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6.25극북을 위한 우리의 자세???

장백산-1 2008. 10. 30. 13:56
  • 6.25 극복을 위한 우리의 자세
  •  
  • 비공개
  • 조회 372  답변 1  2008-05-11 21:48
  •  

신고

6.25 극복을 위한 우리의 자세

 

이거 웅변을 해야되는데

 

제생각을 쓰는것까진 알겠는데

 

그담부턴 모르겟어요

 

 이것좀 해주세요ㅠㅠㅠ

 

 

 

내공 50걸어요ㅠㅠ

오늘12시 안으로 해주셔야해요ㅠㅠ

참고하고 쓸수있도록 도와주세요ㅠ

0

이 질문에 답변하시면 지식머니5를 드립니다.
회원님이 작성하신 답변이 채택되면, 질문자가 건 지식머니 50과 평점별 추가지식머니를 드립니다.
답변하기



  • Re: 6.25 극복을 위한 우리의 자세
  •  
  • 최대진(dj**)  1:1질문하기
  • 2008-05-26 13:07
  •  

질문자평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6.25가 아닌 7.27을 기념하자


이제 곧 한국전쟁 50주년을 맞는다. 박사님은 6.25를 기념하는 한국사회의 풍토를 비판한 경험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우리가 특정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몇 가지의 중첩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과거의 특정사건을 기념하여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일반 국민과 시민에 대한 역사교육의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현실적 관점에서 그 사건이 제공한 바람직한 교훈의 추출과 실천적 대안의 모색을 위해서이다. 6월 25일은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세 수준 어디에 비추어 보아도 이 날을 기념할 역사적 의미는 추출되지 않는다.


6.25를 기념하는 것의 문제점은?

전쟁발발일을 기념하는 것은 전쟁의 시작을 기억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6·25행위를 기억하여 전쟁을 시작한 북한을 비판하고 증오하는 동안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강조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나라는 없다. 더욱이 세계는 냉전이 해체되었고, 우리는 지금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향한 큰 변화의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6·25를 기념하는 논리는 냉전, 증오, 분단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6·25를 포함한 한국전쟁 전체의 진실을 최대한 규명하려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그 진실규명의 노력은 현재적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 대한 이해의 노력이 현재의 갈등과 증오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태도는?

우리는 이제 6·25를 기념하는 논리에서 벗어나 이 사건을 현재의 민족사적 과제를 위한 논의구조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6·25전쟁시작이 아니라 7·27전쟁종식을 기념하는 것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7·27은 6·25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오히려 현재적 관점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종전이라는 평화의 담론, 그리고 전쟁이 남긴 분단구조의 극복의 필요성, 종전 시점의 한미관계의 특수성 등으로부터 연유하는 평등한 관계의 모색 등 현재적 과제를 위한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7·27을 기념하는 것은 종전, 평화, 화해, 통일의 담론으로의 실천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과제추출노력을 함께 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지향할 수는 있어도 전쟁을 기념할 수는 없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현재적 과제에 대한 해답의 모색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참상, 민족상잔의 비극을 화려한 영상으로 재현해낸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볼거리만으로도 돈이 절대 아깝지않은 영화입니다. 전에 '실미도'가 한국블럭버스터가 어쩌고했는데 실로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대단한 영상미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영상이라함은 놀랍기만한 영상물이 아닌,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조명이란 사실을 기억해야하구요.
...............


1.6.25 발밭원인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은 미국 내의 대한 정책의 변화, 남한의 이승만 체제 강화, 북한의 통일 정책 등과 관계가 깊다. 먼저, 제 2 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대소 관계에서 전쟁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고 독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4대강국 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란과 터키에 대한 소련의 압력이 가중되자,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소련에 대한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2. 6.25가 발생한때(남한과 북한의 차이)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3. 6.25때 유명한 전투,장군,군인


유명한 전투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국제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유명한 장군-맥아더

4. 6,25때 남한의 피해 사항

6 ·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하여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측의 북한 ·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과 유엔군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유엔군은 이러한 목포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으며, 회담은 같은 해 6월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6.25때 유엔 참전군(16국)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캐나다, 터키, 태국, 필리핀, 뉴질랜드, 남아공,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그리스

6. 맥아더 장군

요약

미국의 군인.

국적 : 미국
활동분야 : 군사



--------------------------------------------------------------------------------

본문


D.맥아더의 아버지이다. 남북전쟁 때 지원병으로 출전하였고, 혁혁한 전공(戰功)으로 20세에 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863년 미쇼너리리지의 싸움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다.남북전쟁 후 인디언과의 전투에 종군하였고,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이 일어나자 준장에 임명되어 필리핀 사령부에 소속되었다.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00년에는필리핀 제8군 사령관 및 군정장관(軍政長官)에 임명되었다. 재임(在任) 중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원조하였고, 스페인법의 개정을 위해 힘썼다. 1906년 육군 중장이 되었으며, 1909년 퇴역하였다.


7. 6.25 교훈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격언이 있다면 전쟁사를 연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이의 교훈을얻어 실천하므로서 이땅에서 전쟁을 예방하고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은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아왔지만 그때마다 정부주도의 강군육성을 통한 위기 극복이라기 보다는 애국애족의 기치아재 뭉쳐진 민중의 힘, 즉, 의 병의 활약에의하여 극복되었던사례가 더많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이 종료된후에도 정신을 차치지 못하고 있다가 정유재란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한반도를 피로물들이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 이에 본인은 이글을 통하여 한국전쟁이 주는 교훈을 온국민이 가슴속깊이 새겨두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므로서 이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과거역사속에서 이율곡 선생의 10만양병론을 거부하고 당쟁만 일삼던 선조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주로 피난길을 떠나면서 임진나루에서 불타는 화석정을 보면서 그 불로 강을 밝혀 임진강을 건너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무능한 왕과 그와중에서도 당쟁만을 일삼는 장면을 허준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보아 잘알고 있으리라.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고사를 결코 잊어선않되며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전쟁의 진정한 승리란 없다

.
●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하여도 전쟁의 무제한적 파괴성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승리란 없다.
즉 어떻한 경우이든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입게되며 특히 여성과 어린이등 노약자에게 강제되는 정신적피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정도로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다. 따라서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게되므로 싸워서 이기기 보다는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 동양의 대표적인 병서손자병법과 서양의 대표적인 병서인 전쟁론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임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평화시에도 전쟁에 대비 하는 것이라는것을 명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을 당쟁으로 수용하지 못하므로서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임진왜란을 겪고도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여 다시금 정유재란을 겪는 우를 범하고 급기야는 세계적인 제국주의 창궐에 때를 같이 하여 왜국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던것이다.


● 전쟁의 진정한승리는 유비무환을 통하여 전쟁을 막는 것이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동물적 논리가 적용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평화시에 전쟁에 대비하는 국민적 합의와 이의 실천만이 평화를 보장하고 진정한 승리를 얻게 할것이다

8. JSA이란?

Joint Security Area (판문점의) 공동 경비 구역


9. 휴전 협정
유엔군의 북진에 맞서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유엔 총회는전투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12월 14일 ‘정전 3인단(Three-man Group on Cease-Fire)’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캐나다의 L.페르슨, 이란의 N.엔테잠, 인도의 B.라우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3인단의 임무는 한국에서 만족할 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 3인단은 중공대표와의 회담 ·교섭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어 1951년 1월 1일에 중공과 북한은 대규모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총회의 정전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중공의 의사가 명백해졌다.

이에, 1951년 2월 1일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의거 중공은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Collective Measures Committee)’의 보고에 따라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가맹국에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특히 6월 23일의 유엔 주재 소련대표 Y.A.말리크의 성명을 통하여 침략군이 전투행위를 중지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공산군사령부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고, 7월 초에 휴전회담 개시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 병원선에서의 회담을 제안하였다. 중공군도 1 ·2차 춘계공세를 통하여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유엔군을 격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회담개최 의사를 밝혔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개최되어 쌍방의 정부대표 명단이 교환되고, 본회담 개최 장소를 개성으로 결정하였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하였고,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다. 회담은 장기화하였고 파란곡절을 겪었다. 여러 문제에 있어, 특히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에 대하여 성실하게 교섭하지 않으려는 공산측의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는 2회에 걸쳐 총 9개월간이나 회담을 중지하였다.

1952년 10월의 휴전회담 중지에 이어서 유엔 총회는 1952년 12월 3일의 결의로써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재확인하고 전쟁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총괄적 계획을 제안하였으나 공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공산측이 광범위한 지연책을 쓰고 나서 1953년 7월 13일과 14일에 전란 중 최대의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휴전협정은 정전, 쌍방간의 비무장지대, 38선의 약간 이북을 대부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및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대와 장비의 한국도입금지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휴전협정 이행을 감시하고 지적된 위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유엔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설치되고 동 본부를 판문점에 두었다. 동 협정은 또한 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로 구성되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설치를 규정하였다. 동 중립국감시위원단은 한국에 병력 및 장비를 증강하는 데 관련된 휴전협정 조항의 준수 ·관찰 ·감시 ·조사를 할 수 있다. 휴전협정에는 정치문제 해결에 관한 조항이 없으나, 제60항은 휴전협정 조인 및 효력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한국으로부터의 전외국군 철수문제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교섭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양측의 관계정부가 각각 임명하는 고위층 대표간의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을 양측의 우방관계국 정부에게 권고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