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사랑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장백산-1 2020. 11. 14. 10:47

사랑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탄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탄생은 그냥 일어난 일이다. 이미 일어난 탄생이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그대는 살아 있다. 탄생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는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세 기본 요소가 있다. 탄생, 사랑, 죽음은 그냥 저절로 일어난다. 탄생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지금 탄생을 자각해본들 탄생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지금 당장 죽음에 대해 자각할 수 있겠는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밖에 없다. 그 사실에 눈을 뜨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관찰해보라.

산다는 것은 그대가 뭔가를 행하는 게 아니다. 그대는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날 문뜩 그대는 빛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돌연 그 빛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알 수 없는 손에 이끌려 사랑의 빛이 그대의 영성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예전의 그대가 아니다. 둔감하고 칙칙하고 정체된 모든 것은 사라졌다. 돌연 그대는 기쁨을 느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산정상에 오르면 깊고 어두웠던 계곡은 잊어먹기 마련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산정상에 대해 과연 그대가 무얼 행할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강요한다. 사랑이란 것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서 사랑은 본질이 왜곡되어버렸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난 네 엄마야, 그러니 너는 날 사랑해야해.” 아이가 어떻게 사랑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는 뭘 어떻게 해야 사랑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사랑을 강요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집에 가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겠지!”

그런식으로 사랑을 강요받은 아이는 점점 정치인이 되어 사랑의 정치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연습된 사랑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또한 아이는 속임수를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기만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 아이는 엄마가 다가오면 의도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독립적인 생활능력이 없는 아이는 부모에게 의지해서 사는 처지이므로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 아이의 생존은 부모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아이는 외교관이 된다. 부모에게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않지만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그런 가식이 깊게 뿌리를 내려서 평생 가식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랑은 ‘해야만 하는 것’처럼 의무가 되어버린다.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가? 사랑은 의무가 된다. 그것은 명령이므로 충실히 따라야 한다. 사랑은 책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세뇌된 사람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일어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그냥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늘 사랑이 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사랑이 다가온다. 사랑의 화살은 쏘아졌고 그대의 가슴에 꽂힌다. 사랑은 결국엔 아픔이라는 과보를 준다. 사랑엔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은 늘 존재계의 손에 달려있다. 사랑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오쇼의 <사랑의 연금술> 중에서

 

'삶의 향기 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는 노래  (0) 2020.11.17
용서  (0) 2020.11.16
사랑은 영성(靈性)을 밝힌다.  (0) 2020.11.14
무상한 사랑, 간사한 마음  (0) 2020.11.13
그냥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있다  (0) 2020.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