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으로 읽는 복음] 22. 아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이것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聖靈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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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의 신비, 이 일의 역설은 이른바 세속적인 입장에서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일수록 이 일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속적으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
이 ‘아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 일을 보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방해
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는 순수(純粹)한 사람들은 본래부터 이미 오나전하게
드러나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이 일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아는 것’이란 과거의 것, 죽은 것, 수단과 방편입니다. 이 일, 이 생명, 이 진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살아서 작용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이것은 언
제나 새롭고 어디서나 신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對相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살아있는 진실이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박제가 되고 맙니다. 진리,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진실생명
은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소유할 수 없지만 분명 살아있는 것입니다. (잠시 묵상)
스스로 자신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헤아리는 마음을 텅~비우고 낮추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진리,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지만, 스스로를 채우고 높이려는 사람들에게는 진리, 하나님이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숨은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하고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이 진리, 하나님, 그것이지만, 분별하고 복잡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그 어떤 것도 진리, 하나님, 그것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진리, 하나님,
그것을 믿고 진리, 하나님, 그것에게 자신을 모두 맡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 하나님, 그것을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고, 쓰고 있지만, 따지고 分別하는 生覺 망상 번뇌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목말라 하면서 그리워 할 뿐입니다.
세속적으로 ‘아는 것'[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 지식 지견 견해 이해 관념 개념]에 가로막혀있기
에 세속적으로 ‘아는 것’보다 비교가 될 수 없는 無限大로 廣大한 이것, 진리,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차
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으로 ‘아는 것’의 배경에는 그것
을 감싸 안고,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르는 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아는 것’은 무한대로 광대무변한 이 ‘모르는 것’에 비하면 우주 가운데의 먼지 티끌만도 못
한 것입니다. 이 ‘모르는 것’ 앞에서 ‘아는 것’이 몽땅 사라져야 합니다. 이 ‘모르는 것’ 속으로 ‘아는 것’
들이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모를 때, 완전히 알게 됩니다. 알고 모름이란 相對的 分別
을 넘어서게 됩니다. (잠시 묵상)
법화경 방편품에 이르기를,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法의 實相을 다 아신다(唯佛與佛 乃能究盡
諸法實相)’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깨달음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그 아버지만이 알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그 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를 실현한 자만이 진리
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아는 것’을 초월해
서 ‘모르는 것’과 '하나'가 된 사람만이 상대적 분별 너머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싶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진리, 하나님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나’는 무엇입니까? ‘나’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는 것’
의 본바탕,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사실 그것을 아는 ‘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내 눈을 통
해서 보고 있는 ‘나’를 내가 볼 수 있습니까? 내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나’를 내가 들을 수 있습니까? 내
몸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 ‘나’를 내가 느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나’를 내가 알 수
있습니까? 현실의 나는 이 ‘나’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이 ‘나’가 무엇입니까? (잠시 묵상)
이 ‘나’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앎은 죽은 것, 과거의 것, 박제일 뿐입니
다. 그것을 아는 ‘나’는 다시 무엇입니까? 알고 싶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모르고 싶어도 도대체 모를
수도 없습니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침묵)
- 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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