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마음 냈을 때가 정각(正覺) 이룬 때다 - - 동국대 명예교수 인환 스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지무생사(知無生死 : 탄생과 죽음이 없는 이치, 즉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아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가 없는 도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가 없는 도리에 계합하는 것을 아는 것)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가 없는 도리를 마음대로 쓸줄 아는 것)
空의 도리 깨닫는 초발심(初發心) 세워 용무생사(用無生死)를 통해 중생을 제도 하라***
이 세상 모든 것이 空 임을 알 때가 꿈(夢)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에게 불성(佛性) 있음을 깨우치면 발심(發心) 저절로 이뤄져
인환 스님은 2,005년 1월 22일 경기불교문화원(원장 진철희)이 주최한 큰스님 초청 신년법회에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주제로 법문했다. 이날 법문에서 “보주(寶珠 :보물 구슬)의 비유를 들며 우리에게도 불심(佛心)이 있음”을 강조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환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부처님과 인연 맺고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발심(初發心)입니다. 발심(發心)이 올바로 서야 수행이 잘 되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시길 이 세상 온갖 일들은 우연한 것 없고 기적같은 거 없다고 했습니다. 종종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그 일의 원인(原因)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씨앗 안 뿌리고 열매 맺길 기다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인(原因) 없는 결과(結果)란 없다는 말씀이죠. 며칠 있으면 음력 정초가 되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덕담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건넬 겁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복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니 “복 많이 지으세요”하고 인사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복 많이 지으세요”와 마찬가지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초발심(初發心)입니다. 뚜렷하고 명확한 발심(發心)이 원인(原因)이 된다면 바른 수행이 결과(結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지어야 복을 많이 받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초발심(初發心)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초발심(初發心)이란? 내 몸과 마음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사실, 시시각각으로 쉬지않고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 즉 공(空)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생멸(生滅)하는 것이고 공(空)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때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꿈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해탈 할 수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바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 즐거움을 만끽하시고는 스물 하루만에 하신 첫 말씀이 “참으로 희한하구나. 깨닫고 보니 성불(成佛 : 깨달음을 얻음)할 수 있는 자가 나 뿐만이 아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구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처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바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성(佛性)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컵 하나를 본다고 할 때, 내가 봐도 컵이고 여러분이 봐도 컵이고 부처가 봐도 컵인 것 처럼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아는 것이 불성입니다.
누구나 그 가능성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과 사라는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남)이라는 것이 거룩하고 대단해서 세속에서는 불가능하고 먼 세상에서만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서 “나는 생사해탈이 안돼.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생사해탈은 무슨…” 한다면 한도 끝도 없이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성(佛性)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고 발심(發心)으로 수행한다면 그 누구라도 생사해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 ‘보주(寶珠 : 보배로운 구슬)의 비유’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무명(無明 : 無知) 속에서 살아가는 가를 보여줍니다. 의리가 좋은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이를 불쌍히 여긴 부자인 친구가 가난한 친구의 걸망에 보주(寶珠)를 넣어줍니다. 그 친구 모르게 말이죠. 그런데 이 가난한 친구는 보주(寶珠)가 들어있는 걸망을 메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걸망에 보주(寶珠)가 들어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채 계속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수년이 지난 후 두 친구는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보주(寶珠) 준 친구는 가난한 친구가 그 보주(寶珠)를 팔아 번듯한 집을 짓고 부유하게 살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자신에게 값비싼 보물(寶物)이 있어도 있는줄 모른다면 그 보물(寶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보주(寶珠) 보물(寶物)인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는 걸 모를 뿐입니다. 견성(見性 : 내가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을 본다는 것은 내게 없는 불성(佛性)을 어디 딴데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확인하고 밝히는 것 뿐입니다. 불성(佛性)을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년만년 묵은 동굴의 어둠을 밝힐 때 천년만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동굴 안에서 불을 켠 순간 어두운 동굴 속은 단숨에 환해집니다. 어둠은 일 초도 안돼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서 발심(發心)에서부터 수행(修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디 딴 나라 사람도 아니고 수백년 전 사람도 아니고 책속에 자주 나오는 사람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다가 가버린 사람입니다. 번듯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합격만하면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 기대로 과거공부에 전념하던 청년은 어느날 종로 거리에서 당파싸움에 휘말려 효수를 당한 한 벼슬아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깨닫지요. 세상에 영원한 것, 진실인 것은 없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 청년은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합니다. 그가 바로 훗날의 무용스님입니다. 다음 내용은 무용 스님의 일화입니다.
무용 스님이 열반하시던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에서 ‘점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용 스님이 세수 90이 넘어 어느 날 대중들을 모두 모아놓고는 “내가 오늘 가야 겠다. 뭐 못마땅한 것 있느냐?”하고는 입적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못마땅하다고 묻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잠잠한 가운데서 한 어린 시봉승이 말합니다. “스님 오늘은 안되겠습니다. 곧 있으면 설이 다가오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라고 말이죠.
무용 스님은 이 시봉승 말을 듣고 기다렸다 며칠 후 다시 대중들을 불러모아 처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잠잠함을 깨고 그 시봉승이 한마디 합니다. “스님, 이번에도 안됩니다. 신도들이 식구들하고 설명절 보내고 이제 스님 뵈러 절에 올텐데 참으신 김에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무용 스님은 “그러마”하고는 입적하는 날을 또 한번 기다립니다. 그리고서는 또 며칠후 대중들을 불러 전과 같이 물었죠.
이번에도 또 그 시봉승이 일어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고맙습니다. 이젠 가셔도 되겠습니다.” 그러자 무용 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수행자가 “정진(精進)을 하는데 있어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생사가 없는 도리를 체험할 줄 알아야 하고(體無生死), 생사가 없는 도리에 계합할 줄 알아야 하고 (契無生死), 생사가 없는 도리를 마음대로 쓸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 거기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용 스님은 몸소 용무생사(用無生死)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저 세속적 명예만을 위해 공부하던 한 청년이 무상(無常)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이룬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음을 깨우친다면 발심(發心)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그 마음 변치 않고 정진한다면 누구나 부처(佛,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 법보신문 박주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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