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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가을, 고려인들이 황량한 들판에 버려졌다

장백산-1 2017. 8. 31. 14:12

1937년 가을, 고려인들이 황량한 들판에 버려졌다

러시아ㆍ카자흐스탄/글ㆍ김연희, 사진ㆍ신선영 기자 입력 2017.08.31. 11:35



고려인 강제이주 고난의 여정을 따라 7월24일부터 8박9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앙아시아 열차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까지 고려인의 자취를 쫓았다.

낮 12시10분. 7월24일 노을이 스며드는 하늘을 배경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 시계는 엉뚱한 시간을 가리켰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저녁 7시10분이었지만, 이보다 7시간 늦은 수도 모스크바 시간을 알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7개의 각기 다른 시간대를 넘나들며 9288㎞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모든 역이 모스크바 기준 시간을 따른다. 극동의 시계까지 뻗친 중앙정부의 행정력에서 ‘동방 정복(블라디보스토크의 뜻)’을 향한 낡은 욕망이 어른거렸다.

80년 전에도 모스크바의 권력은 연해주의 크고 작은 도시까지 뻗쳤다. 1937년 8월21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극동 지방에 사는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라”는 긴급명령을 내린다. 극동 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이주 이유를 밝혔다. 명령은 빠르고 정확하게 집행되었다. 그해 9월9일 고려인을 태운 첫 수송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이후 12월까지 고려인 약 18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2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사IN 신선영,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박8일간 고려인의 자취를 쫓았다.

2017년 여름, 그 여정을 되짚어보고자 탐방단 한 무리가 시베리아를 찾았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이하 회상열차)’는 7월24부터 8박9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앙아시아 열차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까지 고려인의 자취를 쫓았다. 공동대회장인 함세웅 신부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해 대원 84명이 여행길에 올랐다. 열차 탑승 30분 전,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역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탑승 플랫폼까지 짐을 옮기던 대원들이 황급히 열차에 올랐다. 7월24일 저녁 7시10분 기차가 출발했다.

고려인인 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씨(62)도 회상열차에 탑승했다. 김씨 부모는 연해주의 작은 도시인 우수리스크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사범대학을 졸업해 한글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강제이주를 당한 이후 콜호스(집단농장)에서 농사를 지었다. 고려인 강제이주 이듬해인 1938년 스탈린은 고려어를 소련 내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어 수업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 이후 학교를 다닌 김씨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시사IN 신선영,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김 블라디미르 나우모비치 씨가 동행했다.

김씨가 태어난 1955년 무렵 가족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자리를 잡는다. 김씨는 강제이주 이후 세대이지만 이웃에 살던 고려인들이 아버지 노래를 들으러 찾아오던 기억이 또렷하다. 노래 솜씨가 좋았던 아버지가 고려어로 된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눈물을 찍어냈다고 한다. 김씨는 “가지 가지 마요, 떠나가지 마요”라고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헤어짐의 아픔을 담은 노래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문학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다. 2011년 정년퇴직 후 한국에 들어와 광주광역시 고려인 마을에 정착했다. “펜 말고 평생 무거운 걸 들어본 적 없던” 김씨는 한국에 온 뒤 공장에서 일했다. 올해 2월에는 한국에 와서 쓴 시를 모아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을 출간했다. 시는 러시아어로 썼고, 정막래 전 계명대 교수가 번역했다. 이번 회상열차에 정 전 교수도 함께했다.

김씨 부부에 이어 딸과 사위, 아들도 한국에 들어왔다. 4월에는 손자 김 마르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 회상열차 이튿날인 7월25일은 마르크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손자의 백일을 맞아 김씨는 위스키를 준비했다. 열차 4인실 칸에 일행 몇몇이 둘러앉았다. 마르크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고 TSR(시베리아 횡단철도 로고)가 새겨진 유리잔에 담긴 위스키를 홀짝였다.

열차 탑승 이후 65시간가량이 지난 7월27일, 열차 오른쪽 창으로 바이칼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 오로지 하늘과 호수가 평행선을 그릴 뿐이었다. 바이칼 호수를 끼고 열차는 4시간을 더 내달렸다.

ⓒ시사IN 신선영, 회상열차가 바이칼 호수(왼쪽)가 보이는 이르쿠츠크를 지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횡단열차는 러시아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향했다.

“선생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바이칼 인근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내려 1박을 한 회상열차 대원들은 다음 날인 7월28일 바이칼을 찾아 고려인의 넋을 기리는 진혼제를 열었다. 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씨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수많은 고통을 겪은 내 민족은 무너지지 않았노라 / 그 누구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었노라 / 그 당시에 무얼 위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했나 / 나는 아무리 악한 적에게라도 이렇게 행하지 않으리라 (후략)”

ⓒ시사IN 신선영,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열린 진혼제에서 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씨가 시를 낭송했다.

7월30일 회상열차는 총 105시간을 달려 노보시비르스크역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데, 소비에트연방 시절 무기 생산 전진기지였다. 도시 중앙에 남아 있는 레닌 동상에서 이 도시가 품고 있는 향수가 묻어나는 듯했다.

또 다른 고려인 참가자인 김 블라디미르 나우모비치 씨(71)는 레닌 동상을 두고 ‘레닌 동지’라 부른 후 멋쩍게 웃었다. 그 역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출신이다. 그는 현재 타슈켄트에 살고 있다. <레닌 기치> 타슈켄트 지국 특파원을 지낸 그는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한다.

ⓒ시사IN 신선영,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김 블라디미르 나우모비치 씨가 동행했다.

<레닌 기치>는 94년 전통을 가진 고려인 신문이다. 1923년 <선봉>이라는 제호로 창간한 뒤 강제이주 이후인 1938년 <레닌 기치>로 이름을 바꾸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고려일보>라는 제호로 명맥을 이어왔다. 한때는 전면을 한국어로 발행했으나 지금은 전체 발행 면수 16쪽 가운데 4쪽만 한국어판이다.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독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46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에서 태어난 김씨는 13남매 중 막내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던 부모는 당시 모든 고려인이 그랬듯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했다.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자 맏형은 소련 당국에 선발돼 한반도 소련군 관할구역으로 파견됐다. 맏형을 따라 김씨 가족도 한반도로 갔다. 김씨는 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씨는 자전적 에세이 <멀리 떠나온 사람들>에서 “북한 아이들은 우리를 조선 사람이 아닌 소련 사람으로 여겼다”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번듯하게 자리 잡은 고려인들이 갖는 자긍심을 대표했다. 강제이주를 ‘민족의 비극’으로만 생각하는 우리 정서와 김씨와 같은 당사자의 자기 서사가 반드시 같지만은 않았다. 김씨는 강제이주라는 용어 대신 ‘특별이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을 이끌었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도 짙었다. 그는 <멀리 떠나온 사람들> 서문인 ‘페레스트로이카의 해에 태어난 내 어린 아들 빠벨에게’에서 아들이 겪을 혼란을 염려하며 이렇게 조언한다. “한국은 우리 조상들의 나라이며 우즈베키스탄은 우리 후손들의 나라이다.”

열차 식당 칸에서 시베리아 맥주인 ‘시비리스카야 카로냐’를 앞에 두고 김씨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 원로 기자는 이제야 좋은 질문이 나온다며 시 하나를 소개했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 시인이 쓴 시가 있어요. 쿠르드인과 나눈 대화가 소재예요. 쿠르드 민족은 나라가 없어요. 쿠르드인이 이 고려인 시인에게 말해요.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너는 고향이 두 개 있는데 한국과 카자흐스탄. 나는 하나도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고향이 두 개예요. 얼마나 좋아요. 그거에 대해서 누가 비판해요?”

현대사 비극 증언하는 시멘트 비석 하나

ⓒ시사IN 신선영 기자,  열차가 멈추는 역에서 승객들이 먹을거리를 사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회상열차는 133시간여를 달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향했다. 이곳에 도착한 대원들을 한복을 입은 고려인들이 맞았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중앙아시아 철도로 갈아타는 분기점이다. 7월30일 오후 6시34분, 모스크바 기준 오전 11시34분, 중앙아시아 열차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차창 밖으로 내내 펼쳐졌던 자작나무 숲은 어느새 건조한 초원 지대로 바뀌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4개의 시간대를 통과했다. 시간관념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대륙을 질주하는 열차에서 시공간의 경계는 자연스레 흐릿해진다.

ⓒ시사IN 신선영,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세워진 비석은 고려인 강제이주를 증언한다.
ⓒ시사IN 신선영,  회상열차 대원들은 8월1일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바슈토베 무덤에서 이들을 위한 진혼제를 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500㎞, 133시간을 달린 끝에 회상열차는 8월1일 종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1937년 가을, 고려인들은 이 황량한 들판에 버려졌다. 우슈토베의 바슈토베 마을은 최초 이주한 고려인들이 겨울을 났던 곳이다. 건조한 대지 위에 세워진 시멘트 비석 하나가 현대사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정착지이다.’ 토굴 터 맞은편에는 고려인 무덤이 모여 있었다. 한식이면 ‘산에 간다’며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조응선 1871~1951’ ‘박 예브토리아 1888~1969’ ‘이 타트야나 1935~2014’ 고려인 묘지 100여 기가 허연 흙무덤에 덮여 있었다. 봉분은 만들었지만 메마른 기후 탓에 떼는 입히지 못했다. 누런 풀이 돋아난 무덤 위로 바람이 불었다. 중앙아시아의 따가운 태양 아래 뽀얀 흙먼지가 일었다.

러시아ㆍ카자흐스탄/글ㆍ김연희, 사진ㆍ신선영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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