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무아(無我), 동체대비(同體大悲), 자비(慈悲)---[도올/김용옥]

장백산-1 2010. 12. 25. 23:39

 

 

불교의 핵심은 무아다.  결국은 무아로 가야 한다. 무아에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이론적
인 깨달음이 아니라, 무아의 소이는 무아행이다. 무아를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덧없는 것
이고, 오뇌가학일 뿐이고, 환멸 가면, 사라진다. 가학적인 존재.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닳을 때, 실천해서 사는 것이 무아행. 무아행이라는 것이 이것이 자비여 무아행 = 자비 이
건 다른 거거든요. 지눌 선사께서 말씀했듣이, 돈오점수라고 했잖아요. 점수가 그건 자비를
위해서 있는 거다 .
 
지눌의 돈오점수의 점수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깨달아도, 이게 불완전한게 아니라, 자비행
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돈오점수가 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은 베풀 줄 알고, 베풀기 위해
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의 어려운
것 생각해 보는 것. 불법의 말씀을 통해서, 무아행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 불완전하나마, 제
인생을 사회에 그러한 깨달음이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 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원적 문제들을 깊게 깊게 사색한 것이다. 근원적인게 뭐냐?
 
기나긴 사색 끝에 도달한 게 연기라고 했죠. 연기론에 도달했다. 연기라는 건, 모든 것은 의
존해서 같이 일어난다. 산다는 것은 죽기 때문에 의식하는 것이잖아요. 죽음과 삶은 같이 일
어난 것이죠. 연기로. 짧은 거라는게 독립적으로 있어요? 없는 거란 말이죠. 대비되어서, 긴
것과 짧은 것, 같이 일어나는 거죠. 우리는 따로 생각한단 말이에요. 인간 삶이 따로 있고, 죽
음이 따로 있다.
 
모든 것을 같이 일어나고, 어떠한 사물이든지 독립해서 있을 수 없단 말이에요.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거에요. (고기 - 고립되어 단독적으로 일어난다.)  연기의 실상을 알자. 이건
당대에 굉장히 여러운 것이었어요. 왜 내가 태어났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함이 있기 때
문이다.
 
핵심은, 모든 것은 연기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법이 하나의 자기를 가질 수 없단 말이에
요. 연기의 모든 항목을 제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기 속의 제법은 불변한 자기(아트만)를 가질 수 없다.  모든 세간의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없어질 수 있단 말이야. 절대적인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 제법이 항상, 고정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법무아. 제법무아란 말이, 연기론에서 도출된 가장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간단치 않아요.
제법무아는 연기론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아라는 거를 잘 설
명해 보자는거에요.
 
한 번 봐요. 잔디밭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 같지만, 유지하려면 매일 잡초 뽑아야죠. 시누이
웬수, 바랭이웬수 이런 말. 매일 바랭이 뽑는다고. 나도 요즘 바랭이웬수에요. 잡초많지, 벌
레 많지. 잡초밭 보면, 지렁이도 있고, 모기도 있고, 잔디밭이라는 주어적 실체는 있을 수 없
다.
 
잔디밭이라는 주어는 그것을 끊임없이 잔디밭으로 민들고 있는 술어적 상태 속에서만 존
하는 것이다. 잔디밭이 낭만적일 거 같지? 모기 때문에 키스도 못해. 멀리 잔디밭으로 보이
게 하려면, 계속 노력을 해야되. 안그러면 잡초, 민들레꽃. 흉악한 민들레, 버들 나무가 오르
고 그러면 잔디밭이 아니게 된단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잔디밭이 있어서 잔디밭이 있는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것으로 동일
성이 유지되잖아. 같은 체계. 동일성의 유지하는 그것이 이것이 소위 아트만이라고 해요. (자
기동일성체계 = 아트만) 그런데 이 아트만이 있을 수 없단 것. 왜? 연기. 서로 연기되어 있잖
아요. 잡초, 지렁이랑, 연기적 상태란 말이에요. 잔디밭이라는 자기가 없어요. 김용옥이라는
것은 잔디밭이랑 똑같이. 6의 12승 개의 잔디와 같은 거. 생물학적으로. 이 세포들 간의 관계
속에서 김용옥이 있는 거지. 관계가 깨지면, 금방 내가 아니게 된다.
 
나는 눈, 코, 귀 이런 모든게 연기적으로 되어 있는 건데, (김용옥 동일성 체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 그 작동체계가 없어지면 아트만이 없어진다. 가합 =- 임시적으로 합쳐진
상태,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가합이다. 그것은 나가 아니다. - 싯달타 -) 이게 싯달타의 혁명
적 발상이란 말이야. 모든 자기가 없는 거야. 나는 걸어가는 속에만 있는 거에요. 내가 산다.
되요? 그게? 내가 산다 -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와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 나의 인생 밖에 나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
도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웃기는 이야기죠. 아니 내가, 인생 밖에 내가
따로 있고,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다 쓰고 앉았어. 근사한 문장이라고. 어떻게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 분리될 수 없는데. 근데 마치 불변의 나가 있는 것처럼.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언어의 오류, 사고의 오류. 이것을 연기의 눈으로 지적한거여.

싯달타는 우리의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일체가 뭐
냐면, 연기가 되어 있으면, 내가 있기 때문에 너가 있잖아요. 여기서도. 강의가자 있기 때문
에 관중이. 연기론으로, 내가 없으면 너가 없어지죠. 너 죽어. 없어지면, 때릴려던 내가 없어
지는 거에요. 언어적으로 분리해가지고 생각. 내가 없어지면 너도 없어지죠. 그러면 이것과
저것은 동체대비 하나가 되는 거에요. 동체대비 -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
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불교의 이론이라는 것은 아가페, 사랑을 베풀어라. 개같은 소리가 없어요. 연기를
깨닳아라. 근원적으로 나가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라. 연기의 핵심이에요. 얼마나 귀중한 가
르침이에요?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무아론으로 가면 무서워지는 게 뭐냐면,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
학이 무너지는 거에요. 무아론은 모든 실제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다 없어져요. 다 연기된 존재이
고, 없어진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면, 불교는 철저히 이 연기론에 의해서 생겨난 불교, 철
저하게 반형이상적인 것. 철저하게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불교의 본체론
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실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은 곧 현상
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천여년 동안 서양철학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헤
겔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불
교의 동면이었다.

 

아트만화 시켜 실체화 시켜 놓은 것에 대한탐구. 무슨 우주가 유한하나?
무한하나? 안하나? 신이 있다 없다? 신이 있다고 해도 참이고, 없다해도 참이라는 거야. 이
런 경우를 칸트는 안티노미라 불렀어. 이율배반이다라는 거야 안티노미 : 이율배반. 서로 모
순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 안티노미, 이율배반이다 이거야. 영혼과 육체는 동
일하냐? 별개냐? 동일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싯달타
는 침묵한다. 말하지 않았어요.
 
싯달타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이것이 원시불교의 소박함
이다. 심지어,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느냐? 생존하지 않느냐? 이것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 일체의 언변하지 않은 것. 싯달타 사상을 무기라고 해요 (무기 - 기술할 수 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뜻. 형이상학적 명제는 절대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
라도 그것은 우리 해탈에 아물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권 222
-3쪽) 모든 실체 존립근거를 무너뜨려요. 존립근거가 거기서 깨지는 거에요.
 
무아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거는, 무아론은 결국 형이상학의 거부로 나가고, 형이상학이라는
건, 형이상학적인 탐구라는 건, 언어로써 구상. 실체화해서 형이상학 만든 것. 모든 이런 형
이상학 언어에 속아서, 그래서 원시불교에서 선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 통하게 되어 있음. 싯
달타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빠져들면 안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
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저 번에도 추석 이야기하니까 난리야. 인터넷에다, 부모하고 쳐다보는데 낯짝이 뜨거웠다.
논란의 공방이 되어선 안될 문제. 춘성 스님. 그 스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언
어적 직찹에서 깨어나게 하느 것. 춘성스님의 일화는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시대의 공안이
다. 그것은 논쟁꺼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때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 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선의 본질을 깨우친 거야.
 
그말을 들을 적에 낮짝이 뜨겁다느니 개짝의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 사람의 무소유적인 것
을 설파. 춘성스님같은 위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양반이 보통 때는 빤
스도 안 입고 살아요. 주무시지도 않아요. 베개도 없이, 이불도 없이, 승려들이 같이 자면, 주
무신다. 딴 사람들이 자면, 자선한다. 미안할까봐.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 이 양반은 그야말
로, 육두문자로 일관해 살았지만, 실수한 번 없었어요. 자기의 계율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분에게 존경이 있는 것이고, 결국은 무아. 자비로 끝난 거에요. 깨달아야 할 거
는 뭐냐면, 언어로 싸여있는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무아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해체이다.

리는 언어에 의해서 끊임없이 기만당하는 존재라는 것은 싯달타는 2천 5백년 전에,

이미 설파하신 대철학가. 사상가였다. 이거를 알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