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를 위한, 지옥으로 모는 교육정책

[스크랩] 죽어야 산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장백산-1 2010. 4. 9. 14:38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살아 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무척 많이 갖고 있는 듯이 보이나 실은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생각이 시키는 대로 사회적 지위, 부의 축적, 성적 매력, 자식에 대한 기대 등 온갖 외적인 대상에 쏠려 있거나, 영적인 구원, 새로운 종교, 마음의 안식 등 내적인 요구에 쏠려 있다. 이러한 외적,내적 요구의 원천인 우리 자신의 사고 구조,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 그럴까? 우리의 문화적인 환경이 이러한 요구를 아예 차단하도록 우리를 길들인 것은 아닐까? 지나간 교육을 되돌아 보면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지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부모 또는 교사로부터 항상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고 종교적인 가르침 조차도 구원받은자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가르쳐왔다. 이러한 교육에는 어떤 숨은 의도는 없었던 것일까? 산업사회에 소요되는 자원으로서의 인간, 기존 체계를 유지 보존해야할 인간이 교육의 궁극 목표는 아니였는지.

이렇게 교육받은 우리가 만든 사회가 현재의 모습이다. 끝없는 전쟁과 폭력, 빈부의 격차, 마약 등이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단어가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사랑이 메말라 버리고 질투와 탐욕과 야망으로 점철된 사회이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있어왔다. 몇몇 혁명가에 의해서 변화가 시도되기도 하였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변화를 외쳐왔으나 허사였다. 이제 우리는 심판의 날 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근본적인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한 때인가.

우리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아는 영역내에 있는 존재이다. 모르는것, 미지의 것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다. 우리의 사고가 미지 세계로의 변화를 두려워 하듯이, 우리가 구성원인 이 사회도 변화를 두려워한다. 사고의 변화는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새로운 학설, 새로운 이론 등에 대한 추종으로 작은 변화는 가져올 수 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 하다. 사고의 기본 요소는 기억이며 기억은 과거의 것이다. 과거의 축적인 사고가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여 변화를 시도하나 여전히 그 뿌리는 과거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죽은 것이다. 사고에 붙잡히는 것은 기억에 붙잡히는 것이고, 기억에 붙잡히는 것은 과거에 붙잡히는 것이다. 또한 과거에 붙잡히는 것은 죽음에 붙잡히는 것이다. 죽어 있는 사고로 살아 있는 현실에 맞선다는 것은 항상 고통과 좌절을 동반한다.

그 동안의 시도된 변화가 사고의 변형을 통한 것이였다면, 오늘의 현실은 그 효과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변화는 사고가 끝나는 곳에 있지 않을까? 사고의 끝은 어디인가? 물론 육체가 사망에 이르면 사고는 끝난다. 그러나 육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고가 끝날 수 있을까? 사고가 사고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고가 과거로서의 실체, 죽음으로서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는 논리적인 분석을 통한 설명이 아니다. 사고에 대한 수 많은 설명이 이해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해란 사고가 사고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보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쉴새 없이 동작하던 사고가 멈춘다. 육체는 살아 있는 데 사고가 멈추다니! 이후에 벌어지는 변화는 엄청난 주의력과 민감함의 발생이다. 사고가 멈추어 선 상태에서 발생하는 민감함에는,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시간상 괴리가 없다.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행위가 있을 뿐이다. 이때 그의 행위는 사랑이고 진실이다. 과거로부터, 즉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바라봄,관심,이해가 필요하다. 사고의 죽음은 새로움의 시작이다.

생사가 달린 문제에 대충이라는 말과 나중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출처 : 크리슈나
글쓴이 : 크리슈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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