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응화신(나투어진 몸)은 참된 것이 아님) (끝)
- 진우 스님
- 승인 2024.12.13 15:30
- 호수 1757
인연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꿈이나 그림자와 같음 알아야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사구게를 관하면 망상의 마군 물러나
불교 따로 현실 따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불자 못 돼
신수봉행 넘어 이제는 남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은혜 갚아야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어찌한 연고이냐? 일체의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
이 경의 네 가지 사구게(四句偈) 가운데 마지막 게송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본래 거짓됨이요, 모든 물질의 모습 상(相)까지도 환화(幻化)이며 공화(空華)인데, 이에 그릇되게 집착하여 중생을 보게 되고, 법을 보게 되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되고, 태어남을 보게 되고, 죽음을 보게 되고, 티끌을 보게 되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보게 되고, 고통을 보게 되고, 즐거움을 보게 되고, 슬픔을 보게 되어, 모든 괴로움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이름이 다하는 때가 있는 바, 세간의 일체 색연상(色緣相), 즉 산하대지 허공 등과, 일체 심연상(心緣相), 즉 시비고락(是非苦樂)의 분별과 일체의 보리법(菩提法)이, 모두가 공중에 헛보이는 꽃과 같은 것이요, 잠 속의 헛것인 꿈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허망 무실한 헛것인 줄 안다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스스로 여여부동한 것이었음을 알게 됨이다.
이 사구게는 다함이 없는 저 땅의 여여부동(如如不動)함을 보이는 것으로서, 스스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저 다함이 없는 땅을, 안팎으로 허망함으로 된 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구게의 여여부동하여 다함이 없는 땅, 즉 무위지(無爲地)는 이를 곧 깨달은 후의 삼단수행(三段修行)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를 보이게 됨이다. 즉, 동적(動的)인 일용법과 정적(靜的)인 일용법을 이미 보였지만, 즉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이 동정(動靜)의 두 가지 수행법에 있어서 아직 근기가 모자라거나 설사 근기가 된다 해도 마음과 대상 즉 내심외경(內心外境)에 또 다시 부딪칠 때에는 이 사구게(四句偈)로서 마음을 수리하고 채찍질하므로 일용(日用)을 삼아야 한다.
또한 반야의 힘이 약해지고, 번뇌의 힘이 성(盛)할 때는 고요히 앉아서 이 사구게를 관(觀)함으로써 모든 망상의 마군(魔軍)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또 어느 때와 어느 곳, 어느 대상, 어느 사건사고를 접촉하더라도 이 사구게의 뜻을 관하여 깨달은 후의 수행을 완전히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관하는가? 안으로 일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유위심(有爲心)과 밖으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모든 대상 모두는 근본이 허망하고, 꿈과 같이 없는 사실이며, 환상같이 헛된 존재들이며, 거품같이 약한 존재이며, 그림자같이 실없는 존재이며, 이슬같이 순간인 존재이며, 번개같이 순식간의 존재이며, 구름과 무지개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실히 관찰하여 탐하고 집착하지 말고, 따르고 쫓지 말며, 끌리고 매달리지 말며, 생각하고 그리워하지 말며, 섬기고 위하지 말며, 사랑하고 좋아하지 말며, 항상 그 마음을 가벼이 하지 말아야 할지다. 또 깨끗이 하고 바르게 하며, 고요히 하고 성성(惺惺)히 하여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깨달은 후의 수행, 즉 오후수행(悟後修行)에 있어서 열등한 근기로서는 꼭 해야 할 일용법(日用法)이다. 스님이나 신도를 막론하고 일상의 일에 있어서 부처님 말씀, 즉 불법(佛法)이 무색(無色)할 때가 너무나 많다. 이를테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또는 문제를 풀고자 할 때 시비가 생기거나 온 나라가 떠들썩할 이슈가 생겼을 때 등에 있어 불교적 관점에서 부처님 말씀을 인용할라치면 교과서적인 얘기 정도로 취급하면서 도통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불교(佛敎), 즉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나 당연히 그리고 너무나 지극히 현실에 적용해야 할 금언(金言)이다. 그러나 작금에 있어서 스님들이나 신도들조차도 현실에서는 현실의 이해타산과 임기응변으로만 임하려 하고 부처님 말씀을 장경각이나 박물관에나 들어 있을 내용으로 취급하고 있다.
설법과 법문을 할 때는 금방이라도 깨달을 것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정작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불편함이라도 느끼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입에 침을 튀길 정도로 거칠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끝 모를 자괴감이 든다. 불교는 지극히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현실 불교가 되고 나의 부처님이 된다. 불교 따로 현실 생활 따로는 불교도 아니요, 불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인과(因果)를 적용하고, 공(空)의 본뜻을 생각하며, 분별하지 않으려는 습(習)을 길러야 한다.
그럼으로써 매 순간, 매 찰나에 마음을 평안히 해야 한다. 지금 이순간 불자들이 현실에서 불교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다고 불만의 글을 쓰고 있는 소납 역시도 “이 또한 인과(因果)려니, 이 또한 공(空)이려니, 이 또한 분별(分別)” 이려니 하면서 마음을 평안히 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라는 인과(因果)의 원리만 제대로 알아도, 상황상황이 연기(緣起) 인연(因緣)의 모습들로 보아서 좋다 싫다 분별하지 않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되니 마음을 항상 평안히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요 불자의 도리라 할 것이다. 나에게 닥친 모든 인연, 세상의 모든 모습은 좋든 싫든 당연한 연기(緣起)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실은 실체 없는 무상(無常)일 뿐이다. 그러니 각자가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평안히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까지 마음을 닦아야 한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해야 한다.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고는, 불교 따로 현실 따로가 될 수밖에 없음이니, 현실이 불교요, 불교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해도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기도 참선 보시 정진으로 마음을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모든 대상을 대할 때 모두가 허망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는 내심외경(內心外境)을 여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허망하다는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요, 허망을 버린다는 것은 마음 안에 있다. 허망은 말 그대로 허망일 뿐이니, 버린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없는 것이다. 이를 버린다는 것이 다시 허망할 일이니 이 허망을 안이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모든 세계, 모든 티끌의 모습 그 자체가 법을 설하고 있다? 어떻게 법을 설하며 어떠한 법을 설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물음이 왜 생기느냐? 당연히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알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것, 즉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과 같으며,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니 허망한 것이요, 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이 순간일 따름이니, 응당히 이와 같이 알지니라고 하는 무상(無常)의 설법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에서도 여여(如如)하고, 저런 모습에서도 여여(如如)하며, 어디에서든 여여(如如)를 잊지 않고 변치 않으며 부동(不動)해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모든 세계, 모든 중생, 모든 모습의 법이, 각각 유상(有常)으로 또는 무상(無常)으로 설하는 것이니 이 법을 여실히 보고 들을 줄 알아서 귀가 없이 들어도 안 들리는 법이 없고 못 들음이 없어야 한다. 또 입을 벌리지 않고 말해도 상(相)에 취하지 않고 이 법을 설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을 아는 선남자 선여인의 연설은 상에 취하지 아니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한다 하심이다. 다시 입을 열고 상(相)에 취하였다 할지라도 그 이름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무상(無常)을 설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보고 듣는 일체 유상(有相)은 부동(不動)일지니, 그야말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이다. 그러니 이 법을 아는 자의 설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경의 뜻이요, 곧 금강반야바라밀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그러나 동시에 번뇌망상(煩惱妄想)이요, 분별제법(分別諸法)이니, 왜냐? 반야(般若)라 한들, 번뇌(煩惱)라 한들, 보리(菩提)라 한들, 분별(分別)이라 한들, 마음은 여여부동(如如不動)이므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따라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그대로 그러할 뿐이요, 이미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이 없기 때문이다.
불설시경이 장로수보리 급제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 일체세간 천인아수라(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 優婆塞優婆夷 一切世間 天人阿修羅)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모든 세간의 하늘, 사람, 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아들여 받들어 행하였다.
일체세간(世間)이라 함은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를 뜻한다. 아수라는 육도(六道)중생 가운데 삼선도(三善道)에 해당하는 중생세계의 이름이다. 이 경에 있어 하늘과 사람, 아수라만 언급하고 지옥(地獄)과 아귀(餓鬼), 축생(畜生)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삼악도(三惡道)의 중생은 죄업을 다 씻을 때까지 이 경을 들을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이 경에 대해 설법해 주실 것을 청하였던 수보리와 이때 같이 모인 비구, 비구니, 재가자인 우바새와 우바이의 남녀신도, 그리고 하늘, 사람, 아수라의 상근기(上根器) 중생들은, 이 경을 마치신 부처님께 환희심과 함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반야의 땅, 즉 반야지(般若地)에 도달하였으니 곧 피안(彼岸)의 저 언덕에 다다름이다.
이제는 더이상 놀랄 일도 없고 무서움도 없으며, 겁내는 마음도 모두 사라져서 모두들 크게 기뻐함이다. 지금부터는 이 경의 깊은 뜻을 믿고 받들어 신수봉행(信受奉行)하면서 이 신성한 경을 남을 위해 설하여 알려주는 일만 남았다. 이러한 연유로 영겁토록 이 법이 여실하게 행하여지고 필경에는 중생이 모두 없을 때까지 이 경의 깊은 뜻이 후세 중생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스스로 영원한 정토를 이룰 것이며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즉 이르는 곳마다 평안한 국토가 될 것이다. 또한 이 경의 뜻을 여실히 잘 알아 체득한다면 부처님의 지극한 자비(慈悲)를 몸소 깨달을 것이요, 부처님과 함께 스스로 소중한 은혜를 갚아 입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위대하고 심오한 ‘금강경’을 함부로 주제넘게 강술하면서 부처님의 큰 뜻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는 했으나, 한없이 서툴고 모자라다는 것을 제삼 절감하면서 심심한 참회를 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강술을 끝까지 들어 주신 독자 제위께 다시 한번 부끄러운 마음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57호 / 2024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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