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 공불이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이제부터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의 본격적인 법문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장난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반야경의 핵심만을 뽑아 놓은‘심경(心經)’에서 말이지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空)하다는 무상(無常)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無我)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논리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화엄의‘사법계(四法界)’를 잠시 빌린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因)과 연(緣)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계, 책상, 혹은 내 사랑하는 연인 등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과 연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인연생이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色)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바로 공이라는 것은, 시계가 공(空)이고, 책상이 공이고, 애인이 공이라는 것이기에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다르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젠가는 공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색이란 우리의 사량(思量)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에서는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며,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이법계(理法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이사무애법계’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텐데, 다시 한번‘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色),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空)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 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반야라는 지혜의 안목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자니 우리 범부 중생의 사량으로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다음에‘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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