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보물창고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으라.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 (自心是佛 此心卽佛)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저 혼자가 아니라, 대상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언제나 말을 내뱉기만 하면 이치로든 현상으로든 전혀 막힐 것이 없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세계가 드러났지만 색이 곧 공함을 알면 생겨난 것은 곧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면 때에 맞춰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성인이 될 소질을 키워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흘러가며 시간을 보낼 것이니,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어리석음에 대응하여 깨달음을 말하는 것일 뿐, 본래 어리석음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없다. 일체 중생은 본래부터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난 적이 없어 항상 법성삼매 속에서 옷 입고 밥 먹고 이런 저런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육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 그대로가 법성(法性이다.
모든 것이 전부 마음이다. 모든 이름이 전부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온갖 것이 전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 만물의 근본이다.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다.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임처개지/立處卽眞)요, 모든 것이 자신의 본바탕이다.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고(一切法皆是佛法), 모든 것이 전부 해탈(諸法即是解脫)이다. 해탈은 곧 진여이니, 모든 것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구름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물 위에 그림을 그리면 무늬가 나타나지만 곧장 무늬가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대적멸(大寂滅)이다.
대주혜해(大株慧海)가 처음 마조도일을 참례(參禮)할 때, 마조가 물었다.
“여기에는 무엇 하려고 왔느냐?”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놔두고, 자기 집을 버리고 이리저리 다녀서 무엇을 구하려느냐? 이곳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한다는 것이냐?”
대주가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자신의 보물창고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물창고다. 거기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전혀 부족함이 없어 자재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어찌 밖에서 구하고 찾는가?”
대매산(大梅山)의 법상(法常, 752~839) 선사가 처음 마조를 찾아와서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즉심시불/ 卽心是佛)”
그 자리에서 법상은 곧 크게 깨달았다.
분주무업(汾州無業, 760~821) 선사가 마조를 찾아왔을 때, 마조는 분주무업의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우렁찬 것을 보고 말했다.
“겉모습은 당당한 불당(佛堂)인데,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분주무업이 무릎 꿇어 절하고 물었다.
“삼승(三乘)의 학문이라면 대강 해 마쳤지만 선문에서 말하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곧 부처이다. 그것 외에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
분주무업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스럽게 전한 심인(心印)입니까?”
“쓸데없는 신경은 끄고, 우선은 돌아갔다가 다음에 다시 오시게”
무업이 나가는데, 마조가 무업을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시심마/是什麽)”
무업이 이 말에 문득 깨닫고는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런 둔한 사람 같으니. 절은 해서 뭐하나?”
✔ 부처는 멀리 있지 않으니, 자기 마음이 곧 부처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볼 때 무엇이 그 대상을 보는가? 대상을 보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언제 드러날까? 우리는 언제 드러나는 마음을 눈치 챌 수 있을까? 대상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드러난다. 눈으로 볼 때 보다가 깨닫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다가 깨닫는다. 보이는 대상, 들리는 대상, 바로 그 대상의 움직임 속에서 자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벌어지더라도 바로 그곳에서 드러나는 마음이 확인된다. 말을 내뱉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무엇이 말을 하는가? 목구멍이 말을 하는가? 혀가 말을 하는가? 목청이 말을 하는가? 아니다. 이 몸은 말을 할 줄 모른다. 소리를 낼 줄도 모른다. 죽은 시체는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을 누가 내뱉는가? 마음이, 부처가, 본래면목이 말을 한다. 말을 하자마다 자성이 확인된다.
현상세계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인 줄을 안다면, 생겨난 모든 것이 생겨난 바가 없다. 생하되 생한 바가 없음을 안다면,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모두 자성을 벗어나지 않음을 안다면, 인연 따라 마음껏 살아도 전혀 걸릴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자성이니 어디에 막히겠는가?
때에 맞춰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흘러가며 시간을 보내기만 하더라도, 저절로 성인될 소질이 저절로 성장한다. 그 모든 것이 마음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다 마음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이 불법의 일, 이 하나의 진실의 일 말고 다시 다른 일은 없다.
일체법이 자성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법성삼매(法性三昧)라고 한다. 일체법이 늘 법성, 자성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삼매 속에서 옷 입고, 밥 먹고, 눈귀코혀몸뜻을 가지고 마음껏 삶을 살아가지만 그 모든 행위가 그대로 법성이다.
이처럼 삼라만상 일체법이 전부 다 마음이다. 모든 것들, 모든 대상, 모든 이름이 전부 마음이며, 법성이다. 마음이 곧 만물의 근본이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애를 쓰더라도 이 마음을, 이 진리를 , 이 법성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어디에 서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지라도,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이 참된 진실의 자리다. 있는 그 자리가 입처개진(入處皆眞), 입처즉진(入處卽眞)이다.
일체법이 그대로 불법이다. 모든 것이 전부 해탈이다.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구름의 흔적이 없듯이, 물 위에 그림을 그리면 잠시 인연 따라 무늬가 나타나지만 곧장 사라지듯이,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생겨나도 생겨난 것이 아니며, 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이처럼 공하여 텅 비었다. 이것이 바로 대적멸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대적멸이다. 모든 것이 일어난 그대로 대적멸이다. 행복한 삶, 불행한 삶 모든 삶이 대적멸이다. 내 안에서 행복하다거니, 불행하다거니 하며 분별하고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어디에 있든 대적멸을 벗어날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세상 모든 존재가 그대로 대적멸이요, 부처이니, 다른 곳에 가서 불법을 구할 것이 없다. 자기 안에 보물창고가 있다. 선지식의 손안에는 한 물건도 없다
‘무엇이 보물창고인가?’ 하고 묻는 그것이 보물창고다. 그 마음의 보물창고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이 자재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다.
법상스님이 마조스님을 찾아가서 ‘무엇이 부처인가’ 하고 물었다. 마조는 ‘즉심시불,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답했고, 법상스님은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준비가 된 자는 말 한 마디 끝에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는 부처님께서 눈앞에 오셔서 법문을 설해 주시더라도 여전히 어두운 밤 속이다.
여기 또 다른 준비된 자가 있다. 분주무업에게 마조는 ‘몸은 풍채가 좋아 당당한 불당이라 할 만한데, 어찌 그 속에 부처가 없는가?’ 하고 묻는다. 무업은 마음이 부처임을 도저히 알 수 없노라고 진실하게 고백한다. 마조가 알지 못하는 줄 아는 바로 그것이 마음이라고 설해 줘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무업의 질문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조가 그 입을 닫게 하고는 돌아갔다가 다음에 오라고 한다.
무업이 하는 수 없이 나가는데, 마조가 불러 말했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마자, 무업은 문득 깨닫고는 절을 올린다.
이렇게 준비된 자는 몇 마디 말을 듣고는 곧장 깨닫는다. 혹 여전히 몇 마디 말을 듣고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거의 준비가 된 제자에게 대선지식은 그의 근기를 직감하고는 그에게 걸맞은 자유자재한 방편을 구사한다.
바로 그 순간, 스승과 제자는 줄탁동시(啐啄同時)로 확 통해 하나가 된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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