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은 또 다른 광주 역사요, 광주 시민이다"
김영집 입력 2017.09.04. 18:41
[오마이뉴스김영집 기자]
▲ <나는 고려인이다> 공연 중 한 장면. |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이 공연에는 자그마치 180여명이 출연했다. 최영화 교수가 연출했는데 그는 '고려사람...강제이주 80년이 남긴 생채기를 예술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해 만들었다고 한다. 1부 사라진 아리랑 2부 일어서는 아리랑 3부 기억하는 아리랑을 감상한 1천여 고려인과 시민들은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고려인의 애절한 삶과 굳센 의지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홍인화 고려인마을 상임이사의 초대로 작년 9월 2~3일에 빛고을 시민문화관에서 '나의 고향 연해주, 타슈켄트, 광주'라는 고려인들이 만든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다. 광주에 고려인들이 살고 그들의 애환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이 넘는다. 구한말 나라의 피폐와 일본의 조선강점에 따라 핍박받던 민중과 독립운동가들이 백두산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연해주로 갔다. 그들은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그리며 일제와 싸우는 독립운동을 했고, 거치른 땅을 일구면서 살았다.
연해주 고려인들에게 내려진 강제이주명령서
그러던 1937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은 연해주 고려인들에 대해 강제이주명령서를 내렸다. '극동 지방에서 일본 간첩 침투의 차단을 목적'을 명분으로 취한 조치였다. 피와 땀을 흘리며 겨우 정착한 연해주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17만 고려인들은 자기의 집과 땅과 일구어 온 모든 것을 잃고 강제로 기차에 태워졌다.
어딘가 알 수도 없는 곳을 향해 끝없이 가는 기차 안에서 고려인들은 굶주림에 죽었고,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기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사실 이것은 일제와 투쟁하면서 소련혁명을 도왔던 조선인들에 대한 소련의 배신적인 행위로 오늘날 러시아는 이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그 황량한 황무지에 고려인들은 버려졌고, 거기에서 거친 땅을 일구고 감자와 밀을 심어 생존해왔다. 그러다 추위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2세 3세를 낳았다. 소련에서 살아가지만 고려인들의 조국은 고려이고 조선이고 한국이었다. 그래서 고려인학교를 만들어 2세 3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고, 아리랑과 우리의 노래를 불렀다. 사는 땅이 러시아이기에 러시아말을 쓰지만 조국의 언어와 문화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민족의 혼이 살아 있도록 노력했다.
고려인들의 꿈 중 하나는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러시아인이기 전에 고려인,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문화도 같은 그들이 조금 다른 것은 우리말에 익숙지 못하다는 것뿐이었다.
그 고려인들이 2010년 전후로 고향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생을 그리워하던 그들의 조국은 고려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말을 잘 못 하기에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겨우 잡은 공장이나 일터에서는 임금을 체불하거나 성희롱을 하거나 핍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은 범죄의 사각지대가 되기도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고려인들의 국적과 비자문제다. 고려인 1세들은 강제로 조국을 떠난 것이고 조국의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낳아 기른 자녀들은 2세든 3세든 4세든 우리의 민족이며 동포의 자격이 분명하다. 고려인들의 국적회복과 국적취득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4세 이후로는 더욱 더 그렇다.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은 3년마다 출국해서 다시 절차를 밟아 방문취업비자(H2)를 갱신해야 입국할 수 있다. 19~24세의 고려인 4세, 5세들은 재외동포법상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와 공부하거나 일하고 있어도 비자문제 때문에 유효기간인 3개월이 넘으면 러시아에 다시 갔다 와야 한다. 청년들은 비자를 갱신해 와도 불법취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고려인들을 대하는 우리나라의 태도
▲ <나는 고려인이다>의 한 장면 |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왜 고려인들의 국적회복과 취득을 어렵게 하는가. 고려인 4세 이후 세대가 조국에 들어와 공부하고 정착하는 것을 왜 돕지 못 하는가? 왜 우리 주변에 사는 고려인들을 냉대하고 핍박하는가? 그것이 150여년 넘게 조국을 그리워해오면서 버텨왔던 고려인들에게 해야할 같은 민족으로서의 태도인가? 정부와 국민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인들의 국적문제에 대해 벌써 10여년째 말만 하고 특별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에게도 당신들이 정말 민족에 대해 아느냐고 묻고 싶다. 고려인인 한국경제를 어렵게 해서인가? 고려인을 품으면 민족의 외연이 확장되는 더 큰 우리의 자산이 아닌가? 왜 그런데 그들을 못살게 하나? 그래서 고려인들은 외치고 있다. '나는 고려인이다'고...
다행히도 광주는 고려인들의 고향이 되고 있다. 지금 4천여 명의 고려인들이 광주에 산다. 그들은 고려인의 타운을 만들었고 고려인 학교를 만들었다. 고려인 방송을 만들고 고려인 코뮤니티를 광주에 만들었다. 처음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초기에 새날학교(교장 이천영 목사)와 기독교방송 등이 고려인들을 도왔다. 2013년에 홍인화 시의원 등이 주축이 되어 전국 최초로 '광주시 고려인 주민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그리고 이번에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박용수 위원장)를 만들어 '고려인 국적회복 특별법제정'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세미나, 고려인들의 유물들을 전시한 '점 선 면 전시'와 '나는 고려인이다'라는 대규모 공연을 열게 된 것이다.
행사를 총 주관한 박용수 추진위원장은 공연후 "고려인들의 피맺힌 수난사와 함께 질경이 같은 삶의 환희가 2시간 동안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라며 "그것은 감동을 넘어 정확히 광주사람들과의 동질성, 일체감이었다. 학살과 저항, 부활의 역사가 5.18광주의 궤적과 닮았다. 고려인들은 또 다른 광주 역사요, 광주 시민이다"라고 말했다.
강제이주 80년, 고려인들 법적지위 개선해주길
이 행사의 학술세미나를 담당하고 고려인 지원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홍인화 고려인마을 상임이사는 "광주시민이 고려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한 방법을 같이 모색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참여해 준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기념식과 학술세미나 공연은 끝났지만 '점, 선, 면 유랑의 역사' 전시회는 9월 30일까지 아시아문화전당 전시실에서 계속된다.
지금 고려인들은 광주에서 많이 살고 있으나 경기도 안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다. 광주시가 인권과 평화의 도시 이미지처럼 고려인들에 대해 보다 앞서 나가는 고려인을 품는 정책과 문화를 펴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 또한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고려인들의 처지는 매우 어려운 상태로 확인되고 있다.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우리 정부와 국회가 고려인에 대한 법적지위를 확실하게 개선해 주길 기대한다. 더불어 우리 민족 더구나 끈질기게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고려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따뜻한 시선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민족 구성원으로서 고려인을 돕고 품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고려인이다'고 외치는 고려인들의 절규를 내내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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