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불법승(佛法僧)

장백산-1 2020. 7. 11. 18:33

불법승(佛法僧)      / 성철스님

“마음 청정이 부처(佛)요, (심청정시불, 心淸淨是佛), 

 마음 광명이 법(法)이요. (심광명시법, 心光明是法). 

 청정 · 광명해 걸림 없는 수행자가 스님(僧이다. (정광무애시승, 淨光無礙是僧).”(주1)

이것은 임제(臨濟)스님의 법문인데, 실제로 심청정(心淸淨)이 되고, 심광명(心光明)이 되고, 정광무애(淨光無礙)가 되어야지만 올바로 깨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청정(心淸淨),즉 마음이 ‘청정하다’, ‘깨끗하다’ 하면 마음이 어느 정도로 깨끗한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허공(虛空), 그 허공이 참 깨끗합니다만 깨끗한 허공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공이 깨끗하다는 말도 또 한 방망이 맞아야 한다(허공야수끽봉,虛空也須喫棒)(주2)고 말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에 비하면 허공은 깨끗한 축에도 끼지 못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을 깨끗한 거울, 명경(明鏡)에 비유합니다. 먼지 한 점 없는 그 명경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거울 그런 유(類)가 아닙니다. 어떤 스님이 말했습니다.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타파경래, 打破鏡來), 너와 서로 보리라. (여여상견, 與汝相見).”(주3)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해 가는 단계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으로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心淸淨)인가?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전에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심청정(心淸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지등각은 아주 거친 분별 번뇌 망상(추중망상,麤重妄想)은 떨어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의 미세한 분별 번뇌 망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無意識世界)인 제8아뢰야식 근본무명(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떨어져야만 이것이 참다운 청정한 마음(心淸淨)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깨끗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깨끗한 거울보다 더 깨끗합니다. 심청정(心淸淨)이 자리는 일체의 분별 번뇌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계(無心境界)로 이것을 지칭하여 진여자성이니, 성불이니, 견성이니 하는데, 무심경계(無心境界) 이것은 말로서가 아니고 실제 경험에서 그 경지를 체득해야 됩니다.

모든 분별 번뇌 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경계가 나타나면 목석과 같은 무심인가? 아닙니다. 무심(無心) 거기에서, 그 깨끗한 마음, 심청정(心淸淨)에서 큰 광명(光明)이 나타납니다. 이 광명을 옛 스님들은 천일병조(千日並照)라고 말했습니다. 천일병조! 태양 하나만 떠도 온 세계가 이렇게 환히 밝은데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천 개의 태양이 일시에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일병조(千日並照) 이것도 오히려 유한(有限)입니다. ‘천(千)’이라는 유한한 숫자가 있으니까.

마음이 청정(心淸淨)한 여기에 생기는 광명(光明)은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동시에 비추인다고 해도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광명이니 불가설,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광명입니다. 시방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광명을 설명하려 해도 다하지 못하는 광명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심광명(心光明)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무애(淨光無礙), 즉 심청정과 심광명이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다 막힘이 없다, 즉 심청정과 심광명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빛이 있으면 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청정은 불에다 비유할 수 있고 심광명은 빛에다 비유할 수 있어서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입니다. 빛 여읜 불이 따로 없고 불 여읜 빛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불과 빛 같은 심청정 심광명이 둘이 될 수 없는 것을 정광무애(淨光無礙)라 합니다.

육조 스님도 정(定)과 혜(慧)를 말할 때 심청정(불)과 심광명(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근본 요점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을 성취하여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명경보다 더 깨끗한 무심경계(無心境界)만 증득하면 자연히 거기서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비추는, 비유할 수 없는 그런 대지혜(大智慧) 광명(光明)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경지를 지칭해서 정광무애(淨光無礙)라 합니다. 빛(심광명) 따로 있고 불(심청정)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빛(심광명)이 즉 불(심청정)이고 불(심청정)이 즉 빛(심광명)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리하여 ‘심청정(心淸淨)’을 불(佛)이라 하고, ‘심광명(心光明)을’을 법(法)이라 하고, ‘정광무애(淨光無礙)’를 스님(僧)이라 하여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되는데 불(佛) 법(法) 승(僧)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火, 心淸淨)이라 말할 때는 부처님(佛)을 표현하고, 빛(심광명,心光明)이라 말할 때는 법(法)을 표현하고, 불(심청정)이 즉 빛(심광명)이고 빛(심광명)이 즉 불(심청정)이다 말할 때는 스님(僧)을 표현하는 것이니, 불(佛) 법(法) 승(僧) 표현은 각각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불이 빛이고 빛이 불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 즉 청정, 광명, 무애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셋이 즉 하나이고, 하나가 즉 셋이다(三卽一, 一卽三)(주4)”라고 합니다. 심청정(心淸淨)’을 불(佛)이라 하고, ‘심광명(心光明)을’을 법(法)이라 하고, ‘정광무애(淨光無礙)’를 스님(僧)이라 하는 이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실제로 증득할 것 같으면 그때에서야 비로소 불법을 아는 동시에 모든 분별 번뇌 망상의 속박을 다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한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속박은 왜 생기느냐? 분별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번뇌망상 이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분별번뇌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無心)을 증득하여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경지를 성취할 것 같으면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진정한 자유(自由)라고 합니다.

눈감은 봉사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이리 가도 엎어지고 저리 가도 넘어지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자기가 눈을 뜨면 온 천지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를 봉사라 하는가? 크게는 산도 보고 작게는 먼지도 다 보는데 어째서 우리를 두고 눈감았다고 하는가? 한 가지 비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깨쳤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 꿈속에서는 모든 활동이 자유자재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턱 깨고 나면 “아하! 내가 참으로 꿈속에서 헤맸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 세상이 꿈인 줄을 전혀 모릅니다. 꿈속 세상에 사는 줄을 모릅니다. 실제 그 꿈을 깨고 나야, 그제야 비로소 여태까지 꿈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아니면 꿈을 모르는 것과 같이, 깨쳤다는 것은 실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어나기 전에는 깨쳤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장자(莊子)도 “크게 깨치고 나서야 큰 꿈을 알 수 있다〔大覺然後知大夢〕.”(주5)고 하였습니다

중생이 분번뇌망상의 유심(有心) 속에 사는 동안은 세상 전체가 꿈입니다. 그래서 십지등각도 꿈속에 사는 줄 알아야 됩니다. 오직 제8아뢰야식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그때서야 꿈에서 깨어난 사람, 즉 부처(佛)입니다. 부처가 되기 전에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 즉 부처가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는 꿈속에서의 자유이고 꿈에서 깨어난 사람의 자유는 꿈에서 깨어난 뒤의 자유이니, 꿈속에서의 자유를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꿈과 생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깨쳤다는 것, 꿈속에서 깨어났다는 말을 대강은 짐작할 것입니다. 깨쳤다는 내용이, 성불했다는 내용이 무심(無心)에 있는데 무심을 증하면 거기에서 대지혜 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깁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자유자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다 필요 없습니다. 부처다, 조사다, 팔만대장경이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약(藥), 방편(方便), 수단(手段)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생의 근본병인 꿈(無明)을 완전히 깨우고 나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이 있을 때 약이 필요하지 병이 다 낫고 나면 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을 완전히 깨워서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인입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 있거니 (장부자유총천기, 丈夫自有沖天氣),

 부처가 간 길은 가지 않는 도다. (불향여래행처행, 不向如來行處行).”(주6)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간 길을 따라가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가 초월신(超越神)을 주장합니다.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를 떠난 저 천상에 있는 초월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그 초월신에 맡기고 그 밑에 무조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초월신의 뜻대로 되게 해주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리하여 죽고 나면 그 초월신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초월신을 섬기면서. 

그러나 초월신 밑에서는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거일동이 초월신의 지배하에서 초월신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초월신의 속박을 받는 것이니, 그런 종교의 사상은 노예도 덕(德)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월신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은 종같이 되어 초월신의 지배를 받아야 되니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침도 한번 크게 못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주장은 다릅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본래 불성(佛性)이 다 있어서 그 불성, 마음이 청정하고 깨끗하여 거기에는 부처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습니다. ‘심청정(心淸淨)’하여 깨끗하다고 한 거기에서는 부처도 때(구, 垢)이고, 조사도 때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더 말할 것도 없는 때이고! 그토록 깨끗한 곳, 일체 분별 번뇌 망상이라는 때가다 떨어진 심청정(心淸淨)’에서는 부처의 지배도 받지 않고 조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대자유 대해탈 경계입니다. 심청정(心淸淨)’에서는 어떤 속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상대적인 무슨 지배를 받고 무슨 속박을 받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금기(禁忌)입니다. 이것이 대해탈인 동시에 성불이며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자유에 대해 많이들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라고.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심청정(心淸淨)을 실제로 증하고 심광명(心光明)을 증해서 청정과 광명이 거리낌없이 무애한 그 속에서 놀아야만 비로소 참으로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무조건 복종하고, 이렇게 되면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해탈되어 있습니다. 해탈되어 있는데 분별번뇌망상 때문에 여러 가지 구속이 생겨났습니다. 분별번뇌망상만 완전히 끊어 버리고 무심(無心)을 증하여 본래의 해탈, 대자유를 회복할 것 같으면, 그러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높다 그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설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말로 표현하자니 마지못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면 심청정, 심광명, 정광무애를 성취한 대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천상천하에 무애자재합니다. 그런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신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서 구경락을 얻습니다(이일체고 득구경락, 離一切苦 得究竟樂)(주7).

설사 초월신(超越神)을 숭배하여 그 세계에 가서 난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초월신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일체고(離一切苦)가 안 됩니다. ‘이일체고(離一切苦)’는 부처님의 속박도 받지 않고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이런 대자유는 우리 불교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다, 자유다 하는 것에는 어느 종교 어느 사상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자유자재가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내 물건이지만 이것이 진금(眞金)인가 잡철(雜鐵)인가, 그것도 구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실제 진금을 잡철로 착각해서는 큰일납니다.

이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부처 조사 거기에 구속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본시 부처다(즉심시불, 卽心是佛)” 이것만이 바른 믿음(正信)이고, 이것 이외에 딴 것을 믿으면 그것은 삿된 믿음(邪信)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부처도 조사도 팔만대장경도 버리라고 항상 말합니다.

고불고조(古佛古祖)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 (견불조 여원가상사인,見佛祖, 如寃家相似人).”(주8)

부처와 조사 보기를 원수처럼 보라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자기 마음이 조사입니다. 자기 마음이 극락이며 자기 마음이 천당입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꿈속에서나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교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벽에 부닥쳤습니다.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을 해보겠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해야 되는데, 당신이 참선을 하려면 근본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입니까?” “스님들도 참선을 하려면 불교부터 버려야 되는데, 당신이 예수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 공부는 못 해. 예수교라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야 돼!” “스님, 가서 생각해 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허허, 생각해 보고 온다는 말은 안 온다는 말 아냐? 예수교 못 버리면 아예 오지 말아. 그래서는 백 년 해봤자 참선(參禪)이 안 돼.”

내가 처음에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이라 말한 것은 부처도 조사도 설 수 없는 그런 청정 광명을 말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 여기 와서는 때(垢)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을 깊이 믿고 오직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佛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오직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르게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 속에서 대자유자재한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어디 있느냐? 밥 이야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해서,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서 내가 한 말이 헛된 말이 안 되고 실제로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 이것을 성취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도록 노력해야 안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만을 믿으라’고 한다고 “옳지, 술 생각이 나는데 술 마시러 한번 가볼까?” 이렇게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런 생각은 자기가 아닙니다. 분별 번뇌 망상이고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자기’는  ‘깨끗한 자기’, 즉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을 말함이지 ‘거짓의 자기’, 즉 분별 번뇌 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인 공자(孔子)도 말했습니다. “70살이 되니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칠십종심소욕불유구, 七十從心所欲不踰矩)(주9).”.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무슨 짓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심청정, 허공보다 더 깨끗한 이 마음을 실제로 알고 보면, 직접 자기가 증득해 놓고 보면 이리 가도 대해탈 경계, 저리 가도 대해탈 경계, 부처님 행동 그대로입니다. 저 시방세계를 다 찾아봐도 술 먹고 싶어 날뛰는 그런 사람은 그 깨끗한 거울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태평양 한복판, 물이 깊고 깊어서 태풍이 불어 아무리 바닷물이 움직이고 움직여도 깨끗한 물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얕은 구정물을 보고서 “물은 꼭 같지?” 이렇게 나오면 그때는 깨끗한 물은 평생 못 보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마음, 심청정(心淸淨), 심광명(心光明),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선과 악이 다 떨어진 곳이고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곳입니다. 청정한 자기를 바로 믿고, 청정한 자기를 바로 깨칩시다.  

<1982년 5월15일, 방장 대중법어>

(주)
1) 『임제록』에 나온다. 원문은 “佛者, 心清淨是; 法者, 心光明是; 道者, 處處無礙淨光是.”이다. 道者는 수행자를 말하므로 僧者라 할 수 있다.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이하 동일.
2) 『천은선사어록天隱禪師語錄』 권제1에 나온다. 
3) 『원오불과선사어록』 권제7에 나온다.
4)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5)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且有大覺而後, 知此其大夢也.”이다.
6) 『천목중봉화상광록』 권제4지3 등 여러 곳에 나온다.
7) 『대승기신론』 앞부분에 나온다.
8) 『밀암화상어록密菴和尙語錄』,영은불해회중오비구靈隱佛海會中五比丘·행개구법어行丐求法語에 나오는 구절이다. 
9)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출처: 월간 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