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옛 우물로 돌아간 은어

장백산-1 2019. 12. 26. 13:34

옛 우물로 돌아간 은어   /  릴라님


오래전 인생의 혼란기에 저에게 깊은 인상을 준 두 편의 소설이 있습니다. 오정희 작가의 <옛 우물>과 

윤대녕 작가의 <은어낚시 통신>입니다. 두 소설의 내용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며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남은 인생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모르던 시절에, 이 두 작품에서 제가 걸어갈 길을 어슴푸레하게 알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보니 

<옛 우물>과 <은어낚시 통신>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발표되었습니다.


1994년. 제 나이 26세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학에서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문학 주변을 서성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의 매주 교보문고에 들러 새로 발표되는 소설들을 찾아

보았고, 개중에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두 편의 소설도 그렇게 

해서 볕이 잘 들지 않은 제 보금자리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 <옛 우물>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아주 오래된 우물입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우물에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했고, 특히 어머니들이 출산을 하는 날이면 경건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그

우물의 물을 길어서 집으로 와 부억을 지키는 조왕신에게 정화수로 바쳤습니다.


소설 <옛 우물>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45살 생일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어린 시절 마을에 있던 옛 우물을 

머리속에 떠올렸습니다. 주인공은 특별한 변화도 없고 가슴 뛰는 일도 없는 박제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일상의 삶은 이제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 일만 남아있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주름지고 조금씩 무너져서 결국엔 주인공의 육신은 바람과 물과 불과 흙

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이 극에 달했을 때 주인공은 그의 증조할머니가 들려준 

'옛 우물'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옛 우물에는 금빛잉어가 살고 있지. 그 잉어는 천년이 지나면 아주

사나운 이무기가 된단다. 또 천년이 지나면 그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지.'


'옛 우물'은 박제된 삶의 이면의 속살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시원이며, 우주의 살아 숨쉬는 생명력

입니다. 이 소설 <옛 우물>에서 오직 옛 우물만 생기롭고 나머지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탄생과 죽음이 

혼재해 있고, 현실과 이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중년의 여주인공은 온몸으로 삶의 무상함을 경험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원시적(原始的)인 순수한 생명력(生命力)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옛 우물'은 모든 우리 존재의 옛 거울이자 무한(無限)한 창조성(創造性)입니다. 옛 우물은 이 세상 모든 

것들, 온 마을의 모든 물건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떨어져 있는 곳이자, 모든 사람들이 빠져죽은, 탄생과 

죽음이 혼재하는 곳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죽음조차도 창조해 내는 우주적(宇宙的) 자궁(子宮)

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그동안의 방황과 탐구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영적(靈的) 영역의 문턱에 까지 

다가온 듯한 특별한 감수성을 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 소설 <옛 우물>은 오랫동안 제게 잔상을 남겼습니다. 그때는 이 작품의 분명한 

뜻이 무엇인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아마 작가도 이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삶이 이게 하닌데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 문턱에 까지 도달한 듯한 불가해성이 

느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本性))이라는 '옛 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암암리에 본성(本性))이라는 '옛 우물'

이것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느낄지 모릅니다. 제가 그때 이 작품을 통해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미세한 

파문을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은 불현듯 갑작스레 내면의 숲속에서 언제부터 샘솟았는지 모를 맑은 창조

의 샘물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무료한 삶,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삶의 길이 있다는 영감(靈感)을 느낄지 모릅니다.


지금에 생각해 보니 1994년. 제 나이 26세 때의 그 시기 저는 원시성(原始性), 시원(始源)과 같은 말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소설 <은어낚시통신>도 소설 <옛 우물>과 비슷한 유형의 소설입니다. 은어는 자기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은어는 하천의 바닥이나 자갈 틈에 산란을 하고 이 알들

이 치어가 되어 바다로 내려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월동을 합니다. 그리고 봄인 4, 5월이 되면 

다시 강으로 올라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성어가 되어 9월이 되면 하천 바닥에 산란을 마친 후 

죽습니다.


은어가 죽을 때는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서 죽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잊고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 망상 번뇌를 따라다니면서 분별 망상 번뇌속을 헤매다가 결국 모든 

추구를 멈추고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 분별 망상 번뇌를 잊는 것과 닮았습니다.


은어는 옛 우물에서 나와 세상을 떠돌다가 다시 옛 우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춥니다. 마음 바깥에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 망상 번뇌는 온갖 탄생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을 둘 다 창조합니다. 

일어나 올라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저 바깥에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그것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지만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새롭다 싶으면 식상한 것이 되고, 참되다 싶으면 허황된 

것이 되며, 영원한 것인가 싶으면 금방 무상한 것으로 바뀝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모래를 손에 잡은 듯, 물을 손에 잡은 듯 금방 빠져나가 버립니다. 오랜 세월 반복된 

실수를 통해 허황된 추구와 노력의 한계를 알고 본래 자리로 돌아와야지만 아무 일이 없어집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는 옛 우물, 모든 것을 비추는 옛 거울,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지금 여기 이 세상입니다.


은어는 바다로 간 적도 없고 기나긴 여정을 거치고 은어가 태어난 제자리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