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방과 해탈
해탈, 신비로운 종교용어 넘어 대중과 함께 해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정치적 용어인 해방이 유행어 등극
일상에 지친 개개인이 대변…나를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해방
나로부터 해방은 불교 해탈과 동의어…이제 불교가 답할 차례
![](https://blog.kakaocdn.net/dn/bg4dnX/btrGzNMJ59z/7EeHqZjJHdao4q6lEJRYv1/img.jpg)
‘해방’이란 단어가 시대의 유행어가 될지는 정말 몰랐다. 올해 5월 말 종영한 총 16부작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추앙, 갈구 등 숱한 유행어와 함께 해방이란 단어를 시대의 유행어로 등극시켰다. 마치 포로수용소의 포로가 어느 날 우연히 철조망의 개구멍을 보고나서 자신이 오래 전부터 탈출을 꿈꾸어 왔음을 알아차리듯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해방을 갈구해 왔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해방이란 단어는 늘 정치적 용어였다. 멀리는 1863년 미국의 노예해방 그리고 한국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그랬고 이후 독재탄압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등장하였던 민중해방, 남조선 해방 등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체제 전복(顚覆)을 갈구하는 언어였다. 그렇듯 정치적 언어로서 해방은 박해자와 박해받는 자라는 대립적 구조를 전제한 투쟁의 언어였다.
이를 종교적 미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1970년대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번져갔던 해방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신학에서 구원이란 단어는 해방으로 대체되었고, 구원이란 곧 박해받는 자들의 해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의 해방일지라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소위 갑질에 대한 을의 반란과 해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옭아매는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해방을 갈구하는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말한다. “조용히 지쳐간다” “혼자라는 느낌” “약하다는 느낌” 그리고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말은 “모든 관계는 노동이다”는 말이었다. 굳이 갑을의 관계만이 아니라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버겁고 힘든 지금 우리의 일상을 잘 표현 하는 말이었다.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한 교회 현수막에 걸려있는 말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겁니다”는 일종의 아이러니다. 교회 이름이 해방교회라 더욱 그러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변할 기미조차도 없는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말은 남루하고 지친 일상을 더욱 지치게 할뿐이다.
드라마에서 촌스런 염씨 삼남매 그리고 구씨가 해방의 실마리를 찾은 건 인간에 대한 ‘환대’에서다. 여기서 환대란 누군가를 ‘후하게 대접하는 일’까지도 아니다. 그냥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이다.
어찌보면 싱거울 정도의 맥 빠지는 해결이라 싶지만, 오늘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먹잇감이거나 도구일 뿐인 것이 지금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일상이다. 어느 사회학자는 우리 사회를 ‘불안한 사냥꾼의 사회’라고 했다. 불안한 사냥꾼이 어디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마구 총질을 해대는 것은 스스로 총알을 맞지 않으려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해방일지’는 문학적 성취의 여부를 떠나 오늘 한국사회의 세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작이라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내가 이 드라마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해방’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늘 ‘해방’이란 단어를 정치적 사건으로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통해 해방의 의미는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해방. 내가 나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정치적 맥락에서의 해방이 힘 쎈 타자(他者)에 대항하는 투쟁과 전복을 함의하는 것이라면 나의 해방은 그 의미의 결이 전적으로 다르다. 나를 옭아매고 짓누르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억압의 주체가 곧 해방의 주체이자 해방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해방’ 혹은 ‘나’로부터의 해방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을 뜻하는 범어 목샤(moksa) 혹은 비목샤(vimoksa)의 영어 번역어는 liberation(리버레이션), 즉 해방이라고 한다. 해탈과 해방은 동의어다. 불교에서 번뇌의 이명(異名)을 결(結)이라고 한다. 결박의 의미다. 나를 묶고 있는 ‘결’(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방이 곧 해탈이다. 그 결(結)은 나 자신이 만든 것이다. 부처님은 세상을 변화 시켜 ‘나’를 해방코자 하기보다 ‘나’를 변화 시켜 나를 해방코자 하였다(물론 나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곧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나의 노력과 헌신을 포함 하는 일이어서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현상 그 자체는 한편으로 보면 우울한 우리시대의 한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늘 세상의 변화 없이 내 해방이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해 오던 지난 시절에 대한 반성이기도 한 것이어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원론적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더 나은 세상,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는 세상의 변화와 나의 변화는 동전의 양면 같이 동시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공성(空性)을 세상에 대한 실천적 윤리로 전환한 대승의 보살도가 바로 그 좋은 예다.
해탈의 출발이 현재의 고(苦)를 자각하는 일이듯이 해방의 출발도 갇혀있는 현재를 자각하는 일이다. 염미정이 해방클럽을 만들자고 하면서 하는 말이다.
“해방클럽.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염미정의 이 말로 ‘정치적 사건’ 안에 갇혀 있던 해방의 의미는 이제 일상의 해방, ‘나’의 해방으로 확장 되었다. 많은 대중들이 이 드라마에 공감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이제 불교가 세상에 답을 할 차례다. 지금 불교의 해탈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저 구름 위 아니 저 대기권 바깥의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해탈을 신비의 영역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일상의 해방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하라”고 하신 부처님의 당부에 답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39호 / 2022년 7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문> '내가 없다'는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0) | 2022.07.14 |
---|---|
오온(五蘊),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붓다의 통찰은 ‘뇌과학’ (0) | 2022.07.12 |
2. 전전두엽과 불성, 그리고 수행 (0) | 2022.07.01 |
진정한 대화, 내가 아닌 ‘타인 옳음’ 숙고하는 과정 (0) | 2022.06.21 |
명상 통해 감각적 쾌락 줄일 때 행복유전자 증가 (0) | 2022.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