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후 신령한 성품은 어디에 의지합니까?
당나라 상서(尙書)인 온조가 규봉 종밀스님에게 서신으로 물었다.
“이치를 깨달아 분별 망상 번뇌 망념이 쉬어버린 사람은 다시는 업(業)을 짓지 않으니, 한 세상 수명이
다하여 죽은 후엔 그의 신령한 성품은 어디에 의탁하게 됩니까?” 하니 종밀스님은 서신으로 답하였다.
“일체 중생, 우주만물 모두가 텅~비고 고요하여 신령하게 아는 성품(공적영성 空寂靈性)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법신부처님(法身佛)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같은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고 부질없이 육신(肉身)에 집착하여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생각
(我相)을 내기 때문에, 허망한 분별인 사랑과 미움 따위의 정(情)이 생겨나고 그 정(情)을 따라 업(業)을
짓고 업(業)을 따라 과보(果報)를 받게 되어 영겁토록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속의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성품(공적영성 空寂靈性)은 생겨나거나 죽는 일이 없으니 이는 마치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어도 몸은 두려움 없이 편안한 것과 같으며, 또한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도 물의
본래 성질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것, 우주만물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법신(法身), 즉 진리의
몸이니, 법신(法身), 즉 진리의 몸인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은 원래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인데 생겨나지도 않은 것이 어느 것 어디에 의지할 것이 있습니까? 텅~비고 고요하여 신
령하게 아는 성품, 법신(法身)은 신령하고 어둡지 않고, 밝고 밝아 항시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만 법신(法
身)은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습니다(不去不來).
그러나 여러 생을 윤회하면서 분별 망상 번뇌 망념과 집착을 익혀 익힌 그것이 습기가 되어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등이 미세하고도 끊임없이 공적영성(空寂靈性)을 침범하여 들어오니, 영특하게 깨달은 사람이라도
이같은 침범을 갑자기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오래도록 이와 같은 침범을 살피고 살펴서
줄이고 또 줄여가야 합니다.
이는 마치 바람이 일던 바다에서 바람이 갑자기 멈춰도 출렁이던 물결은 서서히 잠잠해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몸을 한 번 닦아서 갑자기 부처님의 기용(機用), 즉 법신(法身)과 같아질 수 있습니까? 다만 공적(空
寂)으로 본체(本體)를 삼을지언정 분별 망상 번뇌 망념을 공적한 본체라고 오인하지 말아야 하며, 텅~비어
고요하여 신령하게 아는 앎, 공적영지(空寂靈知), 참된 앎(眞知)을 본심(本心)으로 삼아 분별 망상 번뇌 망
념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분별 망상 번뇌 망념이 일어났다 하여도 그 분별 망상 번뇌 망념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
러도 자연히 업(業)이 그대를 얽어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즉 분별심(分別心)이
없다면 생(生)과 사(死)를 거듭 윤회(輪廻)하는 몸을 받지 않으므로 자연히 짧은 목숨이 장수하게 되고 추한
것이 아름답게 됩니다.
또한 미세하게 흐르던 모든 분별 망상 번뇌 망념이 고요해져서 원만하게 깨달은 큰 지혜만이 오롯이 빛나면
원만하게 깨달은 큰 지혜가 곧 천백억 가지 몸을 나투어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게 되니 이를 이름하여 불
(佛), ‘부처’라고 부르는 겁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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