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찬탁- 반탁 소환하는 한국당의 오판
김종성 입력 2019.10.10. 14:00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검찰개혁 이슈는 신탁통치 논쟁과는 다르다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문재인정권 규탄집회 참석한 황교안-나경원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2019년 10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문재인 하야 범국민 2차 투쟁대회'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남소연 |
서초역 일대와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집회를 놓고 자유한국당이 신탁통치 논쟁을 거론하고 있다. 지금 상황을 해방 후 '찬탁 대 반탁' 대결구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8일 '문 실정 및 조국 심판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지금 국민들께서는 조국 사태의 찬반을 떠나 도대체 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서로 쪼개지고 갈라져야 하는지 분노하고 있다"라며 "해방 후 3년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싸우던 그런 극단의 갈등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는 탄식마저 나온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황교안 대표도 같은 인식을 드러냈다. 이날 그는 입장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국론분열이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의 인지 부조화다"라면서 "조국 파면을 외치는 절대 다수 국민에 맞서, 대한민국을 70년 전의 해방정국으로 돌려놓은 장본인은 대통령과 한줌 친문세력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지금 상황이 좌우 국론분열로 고착되면, 우리공화당이나 한기총 같은 기독교 내 우파 같은 극우세력 그리고 한국당 같은 보수세력이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된다. 2016년 촛불혁명으로 코너에 몰린 그들이 세를 회복할 여지도 있게 된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정말로 국론분열을 우려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국론분열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이유다.
해방 직후 국론분열을 이용했던 우파
미국의 저명한 한국학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설명한 것처럼,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공화국 등의 좌파 세력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친일파가 다수 포진한 해방 직후의 우파는 촛불혁명 이후의 보수·극우보다 더 불리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반도 전역에 수백 개의 지방 조직을 퍼뜨린 조직의 재능을 누가 발휘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좌파의 조직력이 한반도 전역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해방 다음 달인 1945년 9월부터 미군이 주둔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좌파 중심의 정치지형을 바꾸기 힘들었다. 이 지형을 바꿔놓은 게 바로 신탁통치 논쟁이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국 외교장관 회의(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발표된 방안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놓고 좌우가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면서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과 전략적으로 제휴한 우파 정치세력이 대결 구도의 한 축으로 급격히 떠오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힘을 추스른 우파는 미군정의 지원 아래 분단반대 세력을 약화시키고 친일청산을 무산시키면서 한국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 직후의 국론분열은 우파와 친일파한테는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 동아일보 |
잠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3상 회의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1945년 12월 27일 치 <동아일보> 보도는 명백한 오보, 가짜뉴스였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신탁통치는 원래 미국이 주장한 것이며, 미국이 최대 30년까지 신탁통치를 하려 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3상 회의의 요점이 신탁통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3상 회의 결의문 제1항은 '임시 한국 민주주의 정부', 즉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제2항은 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그런 뒤 제3항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국 임시정부 및 미·영·소·중 정부와 논의해서 신탁통치 방안을 마련한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3상 회의의 요점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먼저 세운 뒤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김덕련 전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대담집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1권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따르면,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고 신탁통치는 나중 문제였다"라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동아일보>의 오보 내지는 가짜뉴스에 의해 임시정부 부분은 뒷전으로 밀리고 신탁통치 문제만 한껏 부각됐던 것이다.
3상 회의 결의 속에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임시정부, 미소 공동위원회, 신탁통치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지만,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은 신탁통치만 집중 부각시켰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이 같은 보수세력의 '기획'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일제 식민통치를 이제 막 벗어났는데 또다시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는 국민적 분노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수파와 친일파는 해방 직후의 수세에서 벗어나 전열을 가다듬고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2019년 다시한번 대역전?
2019년 현재의 보수·극우 진영으로서는 그런 대역전의 발판을 만들어준 신탁통치 논쟁이 아련하게 그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이 국론분열을 걱정하는 듯이 하면서 그때 상황을 자꾸만 거론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검찰개혁이 핫이슈로 떠오른 지금, 찬탁 대 반탁 같은 대결 구도가 재현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검찰개혁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지금의 구도에서는 천지개벽 같은 예외적 변수가 돌발하지 않는 한, 찬탁 대 반탁 같은 이분법적 구도가 웬만해서는 등장하기 힘들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두 갈래의 국민들이 광화문광장과 서초역에 각각 모이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사태가 신탁통치 논쟁 때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국어사전에 '착시'라는 단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검찰 개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상황을 해방정국과 똑같이 보는 것은 명백한 인식상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의 본질은 '조국 장관'이 아니라 '검찰개혁'이다. 조국 장관의 도덕성을 따지는 목소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검찰개혁에 대한 보수·우익의 저항이다. 검찰과 정치권력의 유착 속에 기득권을 향유해온 그들이 조국 반대 목소리의 배후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조국이 법무부장관이 아닌 문화부장관이나 교육부장관에 임명됐다면 지금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건국 이후 사상 초유의 검찰개혁을 위해 법무부로 갈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당 등이 그의 장관 임명을 그처럼 강도 높게 반대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조국의 신상 문제를 중심으로 사태가 진전되다가 지금은 검찰개혁 이슈가 점점 더 많이 부각되는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곁가지인 '조국 문제'에서 본질인 '검찰개혁'으로 이슈가 넘어가면 갈수록, 신탁통치 논쟁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극우의 논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명확하다.
▲ 조국 법무부 장관이 8일 오후 경기도 과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검찰개혁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 이희훈 |
▲ 윤석열 검찰총장이 2019년 9월 25일 오전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린 마약류퇴치국제협력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 이희훈 |
'찬탁이냐 반탁이냐'는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대립 구조였다. 그에 반해, '검찰개혁이냐 아니냐'는 성립 자체가 힘든 구도다. 검찰개혁을 두고 '찬'개혁이냐 '반'개혁이냐로 구도가 갈라지기는 힘들다. 검찰개혁은 이미 시대적 과제가 돼 있기 때문이다.
'찬탁이냐 반탁이냐'라는 대결 구도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양쪽 논리가 다 독립 열망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 정치세력의 계산법이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찬탁을 지지한 국민들이나 반탁을 지지한 국민들 모두 한결같이 독립국가를 열망했다. 그래서 양쪽 진영 다 나름의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찬탁과 반탁은 독립국가로 가는 두 가지 길이었다. 이 논쟁은 독립국가로 가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지지하든 애국자 소리를 들을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검찰개혁은 다르다. 조국 장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검찰 적폐의 문제점은 잘 인식하고 있다. 평범한 공무원과 다를 바 없는 대다수 검사들까지 질타하지는 않지만, 적폐를 양산하고 그에 기생해온 소수의 정치검찰을 문제시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에 관한 한 진보·보수를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검사들이 등장하는 TV 드라마에서 양심적이고 소신 있는 검사는 소수고, 정권이나 재벌과 연계된 검사들만 득실대는 것은 검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작가들이 검찰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검찰 적폐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국 이슈'에서 '검찰개혁 이슈'로 신속히 넘어가면 갈수록, 신탁통치 논쟁 때의 국론분열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한국당이 '조국 이슈'를 띄우면 띄울수록
한국당이 조국 장관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때문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들은 그저 '문재인 반대, 조국 반대'만 외치고 있다. 이는 검찰개혁이 시대적 대세임을 잘 알고 있음을 증명한다. 검찰개혁을 드러내놓고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에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그리고 그 가족만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려 하는 것이다.
해방 직후의 보수파·친일파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부분만 꼭 집어내 좌우 대결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당 지도부가 그런 '흥행'을 거둘 수 있을까? 한국당 지도부의 기획력이 해방 직후의 선배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조국 이슈를 한껏 부각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10월 5일의 대규모 서초동 촛불집회를 자초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검찰개혁이 '본편'이라면 조국 장관 임명은 '예고편'이다. 조국 이슈를 키우면 키울수록 검찰개혁 이슈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국당 지도부는 일단 조국 이슈부터 크게 키워놓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한껏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검찰개혁 쪽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켜준 셈이 되는 것이다.
▲ 대검찰청 향하는 수많은 손가락 '제8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2019.10.5일 오후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이 대검찰청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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