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진정한 대화, 내가 아닌 ‘타인 옳음’ 숙고하는 과정

장백산-1 2022. 6. 21. 22:53

7.정견(正見)의 일상적 실천(2)

 

진정한 대화, 내가 아닌 ‘타인 옳음’ 숙고하는 과정


대화하며 갈등 생기는 것은 타인 설득에만 목적을 두기 때문
설득하기보다 상대 이해하고 경청하는 게 대화에서 더 중요
사람 마음 얻지 못하고 하는 조언·충고는 소음·잔소리일 뿐

 

간다라 불교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설법하는 붓다의 모습. 파키스탄의 불교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늘 경험하는 일이다. 꼬인 관계를 풀기 위해 시도했던 대화가 또 다른 갈등을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개인 간의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공적 대화라고 할 수 있는 회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구성원 간에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현안에 대한 더 지혜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시도했던 회의가 서로 다른 입장 차이만 부각될 뿐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지 못하고 교착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대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써 설득하는 것을 대화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점가에 나와 있는 자기 계발서에서 강조하는 대화 또한 주로 상대를 설득하고 내 생각을 관철하는 일종의 언변술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설득을 위한 대화란 결국 ‘창’과 ‘방패’의 싸움일 뿐이다.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다는 ‘창’(모,矛)과 어떠한 창도 다 막을 수 있다는 ‘방패’(순,楯)와의 싸움이다. 여기서 승자는 누구일까? 그야말로 모순(矛盾)이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던 원효의 ‘장님과 코끼리’ 예화로 돌아가자.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배를 만진 장님은 ‘벽’과 같다고 한다. ‘벽’과 ‘기둥’은 모순관계다.

각자가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설득을 위한 대화란 결국 각자의 ‘옳음’을 주장하는 상황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각자가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코끼리’를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회의가 표류하고 대화가 교착되는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려고만하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양보와 타협이 가능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양쪽의 힘이 불균형적 상황인 경우가 많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타협은 지속적이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양보와 타협을 위해서는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나의 코끼리만 코끼리’라는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요컨대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대화란 말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말하기’와 ‘듣기’의 과정이 대화다. 실제로 대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다. 우리는 흔히 대화를 통해 나를 이해시키고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내 귀를 여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만큼 나를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다.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화는 상호 간의 명상이며 친절과 자비로운 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한 믿음과 악의 없는 태도로 질문과 답변이 교환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주의 깊게 공감적으로 경청하고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한다.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권혁 역, 돋을새김, 2012, 172쪽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곧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이 대화의 본질이다. 개인적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회의와 같은 공적 대화에 있어서도 이러한 대화의 원칙은 마찬가지다.

조직 내에서의 회의란 해결을 위한 중지(衆智)를 모으는 과정이다. 즉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기 위한 것이다. 요즘의 대중지성에 해당되는 말이다.

한국 절 집안에서 내려오는 “바보 셋이 문수 지혜보다 낫다”는 말도 결국은 뛰어난 한 사람의 지혜보다 여러 사람의 중지(衆智)가 더 소중하다는 말일 것이다.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우리는 말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석상에서 나에게 반대하는 다른 의견을 대하면 기분이 상하고 심지어 화를 내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는 새로운 것을 알고, 배우게 되는 기회다. 단 상대방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말꼬리를 잡거나 상대방 말의 허점을 공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경청,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은 더 큰 지혜를 모으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이로움이 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다. 이청득심(以聽得心), ‘논어(論語)’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 친구, 직장 등 조직 내에서 서로 간에 충고, 조언 그리고 평가와 칭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다. 단정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듣는 것이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충고나 조언은 그 다음의 일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의 실패 원인을 ‘듣지 않고 해결책만 제시’하였던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주로 남자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성별을 떠나 인간의 일반적 태도이기도 하다. 친구 혹은 후배가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라든가 “ 아, 나도 겪어 봤는데”라면서 이러저런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친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해결책을 몰라서 나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이다. 충고나 조언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다. ‘아, 그랬구나’ ‘ 힘들겠다’ ‘나라도 그랬겠어’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들어주는 태도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요, 진정한 선배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하는 조언과 충고는 소음이거나 잔소리일 뿐이다. ‘그냥’ 들어주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을 얻은 후에는 잔소리조차도 훌륭한 ‘조언’이 될 수 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37호 / 2022년 6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