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소참법문(小參法門) - - 꿈에서 깨어나기

장백산-1 2019. 12. 24. 23:43

소참법문(小參法門) - 서암(西庵) 스님


“스님 좋은 법문(法門)을 좀 해주십시오“ 좋은 법문이 어디 따로 있나? 소리있는 소리만 들으려 하지 말고 소리없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조용히 가만히 있어봐라. 새들도 법문을 하고, 바람도 법문을 하고, 산도 법문을 하고, 꽃들도 법문을 한다.“


불교의 핵심은 계(戒) 정(定) 혜(慧)로 이름하는 삼학 (三學)이 세 글자로 묶을 수 있지. 계행戒行 이 근본인데, 계행에서 안정(定, 집중, 몰입)이 생기고 그 안정된 마음(定)에서 밝은  지혜(慧)가 생기거든. 그런데 六祖 [혜능]스님은 정과 혜를 다르게 보지 않았어. 바로 계(戒)가 정(定)이고 정(定)이 혜(慧)라고 말씀했지.


우리 스님네 한테야 250개의 계행이 있지만, 사실은 계행도 팔만 사천 세행(細行) 이라고 하는 거야.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말 한마디, 일체 세밀한 행동 하나 하나를 어느 시대의 도덕윤리 사회윤리 이상으로 아주 세밀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있어. 팔만 세행을 그대로 다 지키면 그대로 성불(成佛, 깨닫는)하는 길이야. 정과 혜,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선禪]이야.


참선(參禪)하는 수행자의 세 가지 핵심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忿心)과 대의심(大疑心)이지. 다시 말하면 확고한 마음의 정립과 분통터지는 격렬한 의지, 그리고 고정관념에 끄달리지 않고 일으키는 진지한 의문이지. 대신심大信心에 대해 말한다면, 출가한 사람은 대신심은 이미 성취가 됐지.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이나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서 오로지 이 참선해서 마음의 본질을 찾아보겠다고 나섰으니까 신심(信心)은 확립이 됐지.[오욕락: 財 色 食 名 睡]


대분심(大忿心)이란 뭐냐,  인생의 주인공(主人公)을 알지 못하면 생각에 항상 끌려오고 끌려가서 생사 물결 속에 항상 떠내려가는 거야. 그러니 참 원통하고 분해. 올 때에도 내 맘대로 온 게 아니고, 사는 것도 내 맘대로 사는 게 아니고, 죽을 때도 내 맘대로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가는 것도 내 맘대로 가는 게 아니야. 항상 소가 푸줏간에 끌려가듯이 분별의 틀인 생각이라는 환상의 세계, 즉 삼계(三界 : 욕계, 색계, 무색계) 육도(六道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끌려다니다 보니 이보다 더 분통(憤痛)이 터지는 게 어디 있겠나?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뭔가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분심(憤心 : 화, 성냄)이 터지는 거야. 그래서 가까운 친구끼리도 의리가 상해지고 심하면 재판을 하고 그렇게 설치거든. 이를 뽀득뽀득 갈고 분통이 터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몇 푼도 안 되는 분통이야. 인생이 송두리째 끌려가고 끌려오니 이보다 더 원통한 게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니까 이제 분하고 억울한 생각을 가져야 해. 자신을 모르고 사는데 대한 분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정신없이 사는 거야. 술에 취한 사람마냥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는 그런 맥 빠진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적어도 인생을 똑바로 보고 진지하게 산다면 누가 태어나고 죽는 문제에 무심할 수 있겠어? 종일 앉아서 두 다리를 뻗고 울어도 시원치 않는 거야. 그러니까 참 분憤한 일이지.


그 다음에 대의심(大疑心)이지. 꽉 막히는 거야. 모든 시비장단이 의심疑心이라는 불덩어리에 모조리 타버리고 오직 의심하나만 남은 게야. 신심과 분심과 의심은 삼발이와 같아서 그 중에 발 하나만 짧거나 없어도 기울어지거든. 삼위일체야. 대신심이 없으면 대분심이 생기지 않고 대분심이 없으면 대의심이 생기지 않아. 갈라놓으니 그렇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따라오는 거야.


우리는 공부를 희미하게 할 게 아니라, 이것을 철저하게 관찰해서 틀림없이 공부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해. 흐리멍텅하게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실행에 옮기려면 아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참선한다는 것은 생각이 딱 정립正立이 되어 들어온 사람을 향해서 화두를 시키는 게야. 그렇지 않으면 화두話頭가 되지 않거든.


집을 하나 짓는데 모래 위에 아무리 튼튼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봐야 그대로 쓰러지는 게야. 참선[參禪]하는 사람이 막연하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간다는 식으로 참선한다면, 이런 맥아리 없는 생각을 가지고는 평생을 해도 뚫어지지 않는게 '나'야. 철저한 기반이 마련된 다음에야 참선이 되는데, 우리 인생을 하나로 결집해서 묶어야 화두가 되는 거야.


그래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가지고, 화두[話頭] 하나를 내 생명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철저한 생각으로 묶여져야 화두가 되지. 그렇지 않고 무슨 들락날락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화두가 될 수 있겠어?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에도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써 붙이지 않고는 공부가 안 된다고 그랬거든.


그래 머리에 붙은 불 끄듯 하라 그랬거든. 머리에 불붙어 봐요. 그보다 더 급한 게 어디 있겠어? 그래서 화두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내 인생을 전부 묶어 딱 집중시켜서 내 몸도 잊어버리고 내 세상도 잊어버리고 오직 화두 하나만 있는 게야. 화두가 바로 자기 생명이야.


화두[話頭]를 놓칠 때는 그래도 살아 있는 거야. 그렇게 되는 것이거든. 화두話頭란 말은 말話의 머리頭거든. 이 세상에 아무리 짤막한 말이라도 뜻이 없는 말이란 없거든. 그러면 말머리는 말이 생기기 이전이라는 말인데, 따라서 화두話頭는 뜻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옛날에 “어떻게 하면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겠습니까?” 하고 물어 오면 황벽[黃檗]스님의 경우엔 임제[臨濟]스님의 머리를 30방 내리쳤어. 묻는 이도 생각이 철저한 데서 묻는 거야. 이 세상의 너절한 생명은 필요치 않고 생사를 해결하려는 문제 하나만 걸려 있어. 스승은 거기에 대해 설명이 필요치 않으니까 방망이로 내리쳤지. 그런 것만 보더라도 화두話頭는 이론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게야. 그래서 우리가 이론으로 생각하고 더듬고 하는 모든 지식(知識) 그런 것 가지고는 도저히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이룰 수 없어. 오히려 아는 지식(知識) 창고를 완전히 집어던지고 들어서는 것이 화두거든.


세상의 학문은 전부가 바깥으로 이론理論적으로 따지는 것이라.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안 되는 거야. 화두는 각도가 아주 180도 달라. 근본적으로 다르지. 평생에 자기가 듣고 보고 하는 그런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야. 꽉 막히는 거지.


지식(知識)은 항상 바깥으로 더듬는 미몽迷夢의 살림살이지만, 깨닫는 세계는 그런 것으로는 통하지 않는 거야. 오히려 이 세상 모든 것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자기 몸뚱이까지도 잊어버리고 우주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서 꽉 막힐 줄 알아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거야.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론은 사량(思量) 분별(分別)의 세계를 초월해 있어. 이건 깨달음[悟]의 세계거든. 그러니 각도가 다른 게야. 인류 역사상 석가모니[釋迦牟尼]만이 그런 말씀을 했지. 다른 학설에서는 아직 내가 보지 못했어. 인간 지식은 모르는 데서 시작해 가지고 죽도록 파헤치고 들어가 봐야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모르는 데까지 오는 것이 인간 지식이거든.


그러니 꿈을 깨고 나서야 그 꿈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게야.


아무리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재고 달고 해봐야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알아지는 게 아니야. 그러니 지식이 아예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꽉 막혀야 해. 부처님이 알음알이 지식병을 깨트리기 위해서 49년간 팔만 사천의 방편 법문을 하신 게지만, 결국은 팔만 사천 경전도 원점原點으로 모르는 데로 돌아오는 거야.


그러니 팔만 사천 법문이 참선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데까지 끌어 오기 위해 설법說法해 놓은 거야. 그걸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한마디로 하신 말씀이 "나는 단 한마디도 말한 게 없다.” 고 하신 것이 바로 그 말씀이거든. 금강경에 ‘만약 부처가 법을 설했다고 하면 여래를 비방하는 소리’ 라 이 말이지. 그게 그 소리거든.


깨달음, 진리, 부처, 여래,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 불성, 자성, 진심, 그 자리는 말이나 생각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자리야. 크게 깨닫는 것을 부처로 삼으라 그랬지. 깨닫는 것이란 무슨 말이냐? 쉽게 말해서 꿈에서 깨어나라는 소리거든. 꿈! 사람들은 항상 꿈 속에 살아. 어디서 자기 인생이 시작해서 어디로 가서 종말을 이룰 것인지도 모르고, 현재도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여. 삶은 자기 마음 먹는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거든. 전부가 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끄나풀이 홀치고 있어. 어디 자기 맘대로 살아지는가? 아무리 학식學識이 풍부해도 항시 초조하고 불안하고 만족滿足이 없고 해탈이 없어. 구석구석에서 항상 헤매고 쩔쩔매고 살지.


그러니까 참선을 한다는 것은 참선을 하기 위한 참선이 아니고 바로 내 인생을 해결하는 것이야. 내 인생을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우주 전체, 이 세상 전체를 해결하는 것이거든. 서양의 철학자 누군가도 이와 비슷한 소릴 했지. 평생 동안 연구해 보고는 “너 자신을 알라.” 이랬거든. 자신을 알면 우주 모든 진실이 다 열린다는 그 말인데, 상당히 발전한 소리거든. 그러니까 바로 나 하나 꿈에서 깨어날 때 우주 이치를 송두리째 다 알아버리는 것이야. 그게 불교의 선(禪)이야.


그래서 참선하는 첫째 자세에서 우리가 뭣을 따지고 하는 것은 금물이야. 완전히 멍텅구리가 되어야지. 그래야 참선을 할 수 있어. 부처님 말씀에도 마음공부하기 어려운 사람이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총명聰明한 사람이라고 했거든. 총명한 그걸 살림살이로 알고 전부 자기 총명한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재고 따지려고 하기 때문이거든. 완전히 그 지식의 저울대를 던져놓고 꽉 막혀야 된다 이거지. 그래서 자기 인생의 꿈을 깨야지, 이일 말고는 우주의 한 가지 일도 할 일이 없는 게지. 그 하나 해결하는 것이 참선參禪이야.


참선을 해서  화두를 드는 사람은


 첫째, 생각이 정돈되어야 하고, 생각이 정돈整頓되고 원력願力이 서야지, 원력이 서지 않으면 안 돼. 내가 기필코 생사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이러한 철저한 원력이 있어야 하거든. 부처님도 그 때 당시에 모든 학자나 종교인, 철학자를 찾아 몇 년 동안 다 탐방해 보았지만,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 하나 없었거든.


신통변화를 부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걸 다 어디 쓰겠어?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러니 석가모니가 6년 동안 고행하신 후에 무사자오(無師自悟)하셨는데,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고 당신 스스로 보리수 아래에서 허망한 꿈에서 깨어난 거야. 우리는 그렇게 깨어났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어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거든.


불교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자기 인생을 자기가 파악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철학이거든. 우리도 이러한 문제를 내가 기필코 해결해야겠다는 이런 원력(願力)이 부처님같이 서지 않고는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가령 좋은 자리를 구한다든지 혹은 어떤 일을 이룩해야겠다고 원願하면 그 것 말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거든.


생명이 붙어 있는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타파해서 석가모니처럼 부처가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서야 되거든. 그게 서지 않으면 깨달음이 성취되질 않아. 어디서 선방禪房  한 철 날 때도 ‘이 철에는 내가 부처(깨달아야 되겠다)가 되겠다. 다른 모든 것은 필요치 않다.’ 고 하는 신념이 정립되어야 해. 이것이 정립되지 않고는 마음이 흔들려. 참선의 근본이 그것이야.


원願을 세워 가지고서 ‘이번엔 기필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겠다.’ 그게 원성취[願成就]거든. 우리가 시장에 볼 일이 있어 가더라도 원이 있어서 가거든. 하다못해 쌀을 사오든지 소금을 사오든지 과일을 사오든지, 그 원願을 성취하기 위해 장에 가는 게야. 원이 없이 그냥 가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올 것 아녀? 모든 일이 다 그렇지.


그러니 첫째, 확고한 원願이 서야 우리 수좌들에게 다른 것은 귀에 들릴 것도 없고 눈에 보일 것도 없을 것 아녀? 무슨 권리를 구하겠어. 무슨 재산을 구하겠어. 명예 건강을 구하겠어? 오직 구하는 것이 그것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그것 하나 이루기 전에는 아무 것도 구할 게 없지. 딴 데 눈을 팔 것도 없고 귀로 들을 것도 없고 오직 내가 꿈 깨려는 생각 하나 밖에 없는 거야.


그러한 태도로 확립이 되어가지고서는 과거 불보살이 가르쳐 준 것을 참조로 해야 되고 조사어록을 보고 선각자한테 이야기도 듣고, 아는 길도 물어 간다고 자꾸 탁마상성琢磨相成이 되도록 해야지. 없는 걸 새로 배우는 게 아냐. 이걸 자꾸 확인해 가지고 봐야 하거든.


예전에 회양[南嶽懷讓]스님이 자기는 그렇게 많이 알아 봐야 인생에 대해서 항상 쾌활하지 못하고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이 가시지 않는 거야. 그런데 육조[慧能]스님은 글자 하나 모르는 무식꾼이라는데 그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고 거기서 많은 도인이 난다 하니, 참 굉장한 일이라 호기심이 나서 남악 회향 스님이 육조 혜능스님을 찾아갔어.


“육조스님 계신 방이 어디냐?” 하니, 저기 윗방이라고 가르쳐 주기에 가서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척 들어서려니까, 육조스님이 쳐다보고는 어느 스님이 교만스런 태도로 들어오니까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는거야. “어느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습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


그래 남악 회양 스님이 깜짝 놀라며 몽둥이로 정수리를 한번 얻어맞은 것처럼 혼비백산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는 거야. 어떤 물건이 왔다고 되질러야 되는데 꽉 막혀 버린 거지. 오기는 용하게 왔어. 안 온 게 아니여. 이런 물건이 왔다고 탁 되질러야 할 건데 꽉 상하 사방이 꽉 막혀버린 거야.


평생에 쌓은 학문[經學]의 금자탑이 무식꾼 육조스님 한마디에 산산히 날려버린 거야. 빈털터리가 됐어. 많은 지식(知識)으로도 그것 하나 대답 못하니 어디 쓸거냐 말이여. 꽉 막혀 버렸어. 그러니까 평생에 자기가 제일 보배로 알고 갈고 닦고 해왔던 지식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거여. 우주도 없고 막막한 '거기' “어느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라는 물음에는 시비, 장단도 어떠한 분별 어떤 미동도 없이 모두 딱 끊어져 버리고, 오직 꽉 막힌 기막힌 대목이 탁 나타난 거지


속담에 ‘혼 빠진 할머니 딸네 집 건네 보듯이 한다.’고 남악 회향 스님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지.


육조스님은 눈 푸른 의사 스님이니까 아무 소리 없었고, 남악 회향 스님도 그렇게 단지 문고리 잡고 서 있는 거여.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남악 회향 스님은 속으로 ‘저 어른하고 백 날 앉아 이야기해 보아야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고는 오히려 발길을 돌린 거야. 아무런 얘기도 못하고 그렇게 돌아갔어요.


발길을 돌려도 이것 하나 자기 지식에 탁 걸려 자기 밑천이 그것 하나밖에 남은 게 없어. 자기 지식 주머니는 저절로 무너져 도난당하고 빈 거지가 된 셈이지. 완전히 알거지여. 음식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하나 걸린 것처럼 이 가시가 걸려 놓으면 삼키려고 해도 안 넘어가고 뱉으려고 해도 안 뱉어지는 거여. 무슨 일을 하든지 목 안에 답답한 게 탁 걸려 가지고 딴 게 들어서지 않는거야.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는 것이 없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는 거야.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밥 먹으나 무슨 얘기를 목에 가시 걸린 하나 그것은 잊혀지지 않아.


남악 회양에게는 그 한마디 문제가 딱 걸린 거야. ‘어떤 물건이 왔느냐’ 고 한 혜능 스님의 질문이 딱 걸려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거야. 놓아지질 않는 게지. 자기 인생 100%가 그 하나의 물음에 묶인 거야. 이게 바로 의단독로(疑團獨露)라고 말하는 거지.


요새 정진하다가 화두가 되니 안 되니 하는 것은 그건 화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여. 내 혼신 전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화두 하나만 걸려야 하는 거야. 탁 들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서 밥 가져다 놓으면 떠먹어야 되지만 밥 먹으면서도 생각은 놓아지지 않는 게야. 이 세상에는 조금 남한테 억울한 소리 들으면 분忿이 나서 헐떡거리고 밥을 먹을 때나 대소변을 볼 때도 안 잊혀지지. 분이 나면 얼굴이 빨개가지고서는 ‘그 놈이 나한테 이런 모략을 해’ 하면서 꿈에서도 분해 벅벅거리는 거야. 그런 문제도 그러한데 내 인생이 송두리째 걸려 있는 이런 중대한 문제에 어떻게 흐리멍텅하게 지낼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치가 안 그렇겠어요? 그 놈이 탁 걸려 가지고 누가 뭐라 해도 동문서답이지. 귓전에 오지 않는 거야. 말도 하기 싫은데 사람이 물으니 대답 안할 수도 없고 해서 답답하지. 그런 식으로 해서 그 탁 걸려 있던 것을 하루아침에 손뼉을 탁 치고 깨친 거라. 뭘 일러줘서 연구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꿈 깨듯 깨어나는거야. 우리 꿈에도 그렇잖아? 꿈에도 누가 칼을 가지고 ‘이놈’ 하고 목을 자르거나 또는 호랑이나 미친개가 막 물려고 쫓아오면 달아나다가 급한 경우에는 꿈을 깨지, 급하지 않는 경우에는 깨지질 않아. 아주 급해야 깨는 거야.



그 전에 청담[靑潭]스님이 왜정 말년에 독립투사랑 모여 산다고 누가 모략을 해 가지고 종정스님 등 여러 스님이 왜정에 걸려든 일이 있어. 그 때 청담스님은 생식을 하셨거든. 호흡은 몇 분 동안 안 해도 돼. 아주 명렬히 단련할 땐데 도인이라고 소문이 나가지고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고 튼튼한 형사들이 손발에 십여 명씩 달라붙었어. 무슨 신통만 부리면 저희가 다 날아간다고 겁을 먹고서 물을 먹인다고 하는데, 청담스님이 몇 분 동안 숨을 안 쉬니 물이 들어갈 리 있어? ‘아 이거 신통이다’ 고 저들이 더 겁을 먹고 야단이지.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 안 되겠거든. 그래 일부러 물을 마셔보니 바다에 가서 헤엄치는 기분이더라고. 결국 여러 이야기 하려면 길지만, 나와서 하시는 말씀이, “거 납자 衲子들이 한번 정도 그런 경험을 해야 공부가 잘 될거다.” 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왜 그렇습니까?” 하니, “내가 한번 죽을 경우를 닥쳐 보니까 공부하는 생각밖에 안 나더라.” 는 거여. 그때 나는 나이도 적고 그렇지만 노장님한테, “스님이 좀 미련하니까 그렇지, 하필이면 그렇게 고통을 받아야 공부가 되겠습니까?” 하고 철없이 말한 적이 있지. 그렇듯이 ‘급한 경우에 다다르면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된다,’ 는 그 어른도 그 말씀이지.


우리가 항상 등 따시고 배부르고 흔들흔들 이래도 살 것 같거든. 어디가도 밥 주고 어디 가도 비 안 새고 하니 너무 풀어져서 공부 못하지.아까 청담스님 말씀대로 급한 경우에 다다르면 공부가 안 될 수가 없어. 비상非常한 연후에야 비상사非常事가 성취되지. 평범平凡한 데는 평범한 일 밖에 되지 않아.


승려 생활이랑 한가閑暇한 게 아니여. 가만히 앉아 있으니 한가한 것 같지만 피나는 투쟁이여. 전쟁 때의 백병전에는 오히려 틈이 있지만, 지금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하는 피나는 투쟁이 바로 참선이거든. 이러한 것을 오락娛樂하는 식으로 조금하다 말다, 화두를 들고 놓고 하는 것은 벌써 두 동가리지.. 혼연일체! 100%가 화두지... 화두話頭를 들고 놓고 할 게 어디 있어.. 화두話頭 하나뿐이여..


옛날 어느 납자衲子가 도반道伴과 같이 다니다가 냇물 위의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도반이 확 떠미는 거여. 그러니까 모래사장에 꽉 거꾸로 처박히면서 ‘내가 까닥하다가 화두 놓칠 뻔 했다’ 는 거여. 그러니까 화두라는 것은 참으로 내 인생의 전체를 묶어 가지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해결하는 꿈 깨는 방법이야.


그 화두의 원리를 알고 보면 이 우주에 화두 아닌 게 없이 다 화두지. 뭐 부처님이 어디 가서 화두話頭를 정해 가지고 한 게 아니여. 꽉 막히는 것이 화두여. 누구든지 먼저 하나의 이치를 알면 우주 전체를 알아 버리는 거야. 물 한 방울 돌 하나를 알면 우주 전체를 알듯, 하나를 알면 우주 전체를 알고 하나를 모르면 우주 전체 중에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야.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단[大疑團]이 삼위일체로 혼연일체가 되어 자기도 잊어버리고 우주도 잊어버리는 의단독로[疑團獨露]여. 의심덩어리 하나뿐이여.


옛날 과거 스님 말씀에 ‘마음 달이 뚜렷이 밝아서, 그 마음 달빛이 삼천대천세계 우주를 다 집어 삼켰다.’ 는 거여. 다 집어 삼켰으니까 우주도 없어졌지. 빛도 없어지고 경계도 다 없어 졌는데, 다시 무엇인고?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화두 하나만 남은 게지. 나도 없고 우주도 없고 오직 무엇이냐? 모르는 화두 하나를 타파하는 것이 이게 화두話頭의 원리여. 우리가 뭔가 한계를 두고 의심을 하면 그 한계 안의 것 밖에 몰라. 예를 들면 내가 주먹을 쥐고 ‘이 주먹 안에 뭐가 들었노?’ 하고 의심하여 알아 봐야 이 주먹 안의 것 밖에 몰라.


화두는 송두리째 모르는 거야. 모르는 데서 알아지는 거야. 흔히 우리 납자衲子들이 화두가 잘 되니 안 되지, 화두가 이렇게 하면 되니 하면 화두병을 자꾸 말하는데 화두에 무슨 병이 있냐 이거여. 우리가 아는 데는 병病이 있어. 아는 데는 잘 알기도 하고 못 알기도 하고, 모나게 알기도 하고 둥글게 알기도 하지.


아는 데는 병폐가 붙지만 모르는 데는 병폐病弊가 붙을 수가 없어. 확 모르는 데 무슨 병폐가 있느냐 이거여. 화두는 순전히 모르는 데서 시작하는 거야. 본시 화두는 앉고 서고 그건 상관이 없어. 영가[永嘉玄覺]스님 말씀처럼 ‘행역선 좌역선 어묵동정 개시선[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 皆是禪]’ 이라.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갈 때나 올 때나 잠잠할 때나 말할 때나 다 선禪이지. 그렇지만 첫 술에 배부르지 않아. 처음 할 때는 그리 안 되지.


여기 모인 납자衲子들은 다 일등의 인물이라. 이 20세기 문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모인 게 선방이여. 그러니까 거기에는 잔소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여. 다 지도자로서 세상에 나가며 국사 왕사가 될 그런 이들이 모인 데가 선방禪房이여. 그런데 정진하다가 쉬는 시간에 가끔 떠든다 말이여. 가만히 바깥에서 들어보면 도담道談도 아닌 쓸데없는 이야길 하고 있는 거야.


우리 때는 도반道伴이 모여 앉으면 공부하는 얘길 했지, 세상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부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언제 한가하게 세상 일을 이야기할 틈이 있겠어? 그건 벌써 내가 정신을 잃고 물구덩이에 빠지고 있는 거야. 이걸 해결하기 이전에는 딴 게 눈에 들어오질 않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잔소리할 틈이 없는 거야. 누가 무슨 얘기를 물어도 마지못해 뭐 물으니 대답을 할지언정 하고 싶어 하느냐 말이여. 그런데 앉아서 쓸데없는 이야기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말이여. 그러면 그 이가 진정으로 공부하려고 온 납자衲子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고. 그래서 이 공부에는 철저한 신심信心 없이는 안 되는 거여. 그렇게 안하고는 백날 해 봐야 물에 물 탄 듯이 될 수 없는 거야.


다부지게 생사를 각오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되는 게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거여. 그래서 불법佛法을 한번 만났으니 철저하게 타파해야지. 오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여기는 세상 공부같이 일학년 이학년이 없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금방 한 생각 돌이키면 다 되는건데.


소 잡는 이도 칼 접어 던지고 즉시 성불하는 게 선방의 가풍이 아닌가? 악한 마음도 마음이고 착한 마음도 마음이여. 여기 선악 시비를 초월하고 내 마음 하나 밝히자고 들어 온 자리가 선방이라는 곳이야. 우리가 철저하게 한번 해야지. 성냥 알을 한번 그어도 불이 일어나게 그어야 불이 일어나는 거지. 천년千年을 그어도 슬슬 그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듯이, 우리가 철저하게 과거 조사(祖師)스님네가 꿈에서 깨어나서 깨닫듯이 그렇게만 마음을 먹으면 되는 거야.


우리는 오직 살고 죽는 문제, 생사(生死)의 문제가 급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걸 우리가 모르면 백년 살아도 산 게 아니니 만약 꿈에서 깨어나면 금방 죽더라도 생사(生死)가 없다는 이치를 알았으니 죽고 사는 문제에 무슨 걱정이 있겠어. 그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이제 비상한 각오로 열심히 정진해서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