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一乘)의 불과(佛果)는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라면 누구나 '깨달음의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니만 그 사람들이게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인연(因緣)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허망한 그림자 놀음일 뿐이라고 아무리 계속 일러줘도 막무가내로 알아듣질 못합니다.
미혹했다가 나중에 깨닫는 거라면, 이건 분명히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들, 즉 '생사법'(生死法), 생멸법(生滅法), 분별법(分別法)이요, 항상하는 것이 아닌 것들, 즉 '무상법'(無常法)임이 틀림없는데도,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혹함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그만두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깨달음을 얻는' 그 결정적인 '한 순간'을 맞기 위한 노력을 쉬지 못하고 허망한 짓만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에선 자칭 일부 앞서 나간다는 사람들, 영리한 사람들은 허망하게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앞으로는 도착해야 할 '마을'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뒤로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 '고향'에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로 그 자리, 텅~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에서 몰록 활로(活路)를 얻어야 한다」고 한 고인(古人)의 말이 절실한 대목입니다.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가고 가도 본래 그 자리고 도착하고 도착해도 출발한 그 자리가 바로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입니다.
결국 이 '깨달음의 길'에서는 어느 누구도 내게 도움을 줄 수 없고, 또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게 바로 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입니다. '하나'의 길이라고 말은 하지만 본래부터 일승(一乘), 깨달음, 道, 진리, 法, 본래마음, 본래의 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거기에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늘 서울에 있는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에 앉아있는 사람이'서울'로 가는 길을 묻고, 또한 서울로 빠르게 곧바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 그런 바보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일러주어야 할까요?
그러므로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진실은, 오직 자신이 영겁 전에서부터 일찍이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그 자리'를 여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 자리'를 여의는 적이 없을 것임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각(正覺, 올바른 깨달음)'을 이룬 '때'>입니다. 아득한 억겁의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온갖 때'가 바로 이 <'정각'을 이룬 '때'>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法, 진리, 道, 일승(一乘),본래마음, 본래의 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바로 본래 그와 같다>고 하는 게 내가 말하는 이 법문(法門)의 핵심(核心)입니다.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온갖 <시간의 본체>요, '깨달은 때'와 '깨닫지 못한 때', '성불한 때'와 '성불하지 못한 때'가 모두 '정각(正覺)을 이룬 때'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가 통하면 곧 일체가 다 통해서,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원인'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결코 '시간'이 벌어지는 일이 없는 겁니다. 무량한 시간이 한 순간이고 한 순간이 무량한 시간입니다. '정각'을 이루고 보면, 다만 '성품'에 맡겨서 '흐름'을 따를 뿐, 무슨 일이건 공력(功力)을 들여서 이루기를 애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도 또 잘못 알아들을 소지가 많으니 공연히 노파심이 발동해서 부연하지 않을 수 없군요. ― 지금처럼 매사에 열심히 공(功)을 들이고 땀을 흘리면서 노력하는 공력이 바로 이대로인 채로 '하는 자'도 없고, '공력을 들이는 주체'도 없는 것이며, 이 모든 일이 다만 인연(因緣)을 따라 감응(感應)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응현(應現)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 다시 요약하면 '처음'과 '끝'이 다 '부처, 깨달음, 道, 본래의 나, 진리, 法,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불과'(佛果)에 들어서는 것이 '한 찰나'를 넘기지 않으나,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에 막힘으로서 방편으로 '무량한 겁'(無量劫)을 설하게 된 것이니, <모든 것을 통틀어 '한 때, 한 찰라'를 옮기지 않는 까닭에>, 곧 '범부의 자리'에서부터 처음 '견도하는 경지'(見道位)에 이르기까지 원인과 결과가 '한 때'(一時), 한 순간, 한 찰나이기 때문에 도무지 원인과 결과의 전후(前後)가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느니라. 따라서 <성불하지 못한 때>를 보지 못하고, <'정각'을 이룬 때>도 보지 못하며, <'번뇌'를 끊은 때>도 보지 못하고, <'보리'(菩提, 깨달음, 성불)를 터득한 때>도 보지 못하나니, 필경 조그마한 생각도 옮기지 않으면서 50위(位)를 원만히 수습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모두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별 동이 성괴(總別 同異 成壞 ; 전체와 개체, 같음과 다름, 이루어짐과 허물어짐) 가 일시(一時), 한 순간, 한 찰나에 모두 자재하여> 이 모두가 '인간의 생각이나 분별로는 볼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이 같은 진실을 믿기가 어려운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진실이 사실이 그와 같다면 지금 우리들의 '마음'은 과연 그 속내가 어떨까요? 범부와 성인이 한 자리요, 깨달음과 미혹함이 그 본성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낸 마당이니, 이제부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도 뭔가 보다 성숙되고 침착한 면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입니다. ― 마음에 마땅한 건 취하고, 마음에 마땅치 않은 것을 제거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 그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그져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아무 분별하고 차별하는 생각없이 그냥 보자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여기서도 또 하나 꼭 주의해야 할 점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는 '살피는 자'로서의 <'나'의 목적의식> 같은 게 전혀 끼여들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는 '관찰의 주체'인 '나'가 있어서, 저만큼 떨어져 있는 '관찰대상'인 '마음'을 살펴보는 그런 메커니즘이 아니라, 다만 '마음이 마음 스스로를 '자각'하는 겁니다.
이 '자각(自覺)'이라는 말도 세상에서 사용되는 사전적 의미의 '자각'이 아닙니다. 마음이 마음 스스로를 자각한다 함은마치 이미 불이 켜져 있는 촛불을 밝히기 위해 또 다른 촛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촛불은 다른 것도 다 밝혀 비추지만, 동시에 촛불 자신도 비추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입니다. 요령만 알면 회광반조하는 이것처럼 쉬운 일이 없는데, 사람들의 분별하는 마음이 워낙 밖으로만 내달리던 버릇이 있기 때문에 "빛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을 비춰 보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뒤로 돌리라는 것으로 알아듣고는, 공연히 뒤쪽을 힐끔거리는 거예요.
이제 일도양단(一刀兩斷)할 때가 왔습니다. ― 본래 '마음'은 일찍이 밖으로 돌아다니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지금에서야 새삼스럽게 안으로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겁니다. 텅~비고 확 트인 허공(虛空) 같은 마음에 무슨 '밖으로 향하고' '안으로 돌이키고' 해야 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동안선사(同安禪師)의 게송을 한번 더 인용해야 되겠군요. '그물 코가 촘촘하지 못한 그물'을 벗어난 살아있는 잉어는 여전히 물 속에 머물고, 길 머리를 돌린 '돌말'(石馬, 살아있는 말이 아닌 돌로 만든 말)이라야 비로소 비단으로 짠 그물 코가 촘촘하지 못한 그물을 벗어나리라.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온갖 잡동사니들, 잡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은 또 그 모든 잡된 생각들을 어떻게 하면 말끔히 쓸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가세해서 더욱 어지러운 마음상태구요. 온갖 것의 '있고 없음'을 비롯해서 '물들고 깨끗함',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의 분별심(分別心)이 서로 얼키설키 뒤엉켜서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는 마음이 범부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정견(正見, 올바를 견해)'를 기대할 수가 없지요. 모든 것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제아무리 훌륭한 법문(法門)을 들어도 그 법문(法門)을 모두 자신의 속(俗)된 바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알맞은 방편(方便)이나 수단이나 도구쯤으로 알아듣고 멋대로 허망한 지견(知見)을 굴리기가 십상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분별하는 그 마음이 '깨달음의 경지'니, '성인의 지혜'니, '서방정토'(西方淨土)니 하는 말들, 개념(槪念)들에 단단히 붙들려버려서, 끝내 자신의 청정한 자성불(自性佛, 텅~빈 바탕자리, 부처, 道, 깨달음, 본래의 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등지고는 올바르게 돌이킬 줄 모르는 겁니다. 그 마음이 늘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세월에 '마음'을 밝힐 수 있겠어요?
'불법'(佛法), 道, 부처, 진리, 깨달음, 본래의 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결코 사람들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마음으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설사 眞理, 道, 法, 본래의 나, 깨달음, 부처를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마음, 즉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정교하게 헤아려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식(意識)'의 한계성(限界性)과 분별성(分別性) 때문에 끝내 진리, 道, 法, 본래의 나, 깨달음, 부처, 본래마음에 대한 '의심의 그물'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영리한 사람일수록 더욱 심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뭐든지 듣기 무섭게 척척 다알아버립니다. ― 사람이 '뭔가'를 이해하고 알 때, 사실은 뭔가를 직접 이해하고 아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 가운데서그 뭔가와 비슷한 걸 찾아내서 그것을 머리에 떠올려서, 그것을 보는 것을 이래하고 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 앞에 있는 그것을 직접 보는 게 아니고, 묵은 기억 속의 한 토막을 되살리는 걸 가지고, 「'그것'을 이해했다, 그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착각할 때, 기억 속에서 뭔가와 비슷한 걸 찾다가 찾지 못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구요. 마치 눈을 감은 사람이 코끼리의 배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마치 평평한 벽과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다가 눈을 뜨고 코끼리 전체를 보고 나서야 자기가 알았던 코끼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우치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사람들이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마음,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 지식, 알음알이로써 뭔가를 이해하고 안다는 게 ― 그 뭔가를 알건 모르건 간에 ―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편 이와 같은 인식작용의 허망한 허점(虛點)을 알아차려 깨우친 사람은, 이번엔 사량분별심으로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는 대신에, 반대로 그 사량분별심, 알음알이를 억눌러서 끊어버리려고 하던가, 회피하려고 하던가 하면서, 더욱 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서> 마음과 생각을 인위적으로 조작(造作)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신은 '올바른 수행'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기껏해야 '성인의 말씀'만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 믿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경직되어 유연함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승(一乘)'의 도리(道理)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으로써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오직 오래도록 '무심 무념'(無心 無念)에 있어서, 마침내 '괴로움'도 싫어하지 않게 되고, 또 '고요함'을 좋아하거나 '고요함'에도 머물지 않는 일 없는 한가한 사람과, 또한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참된 해방'을 얻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그러므로 저절로 사람들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인원적인 조작이 몰록 쉰 게 바로 이 '일승(一乘)의 도리'예요. '즐거움'과 '괴로움'이 같은 하나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동등하니, 다시 더 사량분별심으로 더 무엇을 조작할 일이 있겠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분별 망상 번뇌'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텅~빈 바탕자리, 즉 출세간법(出世間法)은'분별 망상 번뇌'가 없는 고요하고 텅빈 자리 청정한 자리'인데, 그런데 이 '세간'과 '출세간'을 몽땅 벗어나기를 바라는 저 삼승(三乘 :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들, 즉 '분별 망상 번뇌 있음'과 '분별 망상 번뇌 없음'의 양변을 몰록 넘어서기로 작정한 '삼승의 보살'들은 그 기세가 지나쳐서, <함이 없고 분별 망상 번뇌 없는>(無爲無漏) 자리에 치우쳐 버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박'이나 '분별 망상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별 망상 번뇌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내서는 그 원인을 뿌리째 끊어버림으로써, 즉 발본색원(拔本塞源)해서, 다시는 그 원인을 되풀이하지 않게 됨으로써 속박이나 분별 망상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곧 그런 사람들은 인연법(因緣法)의 '남(生)이 없는 도리(無生의 도리)'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처, 道, 깨달음, 法, 본래의 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의 지음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에 의지하는 이 '일승(一乘)의 길'은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의 '분병 망상 번뇌 없음'(無漏)>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범부의 살림살이는 모두 <세간법을 따르는 행위뿐>이고, 삼승의 그것은 오직 <세간법을 여의는 행위뿐>인데 비해서, 이 '일승(一乘)의 길'은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닙니다>. 즉 능히 이 '세간'을 따르면서 두루 행하나, 전혀 세상 일에 끄달리거나 물드는 일이 없는, 이른바 널리 지혜롭게 행하는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삼계'(三界), 즉 '탐욕이 치성한 세계'(欲界)와 '미묘한 형색(形色)의 세계'(色界)와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無色界) 등은 이것이 모두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思議法)이며, 또한 '삼승',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이나 보살의 법(菩薩法) 등도 역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다 <얻을 바가 있는 법>(有所得法)들이지 얻을 바가 없는 법(無所得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승(一乘)의 지혜 경계'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법>(不思議法)입니다. 왜냐하면 일승(一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道, 진리, 法, 깨달음, 부처, 본래의 나, 이 자리가 <얻을 바가 없는 법>(無所得法)이기 때문입니다. 즉 '고요함과 작용'(寂用)이 둘이 아닌 크게 자재(自在)한 경지이니, 무엇을 특별히 얻을 것이 있겠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경우는, 그것이 삼계(三界)의 중생이건, 이승(二乘)이나 정토보(淨土菩薩)이건, 이런 건 다 <과보가 있는 모습>(有報相)인데 비해서, 오직 이 '일승(一乘)의 불과(佛果)'만은 '물들은 마음 깨끗한 마음'(染淨心)이 본래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에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중생들이 즐겨하고 원하는 바를 따르면서 우주삼라만상만물의 모습을 나투어 보이기를 마치 둥글고 맑은 거울이 모든 것을 분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름지기 '부처 지혜'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한 마음'을 같이 하면서, 전적으로 그 '마음'이 보는 바에 맡기는 것이니, 곧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들'이 본래 이와 같음을 알아서 그 작용이 가고 옴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무릇 진실한 현상(것)은 '제 모양'을 버리고 '다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정각' 아닌 것>(不覺)을 버리고 <평등한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룬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들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모두 '깨달음의 자리'(覺位)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확실하게 깨우쳐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의 깨달음'이 '모든 깨달음'이어서, 항상 '정각'을 이루었고, '불각'일 때가 없는 겁니다. 마치 '허공'이 맑고 고요해서 이루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시법주법위 세간상상주(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라고 즉,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은 진리의 자리에 있는 것임으로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루어짐'과 '이루어지지 않음'이라는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 마음으로 일으키는 지견이니, 만약 '텅~빈 바탕자리의 지혜'로써 비춘다면 어디를 간들 진실하지 않은 게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량분별하는 생각생각마다 항상 '법신'(法身, 텅~빈 바탕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道, 부처, 진리, 法, 깨달음, 본래의 나)를 보게 되고, 티끌티끌마다가 늘 극락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조주(趙州)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학인(學人)이 처음으로 총림(叢林)에 들어왔으니, 스님께서 지시(指示)해 주십시오.』하니, 조주선사가 말하기를 『죽(粥)을 먹었는가?, 『먹었습니다.』하니 그럼『밥그릇을 씻어라.』 하자, 중이 이에 활짝 깨달았다고 합니다. 혜림 선사(慧林禪師)가 이 화두를 들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죽 먹은 뒤에 밥그릇을 씻으라 하니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가끔가끔 거칠어지네. 아무리 이 말의 뜻을 분명히 안다 하여도 한 평생 졸장부를 면치 못하리라.>
불안원(佛眼遠)아라는 스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 이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말하기를, 『조주가 "밥그릇을 씻어라"고 한 말에 그 중이 활연(豁然)히 '돌아갈 곳'을 알았고, 조과(鳥 )가 베올을 불어 날리자 시자(侍者)가 그 자리에서 단박 깨달았다고 하니, 이 깨달음은 '그것'("발우를 씻어라"고 한 말이나, 베올을 불어버린 일들)들에 의해서 밝혀낸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견해'를 토로한 것인가? 이 깨달음은 '그것'들에 의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고, '자기의 견해'를 드러낸 것도 아니니라. 알겠는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있는 성품'을 그대들은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했다고 합니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 가산님 제공/ 다음 카페 무진장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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