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최악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한 사람을 만났다.
이미 내가 처음 보았을 적의 앳된 학생의 모습은 아니다.
선머슴아 같기도 하고 유랑자 같기도 한 그 모습에서
나는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교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론과 수행을 함께 병행하며 공부하고 산 세월이
벌써 십년이 넘는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어쩌면 아줌마일 수도 있고 어쩌면 노처녀일 수도 있는 나이.
그러나 시집을 간 것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인도 바라나시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잠깐 지나치며 만났던 인도.
그리고 바라나시에 자욱했던 매연과 먼지.
그곳을 지나치며 저기는 참 살기 힘들겠다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 곳의 삶이 아주 열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살아있는 대요, 뭘.”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있음으로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대답이 내게 활구가 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으로 그 어떠한 삶의 조건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대답은 조건에 걸리는 내 삶의 부자유를 깨는 것이었다.
살아있음으로 그 어떠한 상황도 최악은 아니라는
그녀의 명징한 지혜가 나는 부러웠다.
인도의 한 우화가 있다.
자신의 상황을 최악이라고 생각한 농부가 어느 날 현자를 찾아간다.
현자를 만난 농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다.
“저는 지금 한 명의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아주 작은 농막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거 공간은 아주 최악입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대답한다.
“그 안에다 한 마리 있는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살도록 하시오.”
농부는 놀란다.
농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현자는 대답이 없었다.
농부는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와
송아지를 농막 안으로 끌어들여 함께 살았다.
그러자 식구들은 이 최악이 되어버린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농부는 다시 현자를 찾아간다.
이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답을 달라고 한다.
그러자 현자는 다시 송아지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그 순간은 언제나 최악은 아니다.
그저 견딜만한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한 농부에게
더 최악인 상황을 만들어
최악이 아님을 일깨운 현자의 지혜는 빛난다.
살아 있으면 됐다는 그녀의 대답은
현자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다.
그녀의 지혜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최악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최악은 아니다.
무거운 더위 아래서도 여린 한 줄기 바람이 부는 새벽이다.
<성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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