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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지음과 동시에 보를 받는다

장백산-1 2025. 2. 17. 16:16

업을 지음과 동시에 보를 받는다

 

업을 짓게 되면 업에 따르는 보를 언젠가는 받는다. 본질적인 경우에는 업을 내보냄과 동시에 보를 받는다. 업을 지음과 동시에 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결국 우리가 만든 허망한 생각일 뿐이다. 시간이라는 허상을 초월하면 업과 보의 동시성을 이해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수행력이 깊은 수행자는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 현실이 되곤 한다. 이 순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당장에 과보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우주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람일수록, 집착과 번뇌와 욕망과 아상이 적은 사람이기에 베풂과 동시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마음을 냄과 동시에 현실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스스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뭔가 마음을 내고 나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판단이, 시간이라는 허망한 관념에 묶여 있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얘기한다. 시간은 없다. 원인, 즉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진리의 차원에서는 원인 속에 결과가 오롯이 담겨 있다. 법계와 일치를 이루는 상황에서는 씨앗을 심음과 동시에 열매가 맺힌다. 이것이 곧 불교의 불이법(不二法)이며, 비인비과(非因非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법계의 진리와 하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의 관념 속에 묶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가 내가 믿는 대로 보내주는 것이다. 시간이 걸린다고 믿으니까 시간이 걸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주의 원칙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보내는 것이 곧바로 들어오는 것이다. 시간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일수록, 즉 깨달음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보냄과 동시에 받는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이냐, 얼마만큼 부자가 될 것이냐,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냐, 얼마만큼 행복해질 것이냐에 관심 갖지 말자. 그런 것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을 끌어당길 것이냐가 아니다. 이 세상에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얼마만큼 밝히고 떠날 수 있는가, 내가 내보내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얼마만큼 밝아졌는가, 내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내보냄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내 스스로가 만족스럽고, 풍요롭고, 충분하며,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완전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 충만함으로 존재할 때는 저절로 충만함이 새어 나온다. 풍요로움이 퍼져 나간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저절로 풍요, 만족, 감사, 사랑, 행복, 지혜를 내보내는 공덕신(功德身)으로 변한다.

 

어두운 파장을 내보내면, 그 사람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를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너와 나라는 경계가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다.

A라는 사람이 나한테 도움도 안 될 것 같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 같아 무시하고 욕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우주법계를 무시하고 법계를 욕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욕하는 것이다. 결국 고스란히 돌아온다. 우주법계에서는 내보내는 것이 들어올 뿐이지, 높다 낮다는 차별이 없다. 다만 내보내는 것이 바로 들어올 뿐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