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출범 뒤 3월부터 시작된 공기업 수장들의 물갈이 과정은 몰아내기 방법의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공개적으로 이름을 거명하며 ‘나가지 않으면 다친다’는 엄포를 놓는가 하면, ‘장막’ 뒤의 조종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처 국장이 윗사람에게 ‘사표 내시라’고 읍소하기도 한다. 심지어 감사원과 검찰이 동원되고 있다는 의심을 살 만한 일도 벌어진다.
임기를 한참 남겨둔 터에 난데없는 사퇴 압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추한 꼴 당하기 싫다’며 스스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저항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갈이 신호탄은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정권 실세의 공개적인 발언이었다. 이에 여론이 ‘해도 너무한다’며 싸늘해지자, 압박의 손길은 장막 뒤로 옮겨 갔다. 부처 간부들이 산하 공기업 수장을 직접 설득하는 방식으로 옮겨 갔다.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이상호 이사장은 “행정안전부 쪽에서 후배가 찾아와 사표 제출를 권했다”며 “임기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 고위 간부들은 김영식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을 직접 만나 사표를 종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처 후배들을 통한 설득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엔 감사를 통한 노골적인 압력이 동원됐다.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이형규 이사장은 행정안전부한테서 전화로 사표 제출을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행정안전부가 갑가지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더한 경우엔 감사원과 검찰도 동원됐다. 감사원은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3월10일 31개 공공기관 경영실태에 대한 예비감사에 전격 착수했다. 시작 때부터 ‘물갈이’ 목적이라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은 코스콤(옛 증권전산)에 감사를 나가려다 피감기관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감사원은 감사 착수 20여일 만인 3월31일 예비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기업의 경영비리를 공개했다. 본감사를 마치지 않은 채 예비감사 결과를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때 지적받은 공기업의 기관장은 재신임 과정에서 대부분 탈락했다.
검찰은 한국석유공사 등 20여 곳의 공기업에 대해 ‘기획 수사’를 갑자기 시작했다. 시기도 시기려니와, 지난달 12일 내사를 벌이고 있는 사실을 자청해서 공개하고 나섰다.
정부는 공기업 수장들에 일괄사표를 내도록 종용한 것을 두고, ‘일을 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금융위원회 고위관계자는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보다 일을 잘할 수 있어 재신임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돼 있더라도, 또 다소간 업무 공백이 있더라도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정부의 그런 명분은 얼마나 충족됐을까?
일괄 사표를 받거나 갖가지 압박을 통해 밀려난 공기업 수장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아직까지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에너지관리공단, 한국지역난방공사, 대한석탄공사, 대한광업진흥공사, 전기안전공사, 광해방지사업단 등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 6곳은 지난달 30일부터 기관장 공모 신청을 받고 있지만 4일 현재까지 거의 신청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모 신청을 해봤자 어차피 청와대에서 낙점한 인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한전 관계자는 “13일이 마감인데 몇몇 후보군에 올랐던 사람들이 ‘들러리 서기 싫다’며 대부분 신청을 포기해버렸다”며 자칫 공모절차 자체가 무색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께 금융감독원에선 김대평 당시 은행담당 부원장의 이임식이 열렸다.
1969년 한국은행에 들어간 뒤 40년 동안 걸어온 ‘공직’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그는 임기를 2년 이상 남겨두고 있어 유임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고, 이날 아침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 업무를 봤다. 같은 시각 김종창 금감원장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온 직후 ‘통보’가 이뤄졌다.
금감원의 한 팀장은 “이건 예의가 아니다”며 말끝을 흐렸다. 현 정권과 가깝다는 이우철 부원장은 임기 만료를 6개월 남겨두고도 유임됐다. 김 부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부상상고 출신이다.
안창현 김규원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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