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동영상: 광양교회 엄인영목사]

장백산-1 2010. 5. 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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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일자:2010-04-25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
 
::누가복음 19장 1 - 10절::

요즘 봄이 되어서 여기저기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결혼하는 신랑신부들을 보면서 잘 살아야 할텐데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결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문인지만 중요한 질문입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섭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행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의 늪지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연 불행한 삶을 청산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 주인공은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삭개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했습니다.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는 짧막한 말속에
삭개오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였고 직위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유대사람들에게 원성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정부에 세금을 걷어 바쳤습니다.
로마정부의 앞잡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로 하면 과거 일제시대 때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이런 세리의 장이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우리로 하면 이완용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이 “충실한, 정직한” 이란 뜻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정부의 이익을 위해 자기 동족의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결코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동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원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증오의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말씀 7절에 “뭇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했습니다.
“저런 나쁜 놈의 집에 예수님이 가시다니. 저 민족반역자”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피해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왕따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대신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살던 여리고는 아주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여리고를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리고에는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명 ‘종려의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종려나무에서는 당도가 높은 대추야자열매가 열립니다.
저도 먹어 보았는데요.
얼마나 달콤한지 그야말로 꿀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종려나무가 많다는 것은
이 지역이 땅속에 지하수가 풍부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리고는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였던 것입니다.
이 여리고는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발삼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또 장미의 정원이 있어서 5월만 되면
온 천지가 장미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여리고를 생일선물로 바쳤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통도 컸습니다.
생일선물로 한 도시를 통째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추야자 열매와 발삼나무 향유를 팔아 큰돈을 벌었습니다.
여리고는 아주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로마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으니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쉽게 말해 삭개오는 로마정부의 고위 공무원이었고
물질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던 부자였습니다.
아침에는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면서 비단이불에서 잠을 깼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정원에서 살았습니다.
날마다 진수성찬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삭개오는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왭니까?
늘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맞바꾼 사람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권세를 누리고,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렸지만 언제나 외톨이였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교제를 나눌 수 없었고,
따스한 정이 담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원망의 대상이요,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만의 성을 쌓고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쌓아 놓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만의 성을 높이 쌓아 놓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매국노의 집이라고 해서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잔치상을 벌여놔도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적막함이 그 집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혼자 먹어 보세요.
맛이 있습니까?
맛이 없습니다.
산해진미일수록 소태처럼 씁니다.
산해진미일수록 같이 먹어야 합니다.
시금치 콩나물만 먹어도 같이 먹을 때 맛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교회밥이 맛있다고 말합니다.
왭니까?
물론 우리 교회 권사님들의 음식솜씨가 좋기 때문이지만,
또한 함께 먹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같이 웃고 떠들면서 먹기 때문에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전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풍문으로 듣는 예수님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고 누구하고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는지
3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저처럼 훤칠하질 않고 좀 키가 작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가봤자 예수님의 얼굴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삭개오가 포기했습니까?
단념했습니까?
아닙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둘러보던 삭개오의 눈에
돌무화과나무가 들어왔습니다.
저도 삭개오가 올라갔던 나무를 가서 보았습니다만,
나무가 상당히 큽니다.
우리 교회 천정만큼이나 큽니다. 

이런 나무를 주저하지 않고,
세리장이라는 체면도 벗어던지고,
위험도 감수하고 올라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만큼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고 싶은 열망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니다.
그만큼 삭개오가 불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삭개오는 행복할 줄 알고 자기만의 성을 높이 쌓았는데,
쌓고 보니 행복하기는 커녕 불행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끝내고 싶은 열망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열망이 체면도 벗어던지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런 삭개오에게 찾아가셔서
행복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중에서 삭개오를 단 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기만의 성을 쌓고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살던 삭개오.
온갖 외로움의 고통을 맛보면서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삭개오에게 다가가셔서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와 이웃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그 손은 진실로 행복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었습니다.

그 때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람쥐처럼 쪼르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까?
이 말은 자기 성안에 갇혀 불행하게 사는 삶을 청산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과 계기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삭개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말이 삭개오의 모든 삶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삭개오가 평생 쌓아온 모든 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지난날의 모든 고통스러운 삶이
풍선터지는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삭개오가 합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니 삭개오가 누굽니까?
평생 물질을 쌓아놓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감내해온 사람 아닙니까?
그 재산이 어떤 재산입니까?
생명보다 귀하고 피보다 진한 재산아닙니까?
그 귀한 재산을 절반을 딱 떼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다니요?
게다가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니요.
아니 예수님이 재산에 대해 언급이나 했습니까?
입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 삭개오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삭개오가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이런 삭개오의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제 더 이상 굳게 닫힌 성안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굳게 닫고 있던 삶의 문을 이웃에게로 활짝 열어젖힌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이로 행복이 물밀듯 들어와 넘실거렸습니다.
지금 삭개오의 얼굴에는 불행의 그늘이 걷히고,
지금까지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행복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9절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말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자를 말합니다.
어떤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벗어나 있을 때
잃어버린 물건이 됩니다.
이러한 물건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찾은 물건이 됩니다.
구원받은 물건이 됩니다.
서로 돕고 의지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성에 갇혀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서로 돕고 살라는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성안에 갇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닫힌 문을 열고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회복하면,
찾은 자가 되고 구원받은 자가 됩니다.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잃어버린 자리를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어느 통계기관에서 여성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렇게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미심장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응답한 여성들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밤늦게 만취되어 돌아온 남편의 냄새나는 양말을 벗길 때”였습니다.
남편이 바쁘다고 가정일에 무관심하고
그 긴밤을 혼자 하얗게 샐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아무리 대궐같은 집에서 산다할지라도
그 얼굴에는 한숨과 눈물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 교회에서 그런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바빠서 늘 혼자였습니다.
외로움이 늘 그의 친구였습니다.
그 눈에서 눈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돌무화과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처럼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집안에만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문을 이웃에게로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그 여인은 일주일 중에 하루를 동네 불우한 노인을 찾아가서
빨래를 해 주었습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는 일에 시간을 쪼개고 물질을 쪼갰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에게 돌아온 것은 두 가지 였습니다.
존경심이 가득한 동네사람들의 눈빛이었고,
그 집사님의 삶에 생기가 넘쳤습니다.
이웃에게 도움을 베푸는 삶이 그 집사님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행복지수가 어느 나라가 제일 높습니까?
방글라데시가 제일 높습니다.
왭니까?
다들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성을 쌓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감출 것도 없고,
성을 높게 쌓고 잠글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삽니다.
과거 옛날 우리도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콩 한 쪽도 서로 나눠먹고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그 때가 행복했습니다.
더불어 살 때 행복한 법입니다.
많이 가지고 나누면서 살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을 우리보다 원하시는 하나님이 뭐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서를 펼치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들려옵니다.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살지 말아라! 더불어 살아라!’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선지자들마다 와서 외쳤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뭐라고 정리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라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성을 높이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이웃에게 오픈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삶을 나누고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건강한 삶을 살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는 사람입니다.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삭개오와 비슷한 삶을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만의 성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성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이웃에게로 향한 담을 높이 쌓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인생입니다.

오늘 삭개오는 세상 것 때문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삭개오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린다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자기만의 성을 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받은 상처가 아무리 커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만의 성에 들어가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 성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자기만의 성을 쌓고 그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더 이상 자기만의 성에서 살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아직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길에서 벗어날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삭개오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사는 불행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다가오셔서
필요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행복한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진실로 인격적으로 만날 때
그 인생이 행복하고 가치있고 복된 인생이 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만난 자마다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삶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눕니다.
물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재능을 나누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웃과 함께 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불행끝 행복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과연 오늘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예수님은 여전히 말씀속에 살아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성경말씀이 우리 인격안에서 육신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속에 살아계십니다.
여전히 말씀속에서 행복한 삶으로 초청하는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내미시는 손을 잡을 때
모든 불행이 청산되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말씀사경회가 좋은 기회입니다.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는 부흥회라고 하지 않고 말씀사경회라고 했습니다.
말씀사경회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을 깊이 새기는 거룩한 집회였습니다.
말씀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끝내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바로 이런 말씀사경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4일 동안의 말씀사경회는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목사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갈급함과 간절함을 가지고
이번 집회에 참석하는 자마다
말씀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이 반드시 만나 주실 것입니다.
불행의 끝을 보게 하시고 행복한 삶으로 초청해 주실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생명길로 영생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복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