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법(佛法)의 정의

장백산-1 2019. 12. 30. 01:35

불법(佛法)의 정의


대승(大乘) 불교(佛敎)가 인류사회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불교의 교단주의, 출가중심주의, 성골의식 등으로 인해 인류의 현실적 괴로움과 거리를 두게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이러한 의식변화를 초래한 배경에는 도시화로 인한 사회적 정의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사회 깊숙이 참여하여 갈등과 혼란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정서인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오늘날 또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따라서 불교의 입장에서는 시비나 이해관계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 불교의 정의론을 설파할 의무가 있다. 필자는 불법의 정의론을 참여불교인 원불교 차원에서 논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차이는 없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현대 연구자들은 주로 경제적 정의에 관심을 갖고 경제적 정의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자유(自由)보다는 평등(平等)에 대한 문제가 시급한 것이 현실이다. 정치적 자유는 신장되고 있지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이 개인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배분의 문제가 정의의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다. 승가공동체가 기반인 불교는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불교정치는 물론 불교경제학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적 차원에서 독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의론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가 중요하다. 


먼저 불법의 정의론은 내적 정의론과 외적 정의론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불법을 이 사회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초기불교 및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내적 정의는 상생(相生), 일심(一心), 중도(中道)에 관한 정의(定義)다. 상생의 정의는 연기적(緣起的)인 세계 내에서 서로의 존재를 현존하는 부처로서 존중하고 받드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삶이든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적인 세계,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이 사회와 우주 내에서 상대의 존재는 내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원칙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근본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심(一心)의 정의(定義)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을 포함하는 마음의 각성(覺性)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일심(一心)은 청정일심(淸淨一心),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自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관을 포괄한다. 일심(一心) 사회역사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끌어안을 수 있는 원만구족한 지혜의 원천이다. 


마지막으로 중도(中道)의 정의(定義)다. 붓다의 수행과정에 나타난 중도(中道)는 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다. 중도를 대승적으로 확대하면, 행복과 불행, 극락과 고통, 소유와 무소유 등 양 극단을 포용하는 불이(不二)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분별(分別)과 집착(執着)을 떠난 마음(무분별심, 무집착심)은 파편화된 이념과 사상을 모두 포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중도가 아니라 원효대사가 언급한 파사현정 위에 선 중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외적 정의다. 외적 정의는 , 자비심(慈悲心), 평화(平和)로운 마음의 정의다. 도심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말한다. 즉 도심(道心) 지혜와 자비를 향한 대승정신(大乘精神)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도심을 가진 자는 약육강식이 여전히 횡행하는 이 사회를 깨우치는 몽둥이와 큰 소리의 힐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혜선사가 ‘벽암록’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불자들의 구도 열정이 흘러넘쳐야 한다.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눈 푸른 도인들이 버티고 있을 때,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타파하는 사천왕의 위엄을 소인들은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자비심은 인류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는 마음이다. 어떤 성현치고 자비심 넘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비심을 가진 자는 대승을 실천하는 보살이다. 그는 중생교화의 의지를 등에 짊어진 붓다의 분신이다. 이를 위해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수용하는 예수와 같은 대리고(代理苦)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화(平和)의 정의다. 불국토 극락정토는 불교가 지향하는 평화가 넘치는 곳이다. 수행의 궁극인 열반(해탈)은 삼독심에 근원한 분병 망상 번뇌로부터 해방된 평화로운 마음 상태를 말한다. 평화의 중심인 붓다가 실존했던 승가를 사회로 확산하는 일이 바로 우리 몫이다. 그 사회가 바로 불보살과 중생들이 파수공행하는 평화의 세계다. 평화가 우리 마음과 이 사회에 편만했을 때, 정의는 이 평화의 세계에 녹아들어가 제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정의론은 필자가 평소에 고민했던 것으로 미완의 상태다. 독자들께 성찰의 시기인 연말을 맞아 내가 보는 불법의 정의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원영상 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wonyosa@naver.com


[1518 / 2019년 12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