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균형발전과 수도권집중화의 폐해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그리고 역적의 아들 '우장춘'

장백산-1 2010. 1. 30. 20:35


  삼족오 (2010-01-28 23:16:59, Hit : 341, Vote : 5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그리고 우장춘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신동아닷컴 42.11월호에서 발췌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이종각│전 동아일보 기자 ·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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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범선, 많은 사람이 그가 누군지 모른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면 “그러냐?”며 놀라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근현대사에서 절대 잊혀선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우범선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이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갔던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다. 1857년생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1월 서울에 처자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1903년 11월24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한국에서 온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우범선을 살해한 자객은 고영근이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직후 일본 경찰에 자수했고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살해 이유를 밝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아직 배후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범선 살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참조, 동아일보사, 2009년)

-‘여우사냥’-

  을미사변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세가 충천했지만 곧바로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얻어낸 랴오둥(遼東)반도를 청에 다시 돌려주라고 압력)이란 암초에 부딪혔다. 러시아와 전쟁을 할 형편이 못됐던 일본은 굴복했다.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자 조선 왕실은 내각에서 친일파를 면직시키고 민씨 일파와 친러파 등을 대거 기용했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일본 정부는 주한공사에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 공작(작전명 ‘여우사냥’)을 준비했다. 미우라는 조선에서 일한 지 7년째인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이 일을 맡겼다.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을미사변 11일 전인 9월27일,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에게 훈련대 해산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줬다. ‘훈련대 해산’ 소식은 당시 일본엔 중요한 정보였다.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미우라 공사가 그 일에 우범선이 이끄는 제2대대를 앞장세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사 이전에 훈련대가 해산돼버리면 미우라가 계획한 훈련대 동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여우사냥’은 결정적인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미우라는 당초 계획(10월10일)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미우라 공사는 10월1일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휘하 낭인들을 ‘여우사냥’의 전위대로 동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낭인들 보수로 6000엔을 제시했다.

-우범선의 결정적 제보-

  이런 일본 측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한 왕실은 훈련대 해산을 서둘렀다. 훈련대 해산을 결정한 10월7일 오전 9시, 군부대신 안경수는 일본 공사관을 방문해 10월8일 무장해제를 정식으로 통고했다. 이때 우범선은 공사관으로 찾아와 미우라 공사와 ‘긴밀한 얘기’를 나누면서 ‘거사’ 동참을 흔쾌히 약속했다. 미우라는 오후 4시경부터 거사에 가담할 일본 경찰과 주요 민간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동원 태세를 최종 점검, 8일 미명 대원군을 앞세워 입궐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날 밤 우범선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에겐 보고하지 않은 채 야간훈련을 한다며 병사들에게 실탄까지 휴대시켜 출동했다.

  10월8일 새벽, 일본의 군인, 경찰, 공사관원에다 낭인들, 조선군 훈련대로 구성된 기괴한 다국적 혼성부대는 현재의 서대문경찰서 앞에 집합해 정동을 거쳐 광화문으로 향했다. 대원군이 탄 가마를 한가운데 두고 아다치가 지휘하는 낭인 50여 명이 일본 경찰 10여 명과 함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일본군 수비대가, 수비대 뒤를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가 따르고, 대원군 가마 좌우는 낭인별동대가 호위했다. 대원군 가마 바로 뒤에는 다시 일본군 수비대 1개 대대가 따랐다. 맨 뒤에는 이두황이 인솔하는 훈련대 제1대대가 배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선발대로 뽑힌 일본 경찰이 긴 사다리를 광화문 옆 담벼락에 걸어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광화문을 경비하던 조선 순검과 병사들은 아무런 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놀라 도망쳤다. 경복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진입했다. 오전 5시50분경이었다.

  그렇다면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당일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의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가 1933년에 편찬한 ‘동아선각지사기전’엔 우범선이 명성황후의 사체를 버리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스기무라 군일기’에도 우범선이 명성황후 사체를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 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 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그 노트가 쓰이기 약 30년 전인 1903년 11월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이 자수할 때 소지했던 ‘한국 정부 앞으로 보내는 서한’에도 우범선에 대해 ‘시국모소체지극역대악(弑國母燒體之極逆大惡,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극역 대악)’이라고 되어 있어 우범선이 사체를 소각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반인에게도 널리 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죽어야 하는 운명-
  
1857년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우범선은 당시 일본 교관이 지도하는 별기군의 간부로 일하던 중 극심한 모멸을 당하자 사직한다. 이 같은 굴욕이 민씨 일파 등 수구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을 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우범선에게는 처와 딸 둘이 있었다. 그는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요시찰한국인거동(要視察韓國人擧動)’ 자료에 따르면 우범선의 망명 뒤 행적은 미우라 등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일본인사들과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우범선은 도쿄의 혼고에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라는 열다섯 살 어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미우라는 나카의 중매인이 우범선의 인품에 대해 묻자 “좋은 친구이지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사내야. 이 점을 감안해서 중매를 서주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우라는 우범선이 조선에서 온 자객에게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4월 장남 장춘이 태어난 후, 우범선은 1898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처의 언니 부부가 사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와쇼마치로 이사했다.

-고영근의 복수-

  1854년생인 고영근은 상민 출신으로 민씨가(家)의 실력자였던 민영익가의 청지기, 즉 시중꾼으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직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1903년 10월28일, 고영근이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고영근은 자신이 결코 자객이 아님을 열심히 설명했고 우범선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자 자신도 구레에 살고 싶으니 방을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풀어진 우범선은 고영근을 자신의 집에 사흘간 기숙시키며 살집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그 사이 고영근은 은밀히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24일 저녁 6시경, 고영근과 노윤명 그리고 우범선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새로 구할 방을 결정하고 집주인과 계약을 마친 것을 이유로 고영근이 우범선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제안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한 시간쯤 경과한 뒤 고영근이 슬며시 일어나 품속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몸으로 우범선을 덮쳐 턱과 목 등을 수차례 더 찔렀다. 그 순간 노윤명이 준비해두었던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난타했다. 우범선은 즉사했다. 당시 우범선의 나이는 47세,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만 8년1개월, 일본으로 망명한 지 7년 10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였다. 둘은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곧바로 인근 와쇼마치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 다음날인 11월25일, 우범선의 처 나카는 집으로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우범선이 평소 자객에 대해 상당히 조심했으나 결국 고영근에게 당한 것은 우범선의 운이 다한 것이다. 고영근의 계략에 당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고종, 이토에 고영근을 부탁-

  히로시마 감옥으로 이송된 고영근 등에 대한 재판은 신속히 진행됐다. 12월24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고영근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심결정서를 읽어본즉, 그대로 해도 좋으나, 단지 ‘모살죄’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의 여덟 자를 넣어야만 본뜻이 되며, 또 노윤명을 공모자라고 그러는데 그는 전적으로 종범으로 단지 방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변호인들은 고영근, 노윤명을 의사(義士)라고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충신효자의 모살죄는 경감해주는 판례가 있다며 형량 경감을 주장했다. 우범선 살해 소식이 알려진 뒤 서울에선 고영근의 죄를 사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종은 직접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했다. 그해 12월26일, 고영근과 노윤명은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해 고무라 외상은 다음날 하야시 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양인은 다분히 상소할 것으로 보이나 만약 사형으로 확정된다면 한국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특사를 (천황에게) 상주하여 한 등급을 감형하여, 목숨을 건지게 하는 것을 고려 중이므로 그 뜻을 (한국) 황제폐하에게 내밀히 상주해주기 바란다.”

고영근의 감형을 외교카드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1904년 2월4일, 히로시마 항소원(고등법원) 제2심 재판에서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윤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12년으로 각각 감형되었다. 고종은 그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로 방한하자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특별히 부탁했다.

-‘씨 없는 수박’은 허구?-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살해됐을 때 우범선의 일본인 처 나카는 임신 중이었다. 우범선이 살해된 다음해(1904년) 봄, 나카는 유복자인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범선은 장남인 장춘에게는 ‘우’란 조선 성을 붙여주었으나, 나카는 남편이 사망하고 난 뒤 태어난 차남을 자신의 먼 친척 M의 친자로 입적시켰고 성도 M으로 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범선 사후 20여 년간, 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상당한 액수의 학비를 지급했고 일본인 처 나카에게도 지원금을 보냈다.

  우장춘은 1950년 3월 한국으로 와 1959년 여름, 숨질 때까지 농업 발전에 기여했고 그 공로로 문화포장을 받았다. 대다수 한국인은 우장춘을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대학의 기하라 히토시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었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시범 ‘재배’한 것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고종이 이토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 주효했는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고영근은 감형되어 1909년(일자는 미상) 형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고종 승하(1919년) 후 2년여가 지난 1921년, 고영근은 금곡리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명됐는데 그는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종 승하 후 4년 가까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를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高宗太皇帝’ 등 여덟 자를 더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운 것이다. 난처해진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의 궁내성과 협의한 끝에 다음해인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3·1만세운동 직후 능비문제로 다시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참봉직에서 물러난 다음해 병으로 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금곡 숲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냈는데, 병으로 죽자 뼈를 태왕(고종)의 능 밑에 묻었다.” (곤도 시로스케,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 초센신문사, 1925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는 고영근. 그는 이렇게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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