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원하면 `마음 비우는 일부터` / 시명 스님
불교에서는 원(願)이라고 하지 않고 원력이라 합니다. 원(願) 소망(所望)이지만 거기에 그 원을 이룰 수
있는 힘, 즉 원력(願力)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한다고만
해서는 다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보태져야 할 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원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불행하고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원력(願力)을 세워야 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길 바라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떤 원(願), 바람이 있겠죠. 법당에 온 이유도 원하는 바가 있는데 내 힘이 부족하니까
부처님에게 격려 받으러 온 것일 겁니다. 세상사 헤쳐나갈 수 있게 용기를 주시고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겠죠. 그래서 뭔가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용기를 갖고 해낸 것입니다.
부처님은 도와주시는 거죠. 부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그러니 절에 올때는 원력을 세워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세 가지를 회향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중생회향'입니다. 중생을 먼저 건지겠다는 서원이 없으면 기도를 열심히 해도 반쪽 밖에 안
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비로소 '자기를 위해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늘 세 번째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는 소승(小乘), 즉 작은 배를 만들려고
하는 기도밖에 안 됩니다.
앞으로는 기도를 할 때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빈자든 부자든 차별없이, 기도하는 순간은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하길 바란다고, 이 기도가 그 사람들의 가슴에 가서 작은 소망을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소망을 이루면 곧 내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관세음보살을 닮고 배워 관세음보살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
아닙니까. 천수경의 근본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는 데 있습니다. 비록 원수라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기도 끝에 '아버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염원이 이 땅에 널리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나 자신의 원보다 관세음보살의 원이 먼저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의 원력을 이루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세음보살 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떠나길 바랐습니다. 왜죠? 그 곳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문 입구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고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원한 고통으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혼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나를 지나가는 자는 온갖 희망을 다 버릴지어다. 이처럼 지옥은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부처가 될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늘 고통을 받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것을 생각하기는 커녕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옥은 절망스럽죠.
살아가는데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결국 지옥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진정으로 죄를 뉘우친다면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참회를 하지 않으면 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새로운 마음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내가 잘해왔다고 믿는 사람은자신의 행동을
고칠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잔에 물이 찼는데 새로 물을 채우려면 있던 물을 비워버려야 하는 게 이치입니다. 물이 꽉 차 있는데 더
채울 수가 없듯 우리 마음도 비워버리지 않으면 더 이상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마음 비움'에 대한 불사(佛事)여야 합니다.
있던 집을 새로 지으려면 있던 집을 허물어야 하듯, 일상의 모든 묵은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참회하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됐구나, 이것이
장애가 돼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구나' 하고 깨달으라고 합니다. 멀리 뛰기 위해서는 몇 걸음 뒤로 멀리
물러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뭔가를 하기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참회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참회가 없이는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이참, 두 번째 사참을 해야 합니다. 이참은
'내가 왜 그랬지' 하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사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참회(懺悔)라는 말 중 '참' 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회' 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
다짐입니다. 참회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사바세계는 반쯤씩 있는 세계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반쯤있습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선도 악도 반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뒤엉켜 있기에 사바세계라 합니다. 극락세계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살지 못할만한 세계도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반쯤은 살만하고 반쯤은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참을 줄 모르면 이 세상을 살기 어렵습니다.
경봉스님은 '참을 인자 세 개'를 가슴에 새기고 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아야하는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좋은 것입니다. 나쁜 것은 '고진감래'라고 생각하면서 넘길 수
있지만, 좋은 것은 여간해선 참기 힘듭니다. 그러나 좋은 것도 많이 취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참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 지금 여기서 만족한 삶을 살줄
알아야 합니다. 적은 것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거죠. 만족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행복합니다' 라고 하루에 10번만 해 보십시오.
일심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다신이 청정하며, 나아가 시방중생의 원각이 청정
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그 울림이 전체로 가서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행복해집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 - 시명 스님 / 조계사 관음재일(통도사 한주)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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