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법성게 연재를 마치며

장백산-1 2019. 12. 24. 01:04

법성게 연재를 마치며(끝)



법성게는 산 자 · 죽은 자 모두 깨달음 인도하는 한국불교 대표 지송문

일승화엄 법계 ‘반시’로 그리고 원융법성을 읊은 시가 ‘법성게’

의상 스님은 ‘법성게’ 30구를 셋으로 분과, 수행법 중점 제시

‘반시’는 융삼세간불을 그린 것 내 몸과 마음 그대로 바로 부처

‘법성게’ 새롭게 알리는 사찰 늘어 모두 법계 존재로 항상 편안하길

통도사 서축암 법당 앞마당 걸개의 법성게. 서축암 제공

우리 한국 불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궁극적으로 바른 깨달음을 얻어 다함께 성불하고자 하는 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늘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라고 합장하고 다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합시다’라는 뜻을 담은 인사말이자 덕담이라고도 하겠다.  

언제나 즐거운 행복은 조건을 따라 변해 달라지는 그런 무상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거나 타인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유한하고 차별적인 행복이 아니다. 참 행복은 항상 즐거운 열반락이고 해탈락이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길은 하나이면서 다양하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시작해서 부처님 공덕의 찬탄으로 끝난다. 그 사이 부처님 세계로 중생들을 인도하는 방편으로서 한량없는 해탈문의 보살행이 펼쳐진다. 그리고 후에 추가된 ‘보현행원품’에는 무진한 교화행이 이어지고 있다. 다함께 불세계로 가는 행원인 것이다.      

이러한 ‘화엄경’에 의거하여 의상 스님은 하나의 그림에 의해 화엄법계로 인도해주고 있다. 일승 화엄의 법계를 ‘반시’로 그려 보이고, ‘반시’ 그림으로 나타낸 법계 존재가 원융한 법성임을 읊은 시가 ‘법성게’인 것이다. ‘반시’는 이름 없는 참 근원[無名眞源]으로 돌아가게 함이고, 시에 의지한 것은 헛됨에 즉하여 참됨을 나타낸 것 [即虛顯實]이라고 의상 스님은 밝히고 있다.(일승법계도)

이러한 ‘법성게’ 내지 ‘일승법계도’를 의상 스님의 설법과 주석서들을 주로 의거하면서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혹자는 ‘법성게’에 구체적인 실천 수행법이 잘 안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수행방편이 시설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 ‘법성게’ 30구를 ‘자리행·이타행·수행방편급득이익’이라는 셋으로 분과한 것만 보아도, 오히려 의상 스님이 오로지 수행법을 중점적으로 보인 것이 ‘법성게’이고 ‘반시’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법성게’ 내지 ‘반시’의 수행방편을 크게 세 가지로 묶어본다.


서울 약사사 내의 법계도인.약사사 제공

첫째, 나의 몸과 마음이 곧 법성신(法性身)임을 바로 본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그 마음임을 직시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오척 법성이 십불의 신통묘용을 펼치게 된다.       
이렇게 법성신을 바로 보는 것은 법계 안에서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일체가 부처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 법성성기이다. 그러한 본래 밝은 세계를 눈떠서 보는 것이다.    

‘반시’는 융삼세간불을 그린 것이다. 삼세간이란 지혜로 정각을 이룬 불·보살의 지정각세간,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중생세간, 그리고 정토와 예토 등 의 기세간이다. 이 삼세간이 실은 다 다르지 않은 융삼세간의 불세계임을 ‘반시’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또 그것이 바로 나의 몸과 마음이다.

일체 존재인 두두물물이 비로자나 진법신 아님이 없으니, 오척 되는 나의 몸과 마음 그대로 바로 부처이다. 그래서 융삼세간불의 법계 존재가 바로 나의 몸이고 내 마음임을 분명히 보고 알게 하는 것이다.

둘째, 보리심을 일으켜서 인연 따라 보살행으로 공덕을 쌓는다.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처럼 되려는 마음을 내면, 즉 발보리심하면 보살이 된다. 보살이 수행하는 것은 그 보리심을 쓰는 행이라서 모두가 공덕을 쌓는 일이다. 보리심은 중생이 보살되어 성불할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발보리심은 청정한 신심으로 가능하다. 신심은 선근과 비례하며 선근은 선업에 의해 깊어진다. 그러니까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부터 보리마음을 내는데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은 곧 수심(修心)이니 자기의 마음을 늘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더러움을 닦아 없애도록 한다. 아집으로 인한 번뇌장과 법집으로 인한 소지장의 미혹을 끊어 없애고 보리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보살의 수행은 이 단계를 넘어 본래 깨끗한 마음의 묘용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없으니 무자성공이라서 끊을 대상도 없고 끊을 주체도 없다. 단지 보리마음으로 연 따라 자리이타의 공덕을 쌓을 뿐이다. 그 공덕의 많고 적음도 분별하지 않는다. 수행방법은 사섭법도 좋고 사무량심도 좋다. 사성제·십이연기·십바라밀 등과 한량없는 해탈문이 다 자기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보리 양식[資糧]이다.  

일승법계의 연기세계는 상즉하고[體] 상입해서[用] 서로 걸림이 없다. 하나와 일체, 부분과 전체가 다르지 않고 원융하기 때문이다. 넓고 좁음, 크고 작음, 많고 적음, 길고 짧음, 빠르고 더딤 등이 둘이 아니다. 필요하고 구함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須卽須] 큰 것을 들면 전부 크고, 작은 것을 들면 전부 작다.[無側] 모든 것이 마음의 출현이니, 마음 따라 넓기도 하고 마음 따라 좁기도 하다.    

초발심과 정각, 생사와 열반, 이법과 현상 등도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일체 모두가 보리심 안에 다 구족되어 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닌 인과에 어둡지 않고 공덕을 지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보살이 만나는 연은 무연(無緣)의 연이다. 무연의 수행방편은 육진경계 그 어디에도 일체 걸리지 않는 여여·부동의 중도행인 것이다.  
 

직지사 내에 마련된 법계도인. 직지사 제공

셋째, 해인삼매에 들어가 나의 불성을 밝히고 평등세계를 구현한다. 해인삼매의 힘으로 나와 남 모두 해탈하게 하여 불국정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융삼세간도 이타의 보살행도 모두 해인삼매의 힘에 의해서 나타난다. 모든 삼매는 해인삼매에 포섭된다. 해인은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하는 것이니 불보리심 해인이다. 해인삼매의 힘으로 일체가 평등한 불세계를 펼치고 장엄하는 것이다.

이상 세 가지의 초점을 부연한다면, 첫째는 법성신인 자기 부처[自佛]를 바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발심하여 인연 따라 보살행을 통해 성불하는 것이고, 셋째는 해인삼매의 힘으로 수행 주체로서의 불성을 밝게 드러내고 평등한 불국정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이에 한 가지만 더 언급한다면 화엄행자들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들은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한다. 의상 스님은 제자들에게 ‘화엄경’의 문문구구(文文句句)가 다 부처님임을 천명하셨다. 
경을 본다는 것은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다. ‘화엄경’을 수지·독송·사경하고 유통시키는 일이 중요한 기본수행이 아닐 수 없다.             

‘일승법계도’를 마무리하는 발문에서 의상 스님은 다음과 같이 발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원한다. 일승 보법(普法)의 이름과 뜻을 보고 듣고 닦아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에게 돌려 베푸니, 널리 훈습하고 거듭 닦아서 온 중생계가 일시에 성불하여지이다.(故誓願 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及義 以斯善根 迴施一切眾生 普熏重修 盡眾生界 一時成佛)

일승보법이란 일승화엄을 말한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 닦은 선근 공덕을 온 중생계로 회향해서 다함께 일시에 성불하기를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의상 스님의 ‘법성게’는 668년에 저술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전국 사찰에서 즐겨 독송되어온 대표적인 지송문이다. 영가 천도시 도량을 돌면서 영가가 마지막으로 듣고 가도록 ‘법성게’를 읊기도 하고, 영단을 향해 봉송하기도 한다. 산자나 죽은 자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법문인 것이다. 

요즈음은 ‘법계도인’을 그리거나 새기기도 하고, 법계도숲을 만들기도 하며, ‘법성게’를 다양한 가시적 방법으로 알리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다. 의상 스님이 들어가 보이신 법계에 다 함께 노닐 수 있기를 발원한다. 우리 모두 법계 존재로서 항상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다시 한 번 기원 드린다. 

끝으로 이 글을 실어준 법보신문과 그동안 도움주고 읽어준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법성게’ 연재를 마친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