下着 하라.
생각을 놓기위해 말을 하는데 말이 많다보니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생각을 탁 털
어 버리면 종소리가 들린다. '지금' 이 순간이 보인다.
본래마음은 애초에 무념無念이다 그런데 생각에 가려서 못본다. 자기가 망상집착
으로 말미암아 본래마음을 보지 못하고 있다. 중생은 망상집착을 ‘나’로 안다 우리
가 망상妄相을 벗어나면 영원불멸永生不滅이다. ‘나’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허공虛空Space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젖지 않고 구겨지지 않으며
꽃 피고 낙엽지고 추우나 더움에 관계 없이 낮이나 밤이나 사시장철 그대로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렇쿵 저렇쿵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은 ‘나’가 아닙니다.
소리는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인연따라
났다가 사라지지만<生住異滅 成住壞空> 나는 절대로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줄래야 줄 수 없고 받을래냐 받을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물겁입니다.
도는 그림자에 묻혀 있다.<蓋圓覺淨性> 마음은 태어난 적이 없다.<本無生滅>
마음이 그대로 근원이다.<心卽是佛 佛卽是心ㅁ心外無佛 佛外無心>
삼계는 마음으로 시작되어 마음으로 돌아온다. <三界混起 同歸一心>
이렇게 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곳은 한 군데입니다.
목무소견부분멸 이청무성절시비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浮雪거사>
성불하기 전에 성불했다. 거울은 본래 거울이지 닦아야 거울입니까?
그렇지 않죠, 부처님은 깨달은 적이 없다 이제 이 말 이해가 됩니까?
이 '마음'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기에 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과 다르기에 영지
靈知라 했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分別을 쉬었기에 마음이 고요空寂하
고 동시에 영지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공적空寂과 영지가 원만하다.
그러나 미迷한 사람은 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지 못했기에 마음이 어지럽
고<散亂> 동시에 혼미昏昧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공적과 영지가 둘 다 이
지러진缺 것이다.
공적과 영지라고 하니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자체自體가 공적空하면서 영지靈知하다는 말이다.
<종소리 나면 종소리 알고 추우면 춥다고 분명히 안다>
⇨ 제 딴에는 쉬운 말로 한다고 하는데 제 말 이해됩니까?
우리가 본심을 항상 보고 쓰면서도<삼계는 항상 마음 안에 있습니다 卽今目前現用>
이것을 모르는 것이, 우리 일상常생활에서 공기를 일분, 일초도 여의고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공기의 존재를 모르고 있듯이,
우리의 본심도 어느 곳이一切處나, 어느 시간<一切時>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했든
아니했든, 우리의 생활에서 일초도 여읜 일없이 항상恒常 같이 하고 있으나 이 본심
本心을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그 생각을 좇아, 휩쓸리니 앉으나
서나 항상 변함없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심本心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본래자리本心를 보려면 마음속의 모든 어지러운 생각<환상>을 쉬어야 한다.
마른 똥막대기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그림자<환상>에 끄달리지 말고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着得心頭切莫忘 六門常放紫金光>
우리가 어떤 물건을 관찰觀察할 때, 만일 마음속에 생각이 복잡하거나, 들떠 있으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세밀細히 관찰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안정安定되어 있는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또 괘종시계掛鐘時計의 초를 새기는 추 소리는 낮이나 밤이나 크기가 같지만 낮에는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 낮에는 주변의 소음騷音에 가려서 들리지 않는 것
이고, 밤에 잘 들리는 것은 소음이 적고 조용하기 때문이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소리를 쉬면<放下着> 본심本心을 본다고 했는데,
생각을 쉰다는 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幻相을 놓는다는 말이다.
본래자리에서 일어난 생각에 사로잡혀 이 ‘마음’이 가로막혀 진심眞心이 막힌 것이
니, 마음을 가로 막았던 생각을 놓으면 마음은 저절로 열리는 수밖에 없다.休去憩去
<생각을 싹 놓으면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古廟香爐去>
이렇게 마음속에 생각<幻相>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무 탈 없는 가슴속에 돌멩이 하
나를 집어넣고 스스로 답답하고 불안不安해 하는 것과 같다. 불안의 원인이 돌멩이
때문이니 돌멩이만 탁 털어내면 원래 탈 없던 가슴이라,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저절
로 사라지고 만다.
마음속 집착執에 얽혀 있던 생각을 놓은 자리에 드러난 본심本心은 모든 망념妄念을
여의었기에 지극히 고요空寂하고, 망념<구름>이 사라졌으니 지극히 신령靈知하다.
그렇다면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본래마음’자리는 망념이 사라졌을 때만 있고, 망념이
있을 때는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망상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조금도 변함이
항구불멸하다 다만, 망념이 있을 때는, 망념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중천中天에 떠 있는 해는 구름이 가리든, 가리지 않든, 변함이 없으나 구름이 가리면
해를 볼 수 없고, 병속의 등불도 불빛에는 변함이 없으나 병 속에 갇혀 있으면 불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망념妄念망념 하지만 망념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실체實體가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실제實際로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은 착각錯覺 때문이다. 착각은 현제 눈앞에 똑똑히
작용하는 이것을 바로 관찰하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망상>는 실지實地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실제實際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잘 못 살펴본 데서 생기는 착각錯이라고고 하겠다.
망념妄念도 마찬가지다. 모양도 없는 마음속에 망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는 것뿐
이니, 이 망념의 정체를 잡으려고 가만히 망념妄念 속을 들여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산山이 있으면 산인 줄 알고 물이 있으면 물인 줄 아는 뚜렷한
영지靈知가 있지 않는가! 이 영지靈知가 바로 자기自己의 본래 마음자리[本心]이다.
‘이 마음‘은 공적空寂하여 일체상相이 끊어졌고, 영지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이 본심은 일체 모든 생각의 근원根源이요, 일체선악善惡 만법萬法을 갖추어 있고
생사의 시발점始發點이며 종점終點인 것이다.
⇨ 아하!. 그렇구나 이놈 망상妄相 때문에 내가 못깨치니 이 망상을 없애는 법을 좀
알려달라는 분이 있다. 망상이 일어날 때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실제實際하지 않기 때문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저절로 사라진다.
<망상을 없애려는 생각이 오히려 망상을 보테는 것이다>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그랬어요 "망상이 실지實地로 있다면 여기 내놓아 보아라"
망상妄相이 실지로 있어요? 자기 생각만 털어버리면 그 자리인 것을..
光曰 我心未寧 乞師與安 師曰 將心來 與汝安 光曰 覓心了不可得 師曰 與汝安心
達磨一日 爲可大師 曰汝但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선도 악도 없을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했어요.
逢佛殺佛 逢祖殺祖 不思善不思惡 正與麽時 那汝 本來面目
⇨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 그랬어요 그러므로 몸이 아프면 마음이 편치못하다. 본체
가 움직이니까 몸이 움직인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 소를 치느냐 수레를 치느
냐 <車若不行 打牛卽是 打車卽是> 의 비유도 있지요 병의 근원은 마음이다.
『 금강경 金剛經에 실지로 도道를 얻을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잃은 적도 없다는 말
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제22분 무법가득 無法可得分>
세존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여시!여시! 수보리!
世尊! 佛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耶? 如是!如是! 須菩提!
세존이시여! 부처께서 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으신 바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러하다! 수보리 Subhuti <解空第一>야!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무유소법가득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我於阿縟多羅三藐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縟多羅三藐三菩提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뿐 아니라 어떤 법도 얻은 것이 없다 이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anuttara-samyak-sambodhi 라고 이르는 것 이니라.』
생각으로는 알 수없는 이것이 생각<幻相>을 떠나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래서 <생각을 그치고 쉬기 위해서 萬念放下> 입정入定을 하는 것입니다.
우습구나 소 찾는 자여! <可笑尋牛者>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騎牛覓牛>
도道를 찾고 있는 한 절대로 못찾습니다. 도는 찾을수록覓 멀어집니다. 왜냐?
우리는 道를 벗어난 적이 없다. 道를 깨닫고자 하는 自己가 佛(부처)다 그랬어요.
『능엄경楞嚴經』에 연야달다Yajnadatta演若達多가 거울 뒤집어 보는 바람에 얼굴
이 보이지 않자 머리를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여 失却頭 온 동네를 다니며 여보시오
내 머리 못 보았습니까?. 찾으러 다니다가 머리를 기둥에 쿵 들이박고 나서야
아이쿠야! 여기 있었네!.. 원래 없어진 적 없는 것을 알았어요.
그 아들이 물었지요 아버지 얼굴을 찾았습니까? 찾았지...
어떻게 찾았어요? 찾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본래 잃은 적이 없다>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니 본래 없어지지 않았더라, 구求하는 마음 쉬고 보니까
바로 그자리에 아무일 없이 있는 겁니다.<求心歇處卽無事> 착각을 하여 찾으러 다
닌 것이지 찾고 보니 본래 잃은 적이 없더라.
달마대사께서 2조혜慧可께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外息諸緣 상에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 헐떡임을 없애면<內心無喘 사량 분별심 없으면>바로 도에 들리라하신 것도,
도명道明상좌가 법을 얻고자 대유령 꼭대기까지 6조혜능慧能스님의 의발을 쫓아 왔
을 때 혜능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법을 위해 왔다면 모든 인연을 쉬고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라 <都莫思量>
착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한 것도<不思善 不思惡> 생각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도명상좌 본래면목은 무엇인고?<正與麼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일러보라는 말에
홀연히 계합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하며 말하기를 <言下大悟 遍體汗流 泣淚作禮>
마치 사람들이 물을 마셔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如人飮水 冷暖自知>
황벽黃壁希云선사는 맑고 깨끗한 이 본래마음은 항상 스스로 완전하게 두루 비추고
있으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 보고 듣고 분별하여 아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서 견문
각지見聞覺知에 덮인 바, 깨끗하고 밝은 본바탕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였다.
달마 혈맥론血脈論에 도는 본래 완전하여 닦아 깨달 게 없다.<道本圓成 不用修證>
도道는 소리나 색갈이 아닌 것이니 미묘하여 볼 수도 없다.<道非聲色 微妙難見>고
하였다.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 이 사과를 보는데 눈에 병病이 없고, 장애물이 없다면
만사람이 보면 만萬사람이 똑같이 붉은 사과일 것이다. 또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 여기에 남녀노소老少, 귀천貴賤 승속僧俗 빈부貧富에 달리 차이가 없다.
붉은 사과를 붉다 하고,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는 데는 만萬사람이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당연當然하기 때문이다. 만일若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
異常하다 하겠다.
당연當然한 사실事實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본래마음<淸淨自心>이다.
당면한 사실을 사실 대로 보는 데는 아무런 재주나 기교가 필요치 않다.
재주나 기교技巧를 부리게 되면 도리어 사실을 비뚤게 보게 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본심은 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 일체一切 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眞性無染>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고, 천진天眞 그대로 원래本來의 모습이다. 그런 자리에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이 붙어 있겠는가? 그래서 마음속에 품어 있는 생각<思量分別>을
놓아 버리면, 본심本心<眞性>은 보기 싫어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 본심本心은 끝없는 과거와 끝없는 미래에 걸쳐 무한한 시간 속에 단 한 번도 생멸
한 일이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동서남북, 상하
上下 공간空間속의 모든 생멸은 한 마음 속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본심本心에는 생사生死니, 번뇌망상煩惱妄相이니 하는 것이 붙어 있을 수가 없으나,
마음이 산란亂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공적空寂과 영지靈에, 어느 쪽 하나라도 이지러지면 완전하다 할 수 없다. 공적영지
空寂靈知의 본심本心은 영지靈知이면 그대로 공적空寂이요, 공적이면 그대로 영지
이니, 공적과 영지는 둘이 아니다.
⇨ 혼침과 산란을 막기위한 방편상<망상을 다스리는 방편> 화두 염불 다라니 사경
을 하고있으나, 생각을 통해서 들으니<있는 대로 들리지 않으니>시원할 리가 없다.
선지식은 ‘지금 이 자리의 나’를 확실하게 알았다하겠다. 이것은 얻었다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깨닫거나 못 깨닫거나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본래 있는圓明 자리이다.
어떤 생각<妄相>에 사로잡히면 “지금 이 자리”<靈知>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눈을 뜨고 보면 소소영영하게 볼 것이다.
참된 영지靈知는 지식분별知識分別이 아니니 공적이요,
참된 공적은 무기혼침無記昏沈이 아니니 영지인 것이다.
혼침昏과 산란散이 아닌 공적空과 영지靈가 원만한 마음이라야 마음속心의 혼침과
산란을 녹이고 양바퀴兩輪를 갖춘 수레와 같이 똑바로 전진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
의 열반 Nirvana의 언덕에 도달할 것이다.
일상의 동動과 정靜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 공적空寂과
영지靈知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昏沉과 산란亂을 녹여 가는 것이 수도修道일 것이다.
⇨ 도道는 모양이 없고, 말로 할 수 없다고 했는데 <大道無言> 제가 생각에 매이지
말라고 하면서 자꾸 이런 소리를 하니 여러분 더 복잡해지요? 제가 잘못 얘기한
것입니다.
생각을 해도 자기自己요 생각을 털어도 자기다 일체에 사로잡히지<放下着>말라.
생각<觀念>을 내려놓기위해 말을 하는데, 말이 많다보니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 기분이 나쁘다면 나쁜 생각을 탁 털어 버리면 될 것을 보물인양 놓지 못하고 있다.
그림자인 줄 알면서, 버려야 되는 것 알면서도 왜 못버리느냐? 습이 있어서 그렇다.
생각으로 들으니 좋고 나쁨이 있지, 마음으로 들으면 기쁘고 우울함이 없다.
선善한 생각이나 악惡한 생각이나 나오는 곳은 똑 같다. 흔히 골치아픈 생각에 미쳐
버리겠다고 한다. 생각이 정말로實際 있다면 여기 가져와 보라. 생각은 어디까니나
그림자<幻相>일 뿐이다.
모든 생각이 싹 떨어져 나갔을때 '지금'이 보인다! 종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이 환상幻相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고?
선도 악도 생기기 이전의 본심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결코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래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하면 이미 생각이다. 생각을 털어버리면 면전의
현실現在로 돌아온다.
깨치지 못한 사람은 늘 환상幻相에 가려져 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자기로 알거든,
《나》는 난적이 없으니 없어지지도 않는다. 왔다갔다 사라지는 것은 생각이지 나는
아니다. 나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다.《나》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도道를 얻고자 하면 이미 생각하는 것이다. <動卽魔音> 공부하여 깨달아 보겠다고
수고하지말라 여기에는 얻을 것이 없다 깨달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알고자 애쓰는 놈이 바로 요놈이라.
자기自己를 확실히 확인確認하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다.
요놈이 입정한다고 앉아서 입정入定한 것을 알지요. 죽비치면 죽비竹篦소리를 알아
먹고, 바람 부는 거 알고 책상 흰구름 모니터 글씨 보이는 것마다 다 알고 있잖아요?
하늘이 조물주造物主가 아니라 내 자신이 조물주이다. 생각을 하는데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마음에 언잖고 불편한 것들이 있으면
들고 있지 말고 탁 털어 버려라.<일체생각에 사로잡히지 마세요應無所住 而生其心>
초심자初心는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쉬우니, 동과 정에 잘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향一向<한 쪽에만>에 동動해도 안되고, 일향에 정靜해도 안 될 것이다.空寂靈知
수도<공부>가 익어가고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일체무애無碍가 될 것이다.
공중의 새가 종횡무진으로 날더라도
공중空中에 흔적痕跡이 남지 않듯이..
【 2012. 3.18 ~ 2013. 1.12 문경 관음사 】
♧ 종경송[豫章宗鏡頌] ──────────────────────────────
그대와 더불어 같이 서고 또 함께 다니며
앉고 누우며 오랜 세월 서로 같이 보냈네
목마르면 물마시고 밥 먹으며 늘 대하거늘
구태여 머리를 돌려 다시 생각 해야겠느냐
여군동립우동행 좌와상수세월장
與君同立又同行 坐臥相隨歲月長
갈음기찬상대면 하수회수갱사량
渴飮飢湌常對面 何須回首更思量
○ 자신이 도道 이거늘 어디로 찾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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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무심한.. 블로그 http://blog.daum.net/seont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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