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국가 혹은 공동체는 대체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토대로 건설됩니다. 봉건시대를 살았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계몽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국가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유럽의 봉건제 하에서 억압받던 일부의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따로 정리하겠습니다만, 일단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10월11일부터 10월16일까지 5회에 걸쳐 민주주의2.0 연구마당에 연재했던 글을 조금 손질을 하여 하나의 글로 묶어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 500년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간략하나마 정리해보았습니다.
참고로 제가 참고한 서적은 '백산서당'에서 출판하고,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42명의 교수들이 함께 엮은 '단군에서 해방까지 한국정치사상사'라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단군에서 해방에 이르는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그럼 조선시대에만 국한해서 제가 읽은 것을 토대로 평소 갖고 있었던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조선후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접어들면서는 조선선비들의 사상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외세의존적인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교조주의로 흐르면서 수구지배세력의 기득권 옹호논리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지점은, 고려말 정몽주와 이색에서 조선초기 정도전, 그리고 조선중기의 조광조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에 이르기까지, 조선성리학의 형성과 완성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고 봅니다.
고려 말 성리학의 태동과 신진세력의 탄생
고려말에는 오랜 무신정권(군사독재정권)의 지배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성리학자들입니다. 한국 유교를 오랫동안 연구한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런던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국에 성리학이 도래함에 따라 포괄적이고 열성적으로 사회문제에 대답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념이 부상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유례없는 정치적 논쟁을 자극했다. 성리학은 사회정치적 변혁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고대 중국 성왕들의 사례로부터 찾았다. 더구나 성리학의 변혁욕구는 그 실천자들을 행동으로 이끌었으며, 사회적 변혁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요구했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사회를 유학화하기 위한 변혁프로그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한국정치사상사 200p)
여말선초의 초기 성리학자들은 대단한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대충 권력이나 잡자는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개조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을 세우고, 현실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현실권력 및 기득권세력과 끊임없이 투쟁했던 ‘실천가’들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오랫동안 불교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시대의 사회변혁에 어떤 비전도 제시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회모순을 도피시키는 역할에 그쳤을 뿐입니다. ‘사상’이라고 이름붙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려초기에 이미 중국의 유학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상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안향(1243~1306)입니다. 안향이 국자감 학생들에게 제시한 국학의 기본정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인의 도는 일용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이 되어 효도해야 하고, 신하가 되어 충성해야 한다. 예로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귄다. 자기를 닦는 데 경(敬)으로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 성(誠)으로 할 뿐이다. 저 불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해 윤리를 어그러트리니 곧 이적의 무리이다. (출처-한국정치사상사 200p)
이 내용에서는 '개인의 품성' 혹은 ‘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한 사람이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흐름을 거역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묻어 있습니다.
이는 오랜 무신정권의 집권과 전쟁,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그리고 세속에서의 고통을 불교를 통해 탈출했던 시대의 산물일 것입니다. 그 시대의 현실을 통해 들여다보면 대단한 '각성'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안향의 철학은 이제현으로 이어지고, 다시 정몽주와 이색, 정도전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더 체계적으로 사상이 정리되어 갑니다.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각성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의 세력이 됩니다.
이 당시 새로운 사회건설의 희망에 부풀었던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는 권근과 이웃으로 살았던 정도전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벗이 이웃에 함께 살아서 골목이 서로 연접했다오 찬이슬에 젖으면서 등불 밝혀 밤에 모이네. 마주 앉아 기문(奇文)을 감상하다가 이치의 극을 보면 말을 잊는다. 날로 달로 언제나 이와 같으리 이 즐거움을 잊지 말자 맹세를 했네. (출처 : 三峰集)
고려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그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같은 꿈을 꾸는 동지들,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저 역시 삼봉 정도전이 느꼈을 그 부푼 희망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노장사상과 불교의 ‘탈세속’과는 정반대로 ‘현세’에서 인격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으며, 동질성을 가진 그 인격체들이 모인 세력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 시대에 비추어보면 대단히 혁명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들이 중국 남송의 주자의 철학을 계승했다는 근본적인 한계,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전제로 했다는 한계 등이 있지만, 이는 오늘날의 잣대로 본 것에 불과하며 그 당시 시대상황에서 구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려의 부흥’이냐,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냐를 놓고 방법론에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목표는 동일했지만 그 방법이 달랐고, 결국 혁명파가 승리하게 됩니다.
선비들, 새로운 세상을 열다
사실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시민사회, 그리고 그 시민사회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식계, 즉 '노무현 세력'이 고려말의 신진사대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기득권 세력의 반칙과 특권을 배제하고,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제왕적 총재가 군림하는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혁파, 본질적으로는 시민들이 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문화형성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떻든 고려말의 성리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은 새로운 세상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꿈꾸었지만 그 방법론에서 노선이 갈리게 됩니다. '고려부흥'과 '혁명'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정몽주와 이색 등이 고려부흥을, 정도전과 조준 등이 혁명노선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 뿌리는 동일하다는 것이죠. 정도전은 정몽주와 함께 이색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초기와 중기로 넘어가면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공통적으로 사림파(士林派)의 원류가 됩니다.
여기서는 두 노선 간의 투쟁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조선의 개국이었지만, 정도전이 목표로 한 것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상'이었고, 그 '새로운 세상'이라는 목표는 정몽주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개국 과정에서 고려부흥을 내세운 정몽주와 이색은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 역시 개국 초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패배자가 됩니다. ‘현실 권력에서의 패배’입니다. 정도전의 패배가 말해주는 것은 곧 신진사대부의 이상이 현실에서 좌절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자 그렇다면 정몽주와 이색 등 고려부흥파를 제압하고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은 왜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요? 여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좌절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이 즉위교서는 다름 아닌 정도전이 작성했습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은 많은 백성을 낳고 이들의 군장(君長)을 세워, 그로 하여금 이들을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들을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에는 득실이 있게 되고 인심에는 복종과 배반이 있게 된다. 천명(天命)이 떠나가고 머무름은 이에 달려있다. 이것이 바로 이지상(理之常 : 변함없는 이법)이다.(출처 : 한국정치사상사 222p, 원전 : 태조실록)
이 문장은 주자가 <맹자집주>에서 사용하여 ‘혁명’을 인정한 문장과 거의 동일하다고 합니다.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천명한 것이죠. 그런데 '하늘은 백성을 낳고 이들의 군장을 세워'에서 알 수 있듯이 정도전은 삼봉집 곳곳에서 "백성은 군주의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민본주의’의 주창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제도로 '총재정치'를 구상합니다.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는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자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이는 군주의 한계를 바탕에 깔고 있는 발상입니다.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유럽의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1년 루이16세를 국왕으로 하되 입법의회가 권력을 가졌던 ‘입헌군주제’와 비슷하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정도전의 ‘총재정치’라는 것은 ‘왕과 신하가 권력을 나누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놓고 본다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다가 정도전은 군주권 세습문제에 있어서 장자계승이 아니라 왕위 계승 대상자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를 선택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후일 왕세자 책봉을 놓고 태조의 둘째부인 소생인 방석을 왕세자로 지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방원과 충돌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태종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초기 통치구조에 대해 공부한 바 있듯이 원래 태조는 의정부(議政府)에 많은 권한을 주었습니다. 조선 건국의 주축세력이자 지지기반이 신진사대부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력의 많은 부분을 위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은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후 ‘육조직계체제’를 구축합니다. 의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국정의 모든 것을 왕이 직접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권력이 왕권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의미하며 정도전과 그 세력들이 구상했던 새로운 세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세종이 육조직계체제를 다시 의정부중심 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 당시 영의정 황희는 실질적인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역할을 했음은 다 아실 것입니다.)
결국 정몽주와 이색, 정도전 등 고려말의 신진사대부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은 왕이나 귀족들이 권력을 전횡하는 것이 아닌, 이론을 바탕으로 한 선비들이 국정의 중심에 서서 민본주의를 실천하여 국가를 전면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성리학을 세워 불교와 사상투쟁을 하고, 개인의 인격을 함양하기 위한 충효의 규범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훈구세력(개국공신세력)과 이들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던 군주에 의해 결국 좌절됩니다.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그 세력이 열린우리당이라는 새로운 정치결사체를 만들면서 꿈꾸었던, 그리고 이상을 향해 내딛은 발걸음들이, 결국 현실정치에서 권력을 탐하는 세력들에 의해 꿈을 잠시 접어야 하는 오늘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진사대부의 다수는 이미 손에 쥔 현실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세력으로 변질하였고, 이상을 꿈꾸던 세력들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숨어들었던 과거의 역사는 지금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세종, 선비들을 국정의 동반자로 삼다
어찌되었든 이색과 정몽주, 정도전 등이 꿈꾸었던 그런 정치는, 현실정치에서 명맥을 이어가 살아남은 일부의 이상주의자들과 이들을 뒷받침하며 전면적인 국가개조에 발을 내딛는 세종에 의해 잠시 살아납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왕권과 신권의 권력분점과 권력균형’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정치시스템이 유일하게 작동했던 유일한 시기가 바로 세종시대였습니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그 꿈을 접어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이 꿈꾸었던 정치는 태종이 닦아놓은 반석 위에서 세종대왕에 의해 활짝 꽃피게 됩니다.
세종의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집현전을 통한 학문연구 장려 및 공론정치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활발한 토론을 반드시 거쳤다는 사실입니다. 정도전이 펼쳐보고 싶었던 정치가 세종에 의해 꽃핀 것입니다. (얼마전에 방송이 끝난 KBS2 TV의 세종대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종시대의 정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공론정치(公論政治)'입니다. 이 공론정치야말로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모든 정책결정과정에서 공론을 거치게 됩니다.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같은 공론정치는 후일 각종 사화와 정변에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상호견제적이었던 붕당정치가 끝내는 죽고 죽이는 권력투쟁으로 변질했을 때에도 '공론'은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정적을 그냥 칼을 앞세워 죽이는 게 아니라, 죽이더라도 공론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 연후에 죽였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세종대의 공론정치에 관한 설명을 인용합니다.
첫째, 세종은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재상 중심의 정치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재위 18년에 육조직계체제를 태조시대의 예에 따라서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한 조치이다.
둘째, 간관제도의 중시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공론정치의 핵심적 기관은 사간원과 사헌부, 즉 대간(臺諫)이었다. 대간은 백관의 인사권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署經)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상과 함께 천하의 일을 엮고, 천하의 일을 맡은" 기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세종은 공론정치를 보다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집현전을 확장했다....(중략)..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점차 정책토론을 주도하고 백관을 논핵하는 등 언론의 중심기관으로까지 성장했다.
(출처 : 한국정치사상사 246~248p)
아시다시피 세종시대의 영의정 황희는 80세가 넘어서까지 국정을 보좌했습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실질적으로 권한을 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과 치열한 토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쉽과 거의 동일합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세종의 리더쉽, 노무현의 리더쉽'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싶은 욕심이 굴뚝이지만 지금 다른 제목의 책을 집필중인데 이 마저도 생업과 병행하느라 진도를 제대로 못나가고 있어서 엄두가 안나는 실정입니다. 빨리 돈 벌어서 책 속에 파묻혀 글만 쓰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어쨌든 세종시대의 선비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종대왕의 꿈과 이상이 선비들의 그것과 서로 교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공론의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고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자면, 세제개혁을 단행하면서 무려 17년간 4단계의 공론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그 결과 반대자들까지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행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세제도는 중앙에서 파견한 조사관이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알아서 판단하여 세액을 매기는 '손실답험법(損實踏驗法)'이었는데, 관리의 자의가 개입될 여지가 많아서 이를 고치게 되었는데,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일기에 따라 적정한 세액을 매겨서 국가에 내도록 하는 '공법(貢法)'으로 바꾼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1430년에 고위관료에서부터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총 17만여 명을 대상으로 찬반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문서로 정리하여 보고를 받은 후, 어전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후유증을 검토하여 보완책을 마련하여, 이를 일부 지역에서 시범실시를 한 뒤에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그나마 세종은 조선시대의 임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문화와 시민의식 속에서는 세종의 리더쉽은 아마 탄핵을 받아도 몇 번은 받았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세종의 리더쉽과 신진사대부들의 이상은 문종이 일찍 죽으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의 공론정치는 세종대의 공론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단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왕권과 신권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토론이 가능한 조선초기의 정치는, 세조 이후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거나, 그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의 균형이 무너진 형식적 공론정치로 변질되고, 중종대에 이르러 조광조의 개혁정치로 파란이 일게 됩니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로 상징되는 이 세력은 세종과 문종이 서거한 이후 현실정치에서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중종대에 이르러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파가 등장하여 잠깐의 개혁시도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기득권 유지를 목적으로 한 훈구파들이 모든 권력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세종시대 이후 왕권(王權)은 단 한번도 신권(臣權)을 극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권력분점’을 요구했던 정도전이나 집현전의 새로운 세력을 내친 결과,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도 유의미하다고 보입니다. 세종시대 이후 훈구파는 끊임없이 사화를 일으키고 정변을 일으키는 주체가 됩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의 권위를 이용하였을 뿐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정치는 신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정치에서는 패배했지만 수많은 제도와 문물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유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규정하는 정체성으로 작용했습니다. 정도전이 시작한 조선경국전은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으로 완성되고, 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으로 작용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관습헌법으로 되살아나 행정수도이전의 반대논리로까지 작용했습니다)
조광조의 반격, 그리고 좌절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지만 단명하고 맙니다. 문종은 정말 '잘 준비된 왕세자'였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에도 문종을 직접 참여시켰고, 건강문제가 생기면서 국정운영을 문종에게 위임을 하면서 후견자 역할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종과 선비들 관계 역시 세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과 신권 사이에 다툼이 생깁니다.
그 결과의 부산물이 세조의 등극입니다.
세조 이후 왕권과 신권 사이의 균형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한동안 왕권이 강화되죠.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훈구세력의 힘을 빌리게 됩니다.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이구요. 어쨌든 훈구세력은 왕권을 등에 업고 기득권 유지에 성공합니다.
여기에 강력하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道의 정치'를 내세우며 등장한 신진세력이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士林派)'입니다. 사림파의 전통은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이색,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고려말 성리학자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일단 앞 단락에서 '공론정치'는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인격의 완성'입니다. 개개인의 인격이 완성되었을 때 그 사회가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문명이 만들어지고 문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림파의 이념적 기반은 무엇인가? 서두에서 소개한 책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도학 전통을 관통하는 공통의 이념적 기반은 '소학(小學)' 정신이었다. 물론 '소학'은 기본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성리학 입문서로 편집된 것이다. 그러나 주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소학'을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양성하는 출발점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조선 전기의 사림들이 '소학'에 주목했던 것은 바로 '소학'이 갖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 기능 때문이었다. (출처 : 한국정치사상사 282p)
인용한 부분은 아주 중요합니다. 후일 퇴계와 율곡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이것이야말로 선비들이 조선을 지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학'은 인격을 함양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린이들입니다. 조광조는 소학공부의 대상을 어린이에 한정하지 않고 군주에게까지 확장합니다. 임금을 앉혀놓고 공부하는 경연에서 소학을 강의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가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기묘사화는 아시다시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화입니다. 어쨌든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 속에서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도덕'을 강조합니다.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납니다.
조광조가 중종에게 요구한 것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었다. 정자(程子)의 해설에 따르면,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여 마침내 남을 완성시키는 데 이르는 것이고, 위인지학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하여 끝내는 자신을 상실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중략)....조광조는 학자들이 위인지학을 버리고 위기지학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이 위기지학을 실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출처 : 한국정치사상사 292p)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역사책에서 익히 공부를 하셨을테구요. 기묘사화의 원인만 보자면, 바로 정국공신의 개정입니다. 정국공신들이 과연 합당한 자격을 가졌는지를 살펴보아 훈적(勳籍)에서 삭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비추어보면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해당합니다.
정국공신이라는 게 정변을 통해 임금을 갈아치우는 데 공을 세운 것인데요. 조광조는 '私益'을 앞세운 자들이 공신으로 남아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중종 입장에서는 자신을 옹립한 지지기반세력을 제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조광조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이를 허용하여 100여 명의 공신 가운데 76명을 공신에서 삭제해버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나 탐하는 궁물들, 혹은 기득권세력이 강력하기는 합니다. 조광조는 공신삭제 조치를 취한지 나흘만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배를 갔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는데요. 중종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고 사초에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집권 초반에 부도덕한 과거를 청산하고 공신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사림의 도덕론이 필요했고 그것은 현실적으로도 유용했지만, 도덕론을 앞세워 권력을 교정하려는 사림의 시도는 결국 왕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출처 : 한국정치사상사 301p)
결국 왕권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사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은 균형을 찾아가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공론정치를 통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이상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현실권력이 아닌 백성들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다
어쨌든 조광조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조 원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에 의해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기도 했습니다. 완전한 복권이 된 셈이죠.
이제 조광조의 이념이 어떻게 살아서 후대에 남겨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색,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에서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세상을 세워보고자 했던 선비들은 현실정치에서는 사실상 모두 패배했습니다. 세종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렇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조정의 녹을 먹었던 그 시대의 다른 선비들을 모조리 이분법적으로 훈구세력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훈구세력이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는 것 정도로 정리하면 될 것입니다)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은둔했거나 죽임을 당했던 선비들, 개국 초 권력분점을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한 선비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며 은둔했던 선비들, 무오사화와 기묘사화 등을 거치며 은둔했던 선비들, 그들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바로 '향약'과 '서원'입니다.
향약은 조광조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도 도입이 시도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제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묘사화로 중지되었고 이후에도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국가차원에서는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중앙정치를 위협하는 지방정치세력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그러나 지방으로 내려간 선비들은 자율적으로 향약을 실시했습니다. 일종의 지역공동체 구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공이산님이 퇴임 이후에 봉하마을에서 펼치는 활동 역시 조선시대의 향약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향약을 통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4개조에 의해 지역공동체를 건설했다면, 서원은 교육기관으로 인격완성과 가치관 정립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서원이야말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상을 지배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약과 서원은 현실권력에서 밀려난 선비들이 세상을 바꾸는 최고의 방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경험적으로 아실 것입니다.
이들은 향약과 서원을 통해 공동체를 구축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대단히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규범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지배하고,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살아있기도 합니다.
현실정치에서는 상호견제적이었던 붕당정치가,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세도정치로 이어져 민생이 파탄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지방으로 내려간 선비들은 공동체의 규범을 세우고, 각자의 인격을 세우고, 가치관을 세워 각종 전쟁에서 의병활동을 통해 나라를 구하는 역할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비교하면, 과연 누가 세상을 지배한 것일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려말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시작해서 조광조의 몰락과 사림파들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향약을 만들어 지역공동체를 구축하고, 서원을 세워 교육에 힘쓰는 그 과정은 그들을 칭송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훈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오늘 우리가 선 자리에서 미래를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조선이라는 국가에 발딛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동규범을 만들어내고, 현실화시키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제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배운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일관성있는 사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전입니다. 공동체가 진보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려말선초(麗末鮮初)의 선비들은 그 사상의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패배자가 되었지만, 어떻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바꿀 수 없는 뼈대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이어갈 후학을 양성하여 면면히 그 사상이 흐르도록 하였으며, 현실정치에서 이를 구현하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최상층의 정치권력을 떠나 위로부터의 개혁을 포기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황과 이이라는 탁월한 사상가를 길러낸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상을 통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현실 권력투쟁에서도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 비추어보면 노공이산님을 비롯하여 2002년 세상을 뒤흔들었던 세력은 기존의 한국 정치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지역연고, 혈연, 학연, 각종 이해관계로 엮어진 정치세력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는 려말선초의 선비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현실정치권력의 최고 권력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그 세력들은 지역연고에 기반을 둔 세력들(한나라당, 민주당, 선진당의 공통점)과 '운동권'이라는 동창회 비슷한 세력(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 등의 공통점)들에 비해 절대 소수였으며, 결국 열린우리당의 간판을 내리면서 몰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력들은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간 신세입니다. 일부는 살아남아 목소리 죽이면 연명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 정치권력 투쟁에서는 몰락한 것입니다.
참여정부가 세웠던 국가의 새로운 비전은 훈구세력으로 변질된 정동영과 김근태 등을 비롯한 열린우리당 창당세력에 의해 배신을 당했으며, 그 결과 현실정치에서는 소수로 몰락했습니다. 그리고 현 정부에 의해 참여정부가 설계한 비전은 폐기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은 정도전과 집현전 학사들, 조광조가 걸었던 길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의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전제해야 할 것은, 우리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정권획득을 통한 개혁의 한계를 겪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2002년과 같이 정권획득을 통한 새로운 질서 창출은 요원한 상황에 처했다는 점입니다.
풀뿌리 단위의 민주주의 획득
그래서 이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입니다. 향약을 건설하고, 서원을 세워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노공이산님이 봉하마을에서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공동체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토론에 붙이며, 마을 주민들 모두가 주인으로서 참여하는 경험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봉하마을 단위에서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시스템이 성공하면, 그 단위는 진영으로, 다시 김해로, 또다시 경상남도로, 그렇게 확대되어 가리라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하부의 단위가 튼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민 각자가 주인으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경험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이를 내재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같은 봉하마을이 전국 곳곳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공동체의 현안을 민주적으로 의사결정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21세기판 향약의 복원입니다. 이를 통해 각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존중받으면서, 공정한 시장의 규칙에 따라 각자의 역할과 능력만큼 이익을 나누어 가지고(능력에 따른 차등은 공평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경험을 공유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최하부 단위에서의 민주주의 학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최하부단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생겨날 때, 언젠가는 최상층부의 현실 정치권력이 민주적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민주시민의 양성에 힘써야
이와 함께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하는 부분은 교육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랬듯이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학교를 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든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다지고, 이를 한국 현실에 적합하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사상으로 정립하여 교육을 통해 널리 확산시켜야 합니다.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보편적이고, 일관성을 획득하고,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는, 그런 민주주의 이론을 세우고, 이를 내 자식과, 내 가족들과, 내 주변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조광조가 '소학'을 교재로 삼아 후학을 길러내고 백성들을 교화해냈다면, 우리도 교재를 만들어 출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용, 청소년용, 일반인용 등 함께 읽으면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책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한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허약하고, 자기의 권리와 책임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는 한, 그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노무현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다시 나온다하여도 시민들이 국가의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다시 역사는 후퇴를 맞이할 것입니다.
각 개개인이 스스로를 세우지 못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한,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한다 하여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5년간 충분히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는 동시에,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조선시대의 사상을 지배했던 선비들을 탐구한 결과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