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본래 때 묻지 않은 자기 마음을 보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장백산-1 2022. 12. 10. 22:32

음성 법인사 주지 법휴 스님

 

본래 때 묻지 않은 자기 마음을 보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곧 본성이니 여러분이 존재하는 곳이 부처 있는 곳

마음 다스려 관하고 깨닫는 작용 밝게 해 삼독심을 끊어내면

항하의 모래 수 같은 공덕이 무량한 법문을 성취하게 할 것

 

법인사 주지 법휴 스님은 유위법에 머물러 작은 것을 탐하지 말고, 마음을 밝게 하는 수행으로 견성성불에 한걸음 다가가라고 강조했다.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뒤에 49년간 8만4천의 법문을 하셨고, 8만4천의 그 가르침은 ‘화엄경’ ‘아함경’ ‘방등경’ ‘반야심경’ ‘법화경’ 등의 경전으로 편집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법문을 교문‧선문‧염불문‧총지문 4종으로 나누는데, 교문은 경‧율‧론 삼장 연구로 간경삼매력을, 선문은 견성성불 조사공안으로 선정삼매력을, 염불문은 구념심행 정토왕생으로 염불삼매력을, 총지문은 밀교진언 상밀상응으로 주문삼매력을 불도 수행의 노정기로 삼아 수행정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조사님들이 도를 이루셨지만 저는 경문에 대한 이해가 원만하지 못해 출가사문으로 사람 노릇도 잘 못한데다가 깨달음마저 요원하여 신심이 돈독하신 신도 분들을 대할 면목이 없음을 항상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모든 분야가 단순하고 쉽고 편리하게 이해가 잘 가도록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인데, 대중들이 불법을 깨칠 수 있는 수행법은 없을까?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다이렉트로 확 깨닫는 그런 방도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본성을 보아, 즉 본래 때 묻지 않은 자기 마음만 보면 성불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별나게 어려운 경문을 파고들며 그 속에 깨침이 있는 것처럼 헤매지 말고 견성성불만 하면 누구나 된다는 뜻입니다.

왜 본성이 마음인가? 본성즉시심(本性卽是心) 본성이 곧 마음이요, 심즉시본성(心卽是本性) 마음이 곧 본성입니다. 견성(見性)이란 무엇이냐? 본성을 보면,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마음이 있으며, 여러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달마대사의 사상에 대해 말해 보려 합니다. 달마대사의 ‘이입사행’ 사상은 단순 명쾌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남깁니다. 달마대사가 벽관 9년 만에 만나게 된 혜가 스님이 묻습니다. “저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마음을 가지고 오라, 편안하게 해 주마”라고 했습니다. 이에 혜가 스님이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달마대사가 “내가 이미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고 합니다. 혜가 스님은 이 문답 후에 달마대사의 법을 이어 중국 선종의 2조가 됩니다. 두 분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달마대사의 대답이 단순한 논지나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궤변, 또는 재치 있는 상담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가서 불교에 기여한 가장 특색 있는 공헌이 이 문답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대사에게 구한 것은 단순히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나 원리가 아닌 현재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달마대사는 확실히 혜가 스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방편이나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가장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상대의 마음 자체를 적나라하게 내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부질없는 생각인줄 알지만 저는 수십 년을 보리달마를 그렸습니다. 그림에 따르는 화제를 찾다보니 ‘소실육문’의 달마어록을 보면서 ‘보리달마의 사상이면 우리 같은 둔근이라도 견성성불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달마도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달마사상은 경을 피하면서 본래로 돌아가는 원리인 이입(理入)이고, 본래로 돌아가는 실천 행입(行入)입니다. 이입이란 경전을 통해서 대의를 아는 것이며 마음이 있는 사람은 범부나 성인 모두 한결같은 진심을 가지고 있다고 깊이 믿는 것입니다. 다만 객진 밖에서 오는 번뇌에 쌓여 분명히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일시적인 생각을 멈추고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벽관에 충실하면 자신이나 타인, 범부건 성인이건 모두 평등하며 한층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옛날식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도 이미 진리와 암묵 속에서 계합함으로써 새삼스럽게 분별할 것이 없는 무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입이고 행입이란 네 가지 생활방식인 보원행(전생의 원한에 보답하는 행위)‧수연행(현생의 인연에 맡기는 행위)‧무소구행(과보를 구하지 않는 행위)‧청법행(법의 진실에 부합하는 행위)입니다.

앞서 혜가 스님의 ‘마음은 편안하지도 편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단지 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절망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본질을 이해한다는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래의 불교는 모두가 응병여약의 방편불교에 머물렀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탐구에만 매달려 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약이 필요 없는 본래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보리를 얻는다는 말이나, 미혹한 마음밖에 따로 깨달음이 없는 것,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마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금강경’의 삼세심불가득의 가르침을 혜가 스님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번뇌를 끊지 않고 보리를 얻는다는 도리나 방법이 아니라, 참으로 번뇌를 끊지 않고 보리를 얻는 것 바로 그것을 찾는 것이었으며 마침내 그것을 찾은 것입니다.

삼세심불가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혜가 스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안고 있는 불안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러한 혜가 스님의 불안을 정통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하여 ‘불안한 지금의 마음을 가져오라’는 달마대사의 말 한마디로 혜가 스님은 본래의 편안함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본래의 편안함은 이제 과거 미래 현재와 관계가 없으며 잃어버림도 없고 회복됨도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 선의 초조가 된 것은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화에 능숙한데 있었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부처로 될 뿐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한 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할 수 있으면 달마대사를 조사로 하는 선종은 흥할 것입니다.

달마대사의 ‘혈맥론’에 ‘약욕멱불 수시견성 성즉시불(若欲覓佛 須是見性 性卽是佛) 약불견성 염불송경 지재지계 역무익처(若不見性 念佛誦經 持齋持戒 亦無益處)’라 했습니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성품을 보라 성품이 곧 부처이다.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염불하거나 경전을 독송하거나 재를 지키고 계를 가져도 또한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염불은 인과를 얻고 경을 독송하면 총명함을 얻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하면 복을 얻으나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선성이란 비구가 있어 12부경을 다 외울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은 윤회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견성성불이 절대 필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부터 ‘지극한 도는 말로 할 수 없는데 가르침은 말뿐이니 말은 실은 도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할 수 없으므로 말로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자기 마음이 부처인줄 아는 것은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견성하면 재가불자라도 부처가 될 수 있고, 견성을 못했으면 머리와 수염을 깎았어도 도에서는 벗어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성은 곧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곧 본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 곧 부처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물을 마셔보아야 차가운지 따뜻한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도는 본래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 증득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도는 소리나 물질이 아니며 묘하고 보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스스로 터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불상을 세워 공경함을 공덕으로 알고 물이나 육지의 중생을 많이 상하게 하면서까지 불상과 탑을 세우느라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나무나 진흙을 쌓아올리고 울긋불긋 단청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기울여 힘을 써도 자신도 손해를 보고 남을 미혹하게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이미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유위법을 보면 끈질기게 애착하는데, 무위법을 설하면 멍멍하여 바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작은 즐거움을 탐하여 다가오는 큰 고통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닦고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며 올바른 것을 등지고 삿된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하여 복을 얻었다는 말은 다 속은 말일 뿐입니다.

여러분, 달마대사는 그 가르침이 오직 견성하여 성불하면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주장하는 것이 없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려 내면세계를 비출 수 있다면 관하고 깨닫는 자세한 작용을 항상 밝게 하여 탐‧진‧치 삼독을 끊어 영원히 없애 버리며, 안‧ 이‧ 비‧ 설‧ 신‧의 육문(육근, 눈 귀 코 입 몸 마음)을 굳게 닫아서  탐 진 치 3가지 번뇌가 침입하여  마음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공덕이 갖가지 장엄과 무량한 법문을 나날이 성취할 것입니다.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눈 깜박할 사이만큼이나 가깝고 깨달음은 잠깐사이인데 어찌 백발이 되도록 수고만 하려 합니까. 숨겨진 비밀스러운 법이 있지만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간단하게 마음에 관한 법의 그 옆 부분이나마 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달마대사의 가르침 중 ‘혈맥론’에 바탕하여 지금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인 동짓달에 한해의 모든 액운을 날려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 가정에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길 기원드립니다.

정리=강태희 충청 지사장

이 내용은 음성 법인사 주지 법휴 스님이 11월24일 설한 초하루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660호 / 2022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