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 내 경계 넘어오면 부모라도 끊어내야 "
정은주 입력 2020.01.04 09:36 수정 2020.01.04 11:56
[토요판] 커버스토리
'거리의 치유자' 정혜신·이명수 부부 1년간 170회 전국 워크숍
1만여명과 속마음 주고받아 '당신이 옳다' 25만권 판매
"공감은 감정노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가 본질이다"
"공감은 나한테 먼저 적용한다. 갑질 상사 맞추려다 '나' 상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전파 중인 정혜신씨와 심리기획자 이명수씨 부부를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만 안 할 수 있어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것이다.” 심리치유서 <당신이 옳다>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와 심리기획자 이명수씨는 이렇게 썼다. 30여년간 1만2천여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던 정혜신씨는 현장 치유 경험을 바탕으로 소멸해가는 사람을 구하는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내놓았다. 충조평판 하지 않고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하는 것,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이 간단한 방법으로 심정지 상태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뛴다. 그 심리적 심폐소생술의 원리를 정혜신·이명수 부부가 설명한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 도움이 돼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만만해서 하는 거다. 명확한 자의식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고 존중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정혜신)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 충조평판을 해서 좋아지는 경우를 단 한차례도 보지 못했다. 사람은 그런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이명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30여년의 현장 치유 경험을 집대성해 펴낸 심리치유서 <당신이 옳다>(2018·해냄)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충조평판 하지 않고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하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내 느낌이므로, ‘지금 마음이 어떠냐’고 묻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렇게 시작된 공감으로 소멸 직전에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해서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교육을 받으면 초등학생도 심폐소생술로 길 가다가 쓰러진 성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듯이, 그 존재 자체에 눈을 맞추고 존재의 안부를 물으면 ‘나’에 대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했다.
일상에서 소리 없이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전파 중인 정혜신씨와 심리기획자 이명수씨 부부를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지난 한해 동안 제주도부터 전남 해남까지 동네서점과 도서관 등에서 ‘심리적 심폐소생술 워크숍’을 170회 넘게 열어 1만여명과 질문응답하며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이틀에 한번꼴로 전국을 돌아다닌 셈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40쌍 정도)이 공감자(들어주는 사람)와 화자(말하는 사람)로 나뉘어 100분간 서울숲을 걸으면서 속마음을 나누는 ‘속마음 산책’도 했다. 2018년 10월에 나온 <당신이 옳다>는 25만권 팔렸고, 지난해 공공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비문학 분야)으로 꼽혔다.
자녀한테 하는 말 99% 충조평판
―충조평판을 왜 하면 안 되나?
“관계란 나도 있지만 너도 있는데 충조평판은 나만 있고 너는 없는 관계다. 나는 아는 자, 너는 모르는 자, 나는 깨달은 자, 너는 어리석은 자라는 게 깔려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을 때, 상대를 개별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때 나올 수 있는 게 충조평판이다. 평사원이 사장한테 충조평판 하지 않는 이유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비수이자 표창이기에 충조평판을 하면 부작용만 남는다. 가닿지도 않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더 열심히 해서 결국 관계를 짓밟아놓는다.”(정혜신)
“사람들이 하는 말의 90%가 충조평판이고, 부모가 자녀한테 하는 말은 99.9%가 그렇다. 직장에서 업무적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일상적 관계에서는 충조평판 할 필요가 없다. ‘아이가 게임만 하는데도요?’라고 묻는데 되물어보자. ‘충조평판을 한다고 해서 그 문제 행동에 변화가 생기나?’ 충조평판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허벅지에 십자수를 놓는 심정으로 참아야 한다.”(이명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벼랑처럼 끊어지고 길을 잃게 되는데 그때 노느니 장독 깬다고 충조평판이라도 날린다. 그 바른말은 어김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책 107쪽) 아팠던 얘기를 꺼냈는데 그 위에 충조평판이라는 소금이 뿌려졌으니 또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상대는 더 이상 상처를 꺼내지 못하게 된다.(책 284쪽) 이중 삼중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 내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그렇게 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물어봐야지. ‘어떤 마음인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계속 물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공감이 된다. 묻기 전에는 모른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니까. 5살 아이한테도 충조평판 하지 않는 이유가 그에게도 자의식이 있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너무 많이 경험했으니까 두려워서 멋대로 판단하고 규정하지 못하는 것이다.”(정혜신)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 마음이 어때’ 하고 서로 묻는다. 만날 보는데 왜 묻나 싶지만,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계속 변하니까 어젯밤과 오늘 아침이 다르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완전하게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함부로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 여기(here and now) 마음이 어떠냐’고 묻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이유다.”(이명수)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할 때 필요한 것은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지금 그의 상태를 모르는 나는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거니?”
―그렇게 마음을 물으면 공감하는 건가?
“속으로는 한심해 죽겠는데 ‘너 마음이 어떠니’라고 묻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공감은 대화의 기술도, ‘그래그래’ 끄덕이는 것도, 좋은 말 대잔치도 아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따뜻해서, 착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대해 믿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이다.”(정혜신)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이 옳다’는 말의 본뜻이라고 했다. 이런 정서적 내 편은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원과 같다.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주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정혜신씨에게는 남편 이명수씨가 그 한 사람이다. 12살 때 7년간 암으로 투병하던 엄마를 떠나보낸 그의 어린 시절은 잿빛과 결핍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나만 고립된 것 같은 느낌들에 한없이 외로웠던 그 우울한 나날이 정신과 의사가 돼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는 중에도 걸핏하면 치고 올라왔다. 상처를 공감받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는 그 직업에서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큰 고통을 겪었다. 그를 바꾼 것은 일상에서 남편에게 남김없이 공감받은 경험이었다. “조금씩, 천천히, 끝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리고 내 직업은 고통이 아닌 희열로 바뀌었다.”(책 188쪽)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면
정혜신씨는 지난 15년간 ‘거리의 치유자’로 살았다. 2004년 진도 간첩조작 고문 피해자 박동운씨의 깊은 심리적 아픔을 보고 치유상담에 나선 이래 사회적 재난 피해자를 최전방에서 만나왔다. 고문생존자를 돕는 ‘진실의 힘’과 쌍용자동차 해고자 및 가족을 돕는 ‘와락’, 세월호 피해자를 돕는 치유공간 ‘이웃’에서 상담했다. 이런 상담 현장에서 이명수씨는 어떻게 심리적 심정지 상태에 있던 이들의 심장이 다시 뛰는지 지켜본 증인이다.
세월호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노인들이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 소동이 끝난 뒤 정혜신씨는 한명의 노인과 얘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세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세상을 떠난 아내와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말했다.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것은 좀 부끄럽지.”(책 45쪽)
정혜신씨는 분노 가득한 사람도 만났다. 남편이 인권 관련 집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고, 그 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생계를 도맡았다. 30대 초반의, 아이가 셋인 아내는 “운전면허가 있었다면 트럭을 몰고 경찰청 정문을 들이받고 나도 죽고 싶다”고 했다. 정혜신씨가 대꾸했다. “운전면허가 왜 필요해요. 들이받고 말 건데. 면허 없어도 돼요!” 그의 말에 아내는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 비장한 분노를 표출했다가 순간 긴장이 풀어졌다.(책 166쪽)
“자기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면 사람은 합리적인 존재로 돌아온다. 자기도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거리를 갖고 보게 되면서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작용도 없이 문제 해결이 저절로 된다.”(정혜신) 행동이 옳다는 게 아니라 감정이 옳다고 하면, 거기서부터 성찰과 화해가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나’와 ‘너’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하나?
“공감은 나한테 먼저 적용되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착취적 관계에서는 공감하는 게 옳지 않다. 갑질 상사한테 맞추려 한다면 나는 점점 지워지고 그는 괴물이 될 것이다.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경계를 명확히 세우고, 필요하다면 관계도 끊어내야 한다. 엄마나 남편, 아내가 내 삶에 너무 관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이명수)
“공감은 감정노동이 아니다. 너와 나는 다르고, 개별적 존재라는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나는 희생하고 헌신하고 망가져도 상대방은 떠받치는 게 공감이 아니다. ‘나’는 없고 ‘너’만 있는 것은 병적인 관계다.”(정혜신)
수만번 지옥에 빠지는 게 삶이다.
전문직에서 일하는 40대 미혼 여성이 동갑내기 남성과 결혼을 결심했는데 홀로 사는 엄마가 반대해 상담했다. 엄마는 사윗감이 전문직이 아니라서 나중에 딸한테 얹혀살지도 모른다며 반대한다고 했다. 딸은 엄마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며 결혼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정혜신씨는 “딸은 국경수비대가 하나도 없는 나라 같다”고 진단했다. “엄마가 경계를 허물고 침략군처럼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의사 결정 영역까지 쳐들어왔는데 나가라는 말도 못 하고 맞서 싸우지도 못”하는 탓이다.(책 182쪽)
―충조평판 하지 않고 공감하려는 결심이 자꾸 무너지면 어쩌나?
“우린 일상에서 여러번 패하고 아직 채 일어서지 못했거나 어제 패하고 오늘 다시 일어서는 중인 사람들이다. 치유자라고 해서 지옥에 빠지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일어나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기에 ‘또 빠졌구나, 빨리 나와야겠다’ 이렇게 담백해지는 거다.”(이명수)
“무너지면 풀썩 주저앉게 되잖나. ‘내가 알았던 게 아니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근데 그것이 삶이다. 조금 잘되다가도 다시 떨어지고, 그렇게 뭉개다가도 다시 나아가고. 지옥이 일상이고, 일상이 지옥이라는 걸 순하게 받아들이면서 죽는 날까지 수백, 수천, 수만번 무너지는 게 삶이다. 깨달음을 얻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가짜다.”(정혜신)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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