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포괄적 환자'입니다
(서프라이즈 / 내과의사 / 2008-12-04)
간혹 어지러우신가요?
- 당신은 빈혈입니다.
요즘 들어 식욕이 부쩍 늘었다고요?
- 당신은 당뇨병입니다.
왼쪽 가슴이 뻐근합니까?
- 당신은 협심증입니다.
머리가 아프신가요?
- 당신은 뇌종양이나 뇌졸중 초기입니다.
밥만 먹으면 명치가 아픈가요?
- 당신은 위암입니다.
얼굴이 부으셨군요.
- 당신은 만성 신부전입니다.
걷기만 하면 숨이 차다고요?
- 당신은 폐기종입니다.
요즘 들어 더위를 많이 타신다고요?
- 당신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입니다.
…………
어떤 의사가 진료기록에 이렇게 달랑 적어 놓고 다짜고짜 환자를 붙잡고 온갖 검사와 시술을 다 시행했다면?
바로 과잉진료의 표본으로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까…? 아니다. '포괄적 공범'이라는 신조어를 창조한 노건평 씨에 대한 검찰의 사법적 판단이 보편적 잣대라고 인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어떤 의사도 과잉진료와 시술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노건평 씨가 포괄적 공범이라면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당신도 '포괄적 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의 '조기진단'이 임상적 의미를 갖는 것은 빨리 발견하여 치료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서 완치율과 생존율이 월등하게 높을 때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폐암은 현재까지 효과적인 조기진단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엑스레이나 CT로 폐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암에서 인정되는 유일한 조기발견은 예방이며, 그 예방의 실현 가능한 실천방안은 금연뿐이다.
검찰의 '포괄적 공범'이라는 기묘한 사법적 표현을 폐암과 흡연의 관계에 적용시켜 보자면 결국 모든 흡연자는 '포괄적 폐암 환자'로 다루어야 한다는 논리적 확대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흡연자에게서 현재 폐암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이들은 포괄적 폐암 환자이므로 폐암세포가 발견될 때까지 날이며 달마다 병원에 불러다가 CT 찍고, 기관지 내시경 검사와 객담 세포진 검사를 반복해야 한다. 이건 절대로 돌팔이 의사의 과잉진료가 아니다. 명의의 엄연한 진료행위이다. 검찰이 진행하는 노건평 씨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된 공권력 집행이라면 말이다.
이건 비단 우리 업계에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예컨대 당신이 만약 카센터 주인이라면 엔진 소리가 '아무 이유 없이' 맘에 안 드는 차가 있다면 그 차량은 '포괄적 불량차'이므로 이상이 발견될 때까지 차를 완전 분해 조립해도 그만이다. 만약 분해 조립의 결과 이상이 없더라도 엔진 소리가 이상한 포괄적 불량 차량은 언젠가 고장이 나게 되어 있다고 우기면 된다. 따라서 분해 조립에 드는 모든 비용을 차 주인에게 청구해서 받아낼 권리가 카센터 주인인 당신에게 있다.
검찰이 선도적으로 주창한 '포괄적'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경제 위기에 봉착한 우리 모두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좌우명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건설 경기 활성화 문제도 쓸데없이 국민 모두가 혐오하는 대운하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다.
지은 지 5년이 넘은 모든 건축물은 안전 검사상 현재 위험징후가 없더라도 5년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포괄적 붕괴 위험 건물'이므로 의무적으로 재건축하자는 법안만 통과시키면 만사 오케이다. 그렇다. '포괄적'이라는 개념은 폭발적 내수진작을 가능하게 하는 파괴력을 가진 단어이다. 바야흐로 포괄적으로 행복한 시절이 왔다.
당신은 포괄적 환자이며, 포괄적 고장차량과 붕괴건물에 무방비로 노출된 포괄적 피해자이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라는 재앙을 막지 못했던 나는, 우리 모두는
오늘 비로소 포괄적 범죄자가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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